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죽음을 팝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번들거리는 대리석 벽재사이에 구식 아파트의 현관문 같은 것이 뜬금없이 서 있었다. 검고 투박한, 잘못 열 면 빌딩이 무너지도록 삐그덕 소리를 낼 만한 그런 놈이었다. ‘서울 한복판 금싸라기 빌딩에 문패조차 없는 사무실이라.’ 그는 한참이나 문을 노려본 끝에 살짝 떨리는 손으로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안내 데스크의 아가씨가 사람 좋은 미소로 그를 맞았다.

“저……, 최민현 선생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예상외로 멀쩡한 공간이었다. 정말 이곳에 최민현이란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정태호요.”

“아.” 안내원이 서류뭉치를 뒤적이더니 작은 포스트잇 하나를 집어 들었다.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어요.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차례 되시면 말씀드릴게요.”

“기다리셨다고요?”

“예, 어제부터요.”
안내원이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다렸다고? 그가 의아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비교적 한적한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파가 줄줄이 늘어선 것이 사무실이라기보다 병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딱 환자들이 앉아서 대기하고 있는 그런 곳. 하지만 비싼 건축재와 갖가지 인테리어 소품이 사방에 가득하고, 밟기 겁날 정도로 부드러워 보이는 카펫이 조명과 잘 어우러져 있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었다. 하다못해 벽에는 200인치는 가뿐히 넘겠다 싶은 대형 TV도 걸려있어서 저런 건 대체 어디서 구하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소파에는 태호 이외에도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다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뭐, 몇몇은 이해가 갈 법도 했다. 그들은 이미 모든 의욕을 상실한 채 삶에 찌들어 죽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저 아가씨는……

‘그래,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

태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장도 생김새도 전혀 다르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한결같이 체념이 담겨 있었다. 태호는 모두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결국 TV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TV는 연달아 터진 경제난에 대해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40대 남자가 자신을 해고한 공장에 불을 지르다 붙잡힌 모습이 나오고, 성남에서 일어난 모녀 살해사건의 용의자 신상정보가 뒤를 이었다. 자살소식은 너무 많다 못해 화면 아래에 카운트되는 신세였다.

원주시 김우영 47. 서울시 민지혜 27. 청원군 이서훈……. 그사이에 이름이 한 명 더 늘어서, 오늘의 자살 사건은 집계된 것만 82건이 되었다. 태호는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진 게 없으면, 나라가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망할 놈의 뉴스는 계속 개떡 같은 소식만을 토해냈다. ‘이러이러해서 나라가 어렵고 또 이렇게 누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TV를 외면했지만, 아무렴 외면하는 것만으로는 아나운서의 무감각한 목소리를 막을 길이 없었다. 그 비싸고 화려한 공간이 오롯이 나쁜 소식의 땅이었다.

사람들이 차례차례 안내데스크의 뒤쪽으로 사라지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새로 들어와 소파를 채웠다. 안내원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태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반가움과 두려움을 반씩 섞어 휘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4번 상담실로 들어가세요.”
안내원이 복도를 가리키며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말했다.

복도에는 좌우 6개씩 총 12개의 각기 다른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4번 상담실에는 금화더미가 새겨져 있었는데 금화 한 닢마다 그 안에 그려진 사람이며 테두리의 자잘한 주름까지 묘사돼있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태호는 꼭 동전이 넘쳐흐를 것만 같아서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나무로 도배된 아늑한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고풍스럽다 못해 사치스럽기까지 한 그곳은 천장에도 벽에도, 장식용으로 만들어 놓았을 벽난로 위에도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품들이 가득했다. 황금 샹들리에, 황금 촛대, 벽난로 위에 세워진 작은 황금 기사 동상. 하다못해 벽에 걸려있는 큼지막한 사슴 머리도 황금이었다. 방 한가운데는 편해 보이는 적갈색 의자와 격이 다르게 비싸 보이는 의자가 큼지막한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도록 놓여있었다. 그 비싸 보이는 의자에 앉아 태호를 느긋이 바라보는 남자가, ‘최민현’인 듯 싶었다.

“앉아요.”
남자가 말했다.

태호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그는 이십 대 초반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애였다. 피부는 하얗다 못해 빛이 나고 있었고, 표정은 개구지다 못해 철이 덜 들어 보였다.

“앉아요. 태호 씨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압니다.”
남자가 재차 말했다.

태호는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보니 남자의 앉은키가 태호보다 머리 하나는 더 높았다.

“어제쯤 올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늦게 오셨군요. 가끔 그러는 분들이 있지요. 뭐 상관은 없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밝게 말했다.

태호는 그가 지긋이 나이 먹은 사람일 거라고, 못해도 사오십 대는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공기처럼 스며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와인 잔 한 개와 수북한 서류뭉치들이 부산스럽게 널려있었다. 금색 각인을 새긴 기다란 명패도 있었는데, 내용은커녕 어느 나라의 글자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로마자로 표기된 Ⅳ자 하나가 그가 해석할 수 있는 전부였다.

4번.

“아시겠지만 전 최민현이 아닙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름 따위야 아무렴 어떻습니까. 그냥 편하게 선생님이라고 부르세요. 일전에 만나 뵌 적이 있었죠?”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