꼬리명주나비

  • 장르: 로맨스, 판타지 | 태그: #타임리프
  • 분량: 102매 | 성향:
  • 소개: 다음 생에 나를 잊는다고 해도 이번 죽음은 임과 함께 이번 생에 나를 잊는다고 해도 다음 죽음은 임과 함께 더보기
작가

꼬리명주나비

미리보기

물레는 멎어 있었다. 문틈으로 살바람이 불어 들어와 등잔불이 깜빡였다. 인혜의 손에서 가락이 굴러 떨어졌다.

인혜는 물레를 끼고 앉아 졸고 있었다. 노무에 지친 사람의 호흡은 달았다. 화광이 흐르는 뺨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의 그것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반면 치마 위로 늘어진 손가락은 거칠다 못해 엉망으로 부르터 있었다. 쪽을 진 머리카락 속으로 머리타래를 묶은 검정 비단댕기가 엿보였다.

화로에서 불티가 튀었다. 바람이 잦아들었는지 등잔불이 꼿꼿하게 섰다.

인혜는 꿈을 꾸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해 꾼 꿈, 흉몽이었다.

인혜가 눈까풀을 움찔거렸다. 식은 이마에는 땀이 방울져 있었다. 뒤이어 끔찍한 광경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저고리 앞섶을 뜯으며 신음하는가 싶더니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면서 번쩍 눈을 떴다.

아직은 낮보다 짧은 밤, 그러나 기침이 나올 만큼 공기가 서늘했다.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누른 인혜가 애타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울거리는 불과 그림자를 제외하면, 무엇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신이 내는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 방에는 인혜 혼자뿐이었다.

인혜가 한숨을 쉬면서 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래, 꿈이었어. 그 사실이 인혜를 위로하기는커녕 한층 슬프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그게 꿈이라니. 이제 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잊는 것뿐이라니. 하지만 인혜가 아무리 울며 괴로워한다 한들 내일은 올 것이고 또 묵묵히 하루치의 노동을 해나가야 할 것이었다.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드는 게 옳았다.

물레를 치운 인혜가 옷궤 위에서 이불을 내리려는 찰나였다. 문밖에서 발소리와 함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궤 앞에 서 있던 인혜가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세요?”

“나야. 잠깐 들어가도 될까?”

동생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인혜가 저고리 고름을 고치며 문쪽으로 다가들었다.

“그럼. 어서 들어와.”

선화가 툇마루 앞에서 나막신을 벗었다. 그날 오후 늦게 보슬비가 내려 땅이 질었다. 등잔불이 꺼질 듯 작아졌다. 그러다 방문이 닫히고 선화가 요 위에 자리를 잡는 즉시 되살아났다.

인혜와 선화는 한 살 터울의 자매지간이었다. 둘은 가지런한 눈썹과 갸름한 눈매, 깨물지 않아도 몹시 붉은 입술과 뺨 아래에 패는 볼우물이 닮아 있었지만 묘하게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그건 아마도 정반대라고 할 만한 성정 때문일 텐데 인혜가 말수가 적고 차분하다면 선화는 다혈질에 매우 활기찼다.

선화가 벽 쪽에 놓여 있던 물레를 넘겨다보며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설마, 지금까지 실내리기를 하고 있었어?”

“잠도 안 오고 해서.”

인혜가 힘없이 웃었다. 선화가 근심 어린 눈초리로 자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탈나. 낯빛이 안 좋은데.”

“나는 괜찮아. 미안. 혼례 준비로 바쁠 텐데 괜한 걱정이나 끼치고.”

“그런 말 마, 언니. 식구끼리 염려하는 게 당연하지.”

선화가 인혜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인혜가 그 손을 토닥였다.

“너는? 여태껏 자수를 놓고 있었어?”

“아, 단이에게 줄 혼례 선물을 만드느라.”

선화가 홍조 띤 뺨에 손등을 대며 겸연쩍어했다. 이 집 딸들은 고운 외모와 남다른 우애 외에도 손재주가 뛰어난 것으로 이름나 있었고 같은 이유로 마을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칭송 받았다.

잠시 후 웃음기를 지운 선화가 남모를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말소리를 낮추었다.

“언니 아직도 그 꿈을 꿔?”

안색이 어두워진 인혜가 이렇다 할 대답 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선화가 또 한번 물었다.

“언니도 알지? 이 혼인이 하마터면 잘못될 뻔했다는 걸.”

“응, 그래도 일이 잘 마무리돼 얼마나 다행인지.”

인혜가 구겨진 소매를 만지며 밝은 목소리를 내고자 애썼다. 치마폭 위에 손을 모은 선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흐렸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이는 나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 언니 앞에서 이런 얘길 해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그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어.”

“얘는, 나는 괜찮으니 괘념치 마.”

인혜가 점잖게 대답했다. 눈가가 조금 밝아진 선화가 쥐고 있던 손을 놓더니 인혜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후원에서 이어지는 오솔길을 올라가면 측백나무 숲 너머 빈터가 나오잖아. 거기에 석탑이 세워져 있던 거 기억나? 우리 둘이 그 탑 주위를 함께 돌기도 했잖아.”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