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나 사이 117광년

  • 장르: SF, 로맨스 | 태그: #정신감응 #우주로맨스 #텔레파시 #외계문명 #외계인 #외계지적생명체 #케플러444 #SETI #골든레코드 #성간여행
  • 평점×14 | 분량: 194매 | 성향:
  • 소개: 정신감응 실험에 참여한 유진은 117광년 떨어진 항성계로부터 신호를 받는다. 상대의 놀라운 정체가 밝혀지고, 삶에 지친 유진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위안을 얻는데, 두 사람의 교류... 더보기

그대와 나 사이 117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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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밤은 까맣지 않다. 세상은 거짓의 불을 밝혀 진실을 감추기에만 급급하다. 불야성의 빛들은 어둠을 직시하기 두려워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알량한 속임수이다. 그들은 빛이 자신과 주변을 비추는 것에만 만족할 뿐, 그로 인해 그림자가 생기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체 하고 있다.

 

-거기 누구 없나요?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나요!

 

유진은 밤하늘에 흩뿌려진 희미한 은가루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고요했다. 우주는 이질적일만큼 무구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저리로 날아가 버렸으면. 나도 별이 되어 실컷 타 버렸으면. 넋두리를 비웃듯 무례하고 선정적인 장면들이 다시금 뇌리를 습격했다.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불쾌하고 불결한 환각의 파도들.

 

-아아악! 누가 제발 이것 좀 꺼내 줘! 나가! 나가라고!

 

유진은 머리를 흔들고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다. 드르륵 창 열리는 소리 뒤로 웬 남자의 고함이 치고 올라왔다.

 

-씨발, 지금 몇 신지 알아! 잠 좀 자자!

 

유진은 몸을 웅크리고 소리죽여 울었다. 한참 뒤, 고개를 들어 희붐한 별무리를 바라봤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그때…….

 
* * *
 

정신감응 통신 실험 프로젝트 참가자 모집.

 

할로윈 이벤트를 홍보하는 포스터들 가운데에서 22세 김유진의 눈길을 사로잡은 광고였다.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프로젝트 종료 시 사례금 3백만 원을 지급합니다.

 

저걸 받아 알바를 줄이면 대학생인지 알바생인지 헷갈리는 생활이 대학생에 가까워지려나. 사기가 아닐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실험을 주최·주관하는 곳은 업계 1위의 이동통신사였다. 유명 대학 교수들이 자문으로 참여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실험을 허가·후원했다.

 

며칠 뒤, 유진의 뇌에는 정신감응용 전자 칩이 이식됐다. 수술하는 줄 알고 긴장했는데 기다랗고 뾰족한 주사 한 방이 다였다. 똘똘 뭉쳐진 칩이 제자리를 찾아가 원래의 모양으로 다시 펴질 거라 했다. 일주일 뒤에는 H통신 연구소의 대회의실에서 실험이 시작됐다. 그날 실험 파트너는 유진의 또래로 보이는, 변호석이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였다. 입만 옆으로 길쭉이 벌려 웃는데다 작고 검은 눈동자가 번들거리기까지 해 파충류를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

 

-반가워요. 잘 해 봐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쥐어보니 차가웠다. 유진은 얼른 손을 거두고 코트 주머니 속의 핫팩을 꼭 쥐었다.

 

각자가 받은 카드에 인쇄된 단어를 정신감응으로 파트너에게 전달하는 것이 실험의 시작이었다. 단어 수는 점점 늘어 문장이 되었다. 주최 측이 사례금만큼 본전을 뽑으려 작정한 듯, 실험은 매일매일 진행됐다. 방식이 지루하기 짝이 없어 유진은 괜히 참가했나 하는 후회가 슬쩍 들었다. 생판 초면인 사람들과 두 시간 내내 ‘챙이 넓은 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호숫가에 앉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군요.’라든가 ‘짜파구리가 너무 맵고 맛있어서 민서는 울면서 먹었습니다.’ 같은 시시한 문장들을 주고받으니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실험은 차츰 힘들어졌다. 하루는 과제가 삼행시 짓기였다. 즉석에서 시를 짓고 정신감응으로 전달하면 상대방이 받아 적었다. 유진은 두 시간 동안 실험 참가자 전원의 이름으로 시를 짓고, 또한 파트너가 지은 시들을 정확하게 받아 적어야 했다.

 

다 끝나니 머리가 지끈거리고 실제로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집에 가면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이라고 얕본 게 실수였다. 사례금을 왜 마지막 날 일괄 지급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실험을 그만두겠다는 사람이 늘어갔다. 그들은 ‘도저히 못 해 먹겠다’며 돈도 필요 없다고 해서 머릿속의 칩을 제거하는 약물을 주입하고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2주가 지나자 유진은 변호석과 다시 파트너가 되었다. 그가 반갑다며 또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그 손을 못 본 척 책상 위의 인쇄물을 집어 들었다.

 

-오늘도 끝나고 알바 가나?

 

변호석이 대뜸 물었다. 유진은 종이에 시선을 박고 대답했다.

 

-네.

 

-편의점 일 힘들겠다.

 

-그렇죠, 뭐.

 

-밤엔 진상 손님도 많고.

 

문득 뭔가가 불편해졌다. 그가 자연스레 말을 놓아서가 아니었다. 내가 저녁에 편의점에서 일하는 걸 이 사람한테 말한 적이 있었나? 지난 2주간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문장을 주고받았고 그 중엔 휴식 시간에 나눈 사적인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특히 여성 참가자들과 파트너가 되면 스스럼없이 말이 나오곤 해서 어쩌면 그걸 옆에서 들었는지도 모른다, 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건 유진의 착각이었다.

 

어느 날 밤, 유진이 일하는 편의점에 변호석이 찾아왔다. 마침 손님이 없던 시간이라 꾸벅꾸벅 졸던 유진은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잠이 달아나버렸다. 말로는 근처를 지나다 필요한 걸 사러 왔다고, 엄청난 우연이라며 호들갑을 떠는데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밖이 너무 춥다며 온장고에서 홍삼음료를 꺼내서는 그 자리에서 뚜껑을 열고 홀짝대며 수다를 떨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실험 참가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유진은 그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해 그 많은 정보를 알아냈는지 신기한 한편, 그의 존재와 수다가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더욱 그랬다.

 

성가심이 공포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유진이 편의점을 나서자 그가 따라붙으며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한 것이다.

 

-아녜요. 괜찮아요.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위험한데.

 

실랑이가 벌어지자 변호석은 잘 들어가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 유진은 그가 제 입으로 말한 ‘진상 손님’이 바로 그 자신임을 알까 궁금해졌다.

 

유진은 그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점점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멀찍이 지켜본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하고 지저분한 골목에 가로등이 침침한 불을 비추고 칼날 같은 바람이 야멸차게 몰아쳤다. 어깨를 움츠리고 길을 걸으며 유진은 누가 뒤따라오는 듯한 느낌에 세 발짝마다 한 번씩 뒤돌아봐야 했다. 보금자리인 옥탑방까지 오는 20분이 2년처럼 느껴졌다. 씻고 이불에 눕기 전, 유진은 몇 번이고 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런데 방금 전의 불쾌한 조우 때문이었을까. 유진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살덩어리와 교성의 향연,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낯 뜨거운 장면들, 사람과 사람의 정사, 사람과 동물의 교미, 남자의 다리 사이에 달린 뱀이 흉물스런 입을 벌리며 달려든다. 유진은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이 외풍에 차게 식으며 몸서리가 쳐졌다. 도대체 왜 이런 꿈을……. 야동 한 번 본 적 없고 남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녀였다. 유진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꿈을 털어버리고는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2주 뒤면 기말고사라 얼른 도서관에 가서 자리를 맡아야 했다.

 

완전히 잊은 꿈이 다시 떠오른 것은 오후에 H통신 연구소에서 변호석을 봤을 때였다. 설마, 아니겠지. 지금 그들의 정신감응 능력은 기껏해야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전송하는 수준이었다. 이미지나 영상을 전송하는 실험은 다다음달이나 돼야 할 거라고 했다.

 

느낌 탓인지 그의 눈길은 끈적끈적해 보였고 말투는 질척거리는 것 같았다. 그와 파트너가 되는 날이면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고, 가까이에 앉는 날은 그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려 실험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꿈은 계속됐다. 파편 같은 장면들의 조합은 점차 스토리를 갖춘 포르노가 되어 갔다. 심지어 꿈은 강의 중에도 의식을 장악해 수업 내용을 통째로 놓칠 때도 있었다. 공부에 집중하기도 힘들어 기말고사도 망치고 말았다. 꿈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남자의 얼굴을 비로소 확인한 순간 유진은 그것이 변호석의 소행임을 확신했다.

 

정신감응 실험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나관철 부장을 찾아갔다.

 

-이상한 꿈? 어떤 이상한 꿈이요?

 

-저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뭐랄까, 야하고 기분 나쁜, 그런 꿈이에요.

 

부장이 씨익 웃었다.

 

-꿈은 무의식을 반영한다던데, 김유진 씨가 평소에 무의식적으로 상상하던 게 나온 거겠죠.

 

기가 막혀 뒷골이 뻐근해졌다. 유진은 떨리는 손가락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아니에요. 그런 생각 해 본 적도 없고, 이런 꿈도 처음이고, 그리고 꿈에 나오는 남자가 그 변호석 씨라고요.

 

-김유진 씨가 변호석 씨한테 호감을 느낀 건 아니고요?

 

유진은 꼭 쥔 주먹으로 부장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아야 했다.

 

-아뇨.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예요. 완전 소름끼치는 사람이란 말예요.

 

유진이 언급하지도 않은 편의점 알바에 대해 그가 아는 것, 그가 퇴근 시간에 맞춰 편의점을 찾아온 것,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집요하게 들러붙은 것에 대해 얘기하자 부장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그가 알겠다며 일단 가보라고 해서 실험이 진행 중인 대회의실로 돌아갔다. 잠시 후, 변호석이 어느 연구원의 지시로 대회의실을 나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몇 분 뒤에 그가 돌아오고 유진이 부장의 방으로 불려갔다.

 

-일단 변호석 씨한테 물어봤는데…… 김유진 씨가 편의점 알바하는 건 김유진 씨가 차소원 씨랑 하는 얘기를 듣고 안 거라더군요. 그날 거기 간 건 정말 우연이었다고 하던데요? 김유진 씨가 꾸는 꿈도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하고요.

 

그럼 그렇지. 도대체 뭘 기대한 걸까. 사람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슨 수로 까발릴 수 있을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나도 뭐 전혀 의심이 안 간다, 이건 아녜요. 미국에서 있었던 일 알죠?

 

어느 정신감응 실험 참가자가 자기 파트너의 비밀스런 생각을 몰래 읽고는 그가 연쇄살인범임을 알아낸 사건이었다. 살인범도 처벌을 받았지만 해당 참가자도 처벌을 받았다. 남의 생각을 훔쳐보는 행위가 해킹이나 도청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로는 두 참가자 사이에 어떤 정보가 오갔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럼 변호석 씨가 보내는 꿈을 막을 수는 없나요? 그것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시험도 망했는데.

 

-일종의 스팸이라고 봐야 하는데…… 사실 이것도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죠. 김유진 씨만 좋다면 이 부분을 따로 연구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어때요?

 

유진은 부장에게 제정신이냐고 소리 지를 뻔 했다.

 

-그냥 변호석 씨를 자르면 안 돼요?

 

부장이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미국 사례 때문에 참가자가 얼마 안 돼요. 거기다 이탈하는 사람도 늘고 있잖아요. 한명의 참가자가 아쉬운 상황이죠. 그리고 이런 부작용이 있다는 게 알려지면 실험 자체가 중단될 수도 있어요. 변호석 씨한테는 일단 경고해 놨으니까 김유진 씨도 더 이상 걱정 말고 실험에 집중해줬으면 좋겠어요.

 

경고가 과연 소용이 있을까. 결국 유진이 참아야 된다는 소리였다.

 

실험을 마치고 가방을 집어 드는데 한 남자들 무리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에 변호석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걸 보니 누구 얘기를 하고 있을지 뻔했다. 한껏 노려봐주고 싶었지만 유진은 그러지 못 했다. 눈이 마주치면 그게 둘 사이를 연결하는 정신감응 케이블이 될 것만 같았다.

 

음란한 꿈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 이제는 변호석이 전송한 이미지인지 유진 스스로가 상상한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어떻게든 장벽을 쳐보려 애쓰던 유진이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만 해! 싫다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어디선가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싫다면서 잘도 참았네. 너도 좋았던 거겠지.

 

-아니야! 정말 싫다고! 내 머릿속에서 나가!

 

-난 너 같은 애들을 잘 알아. 순진해 보여도 한 번 맛을 보여주면 빠져나오질 못 하지. 어때, 나한테 와 볼래? 환상이 아니란 걸 알게 해 줄 테니까.

 

-나가! 나가! 나가라고!

 

외침이 육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나가, 나가란 말이야, 중얼대며 이불 위에 쓰러져 있는데 누군가가 계단을 타박타박 올라오더니 문을 탕탕 두드렸다.

 

-학생, 왜 그래? 뭘 나가라는 거야?

 

집주인 아주머니였다. 유진은 급히 문을 열고 얼버무렸다.

 

-죄송해요. 자다가 이상한 꿈을 꿔서…….

 

-아우 증말, 난 뭔 강도라도 든 줄 알았네. 안 그렇게 생겨서 목소리가 왜 그렇게 커? 에이, 오늘 잠은 다 잤네.

 

아주머니는 혀를 한 번 차고 내려갔다. 유진도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다시 한 번 나관철 부장을 찾아갔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봐요, 김유진 씨, 둘 사이 문제를 내가 왜 관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사람은 그런 꿈을 꿨다는 사람이 없어요. 정신감응 말고, 변호석 씨한테 직접 물어봤어요? 사람이 숫기가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남자의 순정을 받아주라는 둥, 변호석이 유진을 짝사랑해서 혼자 꾼 꿈이 흘러들어간 건지도 모른다는 둥, 싫으면 애매하게 굴지 말고 딱 잘라 거절하라는 둥, 말하는 게 가관이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새어나가 실험이 종료될까 봐 쩔쩔 매는 모습이었다.

 

-이건 짝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에요. 아무것도 안 해 주실 거면 제가 직접 신고할 거예요.

 

-해 봐요. 증거는 어떻게 찾을 건데? 그리고 계약서 읽어봤죠? 실험에 관한 기밀은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항 말예요. 고소당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실험이나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도 저도 싫으면 그만두고 나가든가요.

 

그럴 수는 없다. 이 실험에 참가하느라 그만 둔 아르바이트와, 연구소를 다니며 들어간 교통비는 어떻게 하라고. 유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푹 숙이고 방을 나왔다. 몇 번 파트너가 되어 안면이 트인 차소원에게 슬쩍 운을 띄워봤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면서 자긴 그런 일을 당한 적이 없고, 만일 유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찰에 신고하든가 실험을 그만둬야 되는 거 아니냐는 원론적인 얘기만 했다.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날 밤, 유진은 옥상의 낡은 의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건가. 강원도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엄마 아빠는 편의점을 내면서 진 빚 때문에 알바생도 없이 낮밤을 나눠서 일하느라 서로의 얼굴도 못 보고 있었다. 그런 두 분에게 이런 일을 털어놓을 순 없었다. 학교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진의 얘기를 믿어 줄지, 믿는다 한들 그 애들이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였다. 밤하늘을 애타게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았을 때, 음탕한 이미지들의 폭격이 시작됐을 때, 간절하게 외치며 도움을 구했을 때. 목소리였지만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어도 아니고, 세상의 말도 아닌 것 같았다. 다만 목소리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성령의 빛이 지옥의 악귀를 몰아내듯, 목소리의 등장과 함께 변호석의 공격이 멈췄다. 목소리는 낮고 영롱하고 은은했다. 언젠가 성당 옆을 지나다 들어본 미사곡 같았다. 유진은 실험에 참가한 이후 처음으로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이후,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전자 칩의 부작용이 아닐까? 머리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닐까? 그런 거라면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칩을 제거해야 했다.

 

나관철 부장의 방에는 중년남성 세 명과 중년여성 한 명이 더 있었다. 실험 자문으로 참여한 대학 교수들이었다. 어른들 대화를 방해하긴 싫었지만 유진은 마음이 급했다. 목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자 나 부장이 인상을 쓰며 발끈했다.

 

-됐습니다, 됐고요. 알았으니 칩 제거합시다. 보상금도 챙겨줄 테니 더 이상 분란 만들지 말아요. 나 원, 김유진 씨처럼 별난 사람은 처음 보겠군요.

 

-부장님, 잠시만요. 이거 저희가 찾던 걸지도 몰라요.

 

중년여성이 나섰다. 부장과 달리 상기된 표정이었다. 그녀가 명함을 내밀었다. S대 자연과학부 안미현 교수였다.

 

-저는 SETI 회원이에요. SETI에서 이번 실험을 후원해서 자문을 하게 됐어요. 정신감응 통신이 외계지적생명체를 찾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들으란 듯 부장이 코웃음을 크게 쳤지만 교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세티가 뭔데요?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외계지적생명체를 찾는 프로젝트예요.

 

-외계인 말씀인가요?

 

-저희는 그 표현을 싫어하지만, 네, 맞아요.

 

교수는 유진에게 말을 걸어온 존재가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며 따로 얘기를 하자고 했다. 유진은 황당했지만 교수를 따라 작은 회의실로 향했다.

 

-흉내도 내기 힘든 소리였지만 패턴이 있었어요. 뭔가 뜻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고요. 절 진정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그걸 듣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좋아요. 그게 말소리인지 특히 외계인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유진 씨만 허락한다면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나 더 시작할 거예요.

 

-네에?

 

-이건 H통신과 별도로 SETI에서 진행하는 일이예요. 사례도 따로 해 드릴 거고요.

 

-무슨 프로젝트인데요?

 

-유진 씨가 정신감응으로 받는 정보를 우리 쪽 슈퍼컴퓨터로 전송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가 그 내용을 분석할 수 있죠.

 

-제가 무슨 내용을 받았는지 다 알 수 있다는 건가요?

 

-맞아요.

 

-모든 내용을요?

 

-네. 하지만 저희는 유진 씨의 허락 하에서만 열람할 수 있어요.

 

나관철 부장은 거짓말쟁이 개자식이었다. 변호석 그 변태한테도 한 방 먹일 수 있게 됐다.

 

-정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있나요?

 

-물론이에요.

 

-좋아요. 그럼 조건이 있어요.

 

유진은 대회의실로 돌아갔다. 마침 실험이 끝나 사람들이 일어서고 있었다. 변호석이 이쪽을 힐끔대며 느물거렸다. 유진은 이제껏 노려보지 못 한 만큼 한껏 노려본 뒤 대회의실을 빠져나왔다.

 
*
 

다음 날, 유진은 SETI와 계약서를 작성한 뒤 편의점 일까지 마치고 돌아왔다. 외계인 접선 장소는 그녀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옥상으로 정했다. 담요를 돌돌 두르고 옥상의 낡은 의자에 앉아 맥주를 한 캔 땄다. 은하수는 오늘도 서울의 불빛에 가려져 제 빛을 맘껏 뽐내지 못 하는 상태였다.

 

-나의 구세주이자 목소리이시여. 그대는 어디에 있나요. 당신은 정말 외계인인가요?

 

그때 낮고 온온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안녕하세요, 목소리 님. 당신의 이름은 뭔가요? 나는 태양계 지구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김유진이에요. 대학생이자 알바생이죠. 당신네 행성에도 대학이 있나요? 그 세상에도 편의점이 있나요? 당신들은 뭘 먹고 사나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누가 보면 머리가 이상해진 줄 알겠네. 하지만 그 생각을 부정하듯 잔잔한 목소리가 흘렀다. 이번에는 꽤 길었다. 유진은 그렇게 미지의 목소리와 대화를 나눴다. 상대의 말뜻을 모르니 대화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미현 교수는 SETI의 언어학자들이 분석할 수 있게 되도록 많은 대화를 유도하라고 했다. 그래서 유진은 날짜가 바뀌어가는 것도 모르고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떠들어댔다.

 

-아까 카페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할아버지가 커피를 달래요. 어떤 걸 드릴까요? 하니까 그냥 커피를 달래요. 프림도 들어가고 설탕도 들어간 걸로요. 그래서 요령껏 카페라떼로 주문을 넣어드렸죠. 매장에서 드실 거냐고 물어보니 가져가신대요. 그래서 뒤에 있던 선우 언니한테, 까페라떼 테이크아웃 한 잔이요! 이랬거든요? 근데 손님이 뭐라 하시는 거예요. 자긴 카페라 어쩌고가 아니라 커피를 시켰다고, 가져갈 거라고. 그래서 제가 접대용 미소를 지으면서, 네, 손님, 프림, 설탕 다 들어간 게 카페라떼고요, 가져가실 수 있게 테이크아웃으로 주문 들어갔습니다, 하니까 얼굴이 벌개져서는 화를 내더라고요. 한국에서 왜 한국말 안 쓰고 영어 쓰냐고요. 자기 영어 못 한다고 놀리는 거냐고요. 전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우리 엄마 아빠가 원래는 무 농사를 지으셨거든요. 근데 빚만 늘고 돈이 안 돼서 그만두셨어요. 나중에 자취하면서 슈퍼에서 무 살 때 보니까 엄청 비싸더라고요? 우리가 팔 때는 한 개에 몇 십 원밖에 안 했는데. 동치미를 실컷 못 먹게 돼서 아쉬웠지만 제일 아쉬운 건 우리 까망이 입양 보낸 거였어요. 무 밭을 정말 신나게 뛰어다니던 강아지였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매서 까망이었거든요. 설날 때 내려가 보니 이사 간 집에서 개를 못 키우게 한다고 다른 집에 보내버리고 없지 뭐예요. 저 그날 엄청 울었었어요.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얘기를 토 달지 않고 들어주는 느낌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언제부턴가 친구들은 물론, 엄마 아빠한테도 속내를 온전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다들 제 갈 길을 가느라 바빠 보였고, 어지러운 생각과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로 그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상대는 공감하기보다 유진의 생각을 바꾸려 했다. 설마, 그랬을까, 이랬겠지, 저랬겠지. 그들이 하는 격려는 도리어 짐처럼 느껴졌다. 힘내, 울지 마, 넌 할 수 있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느긋해 보였다. 부정도 강요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라면 유진은 어떤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SETI의 슈퍼컴퓨터에 데이터가 차곡차곡 쌓이고 유진의 겨울방학이 흘러갔다. 동기들은 스키를 타러 간다 어학연수를 간다 바빴지만 유진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빴다. 오전에는 작은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 받고 오후에는 H통신 연구소에서 정신감응 실험을 한 뒤 저녁에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팔았다.

 

변호석의 포르노 스팸은 여전히 유진을 괴롭혔지만 유진은 안미현 교수가 한 약속을 굳게 믿고 힘겹게 버텼다. 한편, SETI의 언어학자들은 미지의 목소리를 분석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지구의 언어가 아님은 확실하지만 언어임은 분명하다고 했다. 외계에서 온 것도 맞다고.

 

-우린 그 신호가 태양계에서 117광년 떨어진 케플러-444 항성계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이가 112억년, 우리 태양계 나이의 2배가 넘고 별이 세 개인 삼중성계죠.

 

-삼중성…… 별이 세 개라고요?

 

-맞아요. 우주에는 다중성계가 흔해요. 태양계는 아주 심플한 항성계죠. 그리고 그 언어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발화법과 완전히 다른 훨씬 고차원적인 언어라는군요. 유진 씨가 한 말처럼 인간의 성대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소리에요. 사실 소리라기보다는 이미지나 데이터에 가까워요. 인간의 뇌가 소리로 변환할 뿐이죠. 지금까지 간단한 표현들만 알아냈어요. ‘나’나 ‘우리’를 뜻하는 말 같은 거요. 의사소통이 가능하려면 몇 년은 더 걸릴 거라고 하네요.

 

-몇 년이나요? 전 그럼 이걸 계속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누가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 외계인한테 한국어를 가르쳐보자고요.

 

-그게 가능한가요?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도 동물의 언어를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잖아요? 우리보다 지능이 높은 존재라면 가능할 거예요.

 

안미현 교수가 내민 것은 외국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재였다. 짧은 문장과 알록달록한 그림이 가득했다. 아아, 범우주적 프로젝트에 이런 소박하고 귀여운 책이라니.

 

H통신 연구소에서의 정신감응 실험은 이제 이미지와 짧은 영상을 전송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때문에 유진은 매일 밤 옥상에 앉아 교재를 들여다보며 목소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그대,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그대의 언어를 알고 있다.

 

낮고 온화한 목소리가 느릿하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지막하면서도 단단한 힘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말이 자아내는 울림이 마치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았다. 유진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사방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구세요? 혹시 목소리 님?

 

-내 이름은 ‘목소리’가 아니다.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다.

 

이름이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라니? 혹시 사이코? 유진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어어,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님? 정말 외계인인가요?

 

-나는 사이코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니다. 지구인이다.

 

뜨끔했지만 유진은 괜히 한 번 우겨봤다.

 

-저는 그쪽보고 사이코라고 안 했는데요.

 

-그대는 나를 사이코라 생각했다. 그대는 생각을 감추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그 무례한 동료의 공격대상이 된 것은 공격받기 쉬웠기 때문이다.

 

유진은 명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쁜 놈은 변호석 그 인간이라고요.

 

-물론이다. 나는 단지 사실을 말할 뿐이다.

 

-아, 알겠어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그쪽도 지구인이라고요?

 

-그대의 지구와는 다른 지구에 살고 있다. 우리도 우리가 사는 행성을 지구라 부른다.

 

-어디에 있는 지구인데요?

 

유진은 대화를 이어가면서도 이게 꿈이 아닌지 허벅지를 계속 꼬집어야 했다.

 

-그대의 동료들이 우리 태양의 위치를 분석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그 항성계에서 다섯 번째 행성에 살고 있다.

 

그게 도대체 어디쯤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유진이 밤하늘을 막연히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우리 태양은 그대들의 태양보다 작고 빛이 약한 적색왜성이다. 그곳에서 볼 수 없다.

 

유진은 당장 내일 도서관에서 천문학 책을 빌려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지금까지 제 말을 다 알아들었으면서도 모른 체 한 건가요?

 

-그렇다.

 

-왜죠?

 

-그대의 소망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대의 독백이 재미있기도 했고. 그대들의 노력에 우리 모두 감복했다.

 

-다행이네요. 어어, 그런데 우리가 뭘 하는지 어떻게 이렇게 잘 아세요?

 

-우리는 얼마 전부터 그대들의 태양계를 관찰해왔다. 그대들이 우주로 보낸 골든 레코드 덕분이었다. 나와 내 동료인 ‘숨겨진 문을 여는 자’와 ‘너머의 세상을 보는 자’는 그대들이 카이퍼 벨트라고 부르는 영역을 항해하다 원시적이지만 지적 문명의 산물이 분명한 탐사선 두 대를 발견했다. 우리는 탐사선들의 항로를 방해하지 않는 방법으로 골든 레코드를 분리했다. 그대들은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운 일들을 해냈다. 그것을 관람하는 것은 우리에게 즐거운 유희이면서도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대들은 몰랐겠지만, 이후 우리는 수많은 무인탐사선을 그대들의 태양계와 지구로 보냈다. 그곳은 내가 관찰을 담당하고 있는 항성계다.

 

보이저 1호와 2호의 골든 레코드. 안미현 교수에게 들은 이야기다. 1977년, 태양계의 목성형 행성들을 관측하기 위해 나사(NASA)에서 발사한 보이저 1호와 2호.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주도로, 나사는 지구에 대한 정보들이 담긴 골든 레코드를 탐사선에 부착했다. 혹시라도 탐사선이 외계문명을 맞닥뜨리면 지구의 존재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근데 왜 계속 숨어 있었던 거예요?

 

-우리는 우주 관찰과 철학적 사유로 조용히 일생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대들과 같은 분주한 문명과 어울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람이 개미랑 어떻게 노냐, 뭐 이렇게 들리네요.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는 이 대화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보다 어린 문명이지만 그대들도 분명히 지적인 존재다. 우리는 그대들의 현재 모습과 발전 가능성을 존중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 어울리기 싫은데 저한테 답하신 이유는 뭔가요?

 

-그대의 간절함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이다.

 

유진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도움이 됐다니 기쁘다.

 

-솔직히 그 때는 그쪽이 신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원래 신 같은 거 믿지도 않는데…….

 

낮은 웃음소리가 다시 유진의 귓가를 간질였다. 저 사람들 꽤 잘 웃는구나, 의외로 우리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그대들과 비슷한 점도 많고 다른 점도 많다. 하지만 신은 아니다. 우리도 필멸의 존재다. 다만 그에 도달하기까지 상대적으로 오래 걸릴 뿐.

 

-아니, 또 제 생각을…….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대들의 시간 단위로 환산하면 548살이라고 볼 수 있다.

 

-네에? 그럼 도대체 평균수명이……?

 

-내 몸과 우리 태양계에 이변이 없는 한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두 배는 더 살게 될 것이다. 죽기 전에 내 기억을 태아의 뇌에 이식하면 그대들이 말하는 영생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다.

 

-말도 안 돼,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의 설명이 시작됐다. 그들은 탄소를 기본 물질로 삼는 우리와 달리 규소를 기본 물질로 삼는 생명체로, 신진 대사가 매우 느리고 유전물질이 손상돼도 거의 완벽한 복구가 이뤄진다. 그리 된 데에는 생명공학의 발전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이 규소형 생명체로 진화한 이유는 그들의 행성 케플러-444f의 평균 온도가 수백 도에 이르기 때문이다. 공전속도가 빨라 태양과의 거리가 짧기 때문. 아마 그들이 지구에 발을 디디면 유리처럼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그들의 행성에 내리면, 우주선이 멀쩡히 착륙할 거란 가정 하에 말이지만, 우주선을 나서는 순간 불타오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한테는 SF소설에나 등장하는 기억 전송 기술을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해 왔다.

 

-근데 그 동네는 말투가 원래 그런가요? 아님, 한국어를 잘 모르셔서 그런가…….

 

-우리는 언어의 경제성을 추구한다. 말의 길이로 예의바름을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쟁을 지양하고 토론을 지향한다.

 

유진은 대화에 흠뻑 빠져 눈꺼풀이 처지는 것도 몰랐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변호석의 스팸 공격도 받지 않았다.

 

-역시 그대의 생각을 읽는 것은 너무 쉽다. 괜찮다면 조언을 하나 하겠다.

 

-뭔데요?

 

-그대는 그대가 원치 않는 정보를 차단할 수 있다. 그대의 그 역겨운 동료가 보내는 메시지를 따로 마련된 저장 공간에 곧바로 집어넣는 회로를 만들어 보기 바란다. 또한 그대는 그대의 생각을 둘러싸는 공간을 만드는 식으로 정보가 유출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그런 걸 할 수가 있다고? 하긴 전화나 메일도 발신 주소나 특정 키워드를 이용해서 스팸을 차단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방화벽을 이용하면 해킹을 막을 수 있다. 변호석이 남들보다 먼저 이미지와 영상을 전송할 능력을 갖춘 게 연습에 의해서라면 유진도 그런 식으로 능력을 끌어올리지 못 하리란 법이 없었다.

 

다음 날부터 유진은 변호석이 음란물을 보낼 때마다 차단하려고 해 봤다. 그것을 가리는 두꺼운 벽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벽은 점차 높고 견고해졌다. 또한 유진은 자신의 생각이 튼튼한 성 안의 높은 탑에 사는 여왕이라고 상상했다. 성의 주변에는 깊고 넓은 해자가 파여 있었고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는 굵은 쇠사슬을 이용해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철문 하나뿐이었다. 성벽과 성문은 용맹한 기사들이 지키고 성 위의 하늘은 불을 뿜는 용이 지키고 있어서 아무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 했지만 여왕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성을 나갈 수 있었다.

 
*
 

며칠 뒤, 언론과 SETI 홈페이지를 통해 유진과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의 대화 일부가 공개됐다. 발표 내용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외계문명의 발견! 외계지적생명체와 통신하다!

 

각국 언론은 연일 특종을 쏟아냈다. 인터넷은 네티즌들의 감상과 토론으로 들끓었다. 한때 케플러 망원경으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항성계로 학계의 관심을 끌었던 케플러-444도 새삼스럽게 집중 조명을 받았다. 유진에게도 찬탄이 쏟아졌다. 그녀는 외계문명과의 통신에 성공한 최초의 지구인이었다.

 

이름만 겨우 기억나는 동창들이 별안간 연락을 해 왔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의심되는 에피소드를 읊어대던 그들은 항상 마지막엔 유진이 SETI에서 얼마를 받고 일하는지를 궁금해 했다.

 

-오래 할 것도 아니고, 매달 조금씩 받고 있어. 큰 돈 아니야.

 

-얼만데? 그래도 몇 백은 주겠지, 이런 중요한 일 하는데.

 

-몇 백? 아니야. 그냥 알바하는 수준이야.

 

-그 정도도 어디냐, 머리에 칩만 심으면 끝인데. 날로 먹는 거잖아. 요즘 제대로 된 알바 구하기가 얼마나 힘들어? 그나마도 멀쩡한 사람한테 다 돌아가고 장애 있는 사람들은 할 게 없어. 저기, 있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우리 아빠가 공방을 하나 하시거든. 장애인 복지 차원에서 하시는 일인데…….

 

장애인들을 고용해 나무를 깎아 예술품을 만드는데 그걸 하나만 사 달라고 했다. 기부금으로 처리해 준다는데, 가격이 유진의 한 달 방세의 절반에 가까웠다.

 

-아아, 미안해. 솔직히 좀 부담스럽네. 다음 학기 등록금에 보태야 돼서 힘들 것 같아. 학자금 대출 받은 것도 있고.

 

최대한 완곡하고 정중하게 거절했으나 그들은 유진더러 사람이 변했다고 욕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애초에 친한 사이도 아니었는데 변했는지 똑같은지 자기들이 어찌 아나? 우스운 일이었다.

 

한편, 취재진들, 외계인과 조우한 적이 있다는 사람들, 유진의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리려는 이들이 유진이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나타나거나 동네 골목에 진을 치는 일이 매일같이 일어났다. 밤이 되어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와 이야기를 하려고 옥상에 나가면 골목에 선 사람들은 물론이고 다른 집 옥상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대기 일쑤였다. 카페와 편의점 주인은 매상이 오른다고 좋아했지만, 집주인 아주머니는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다며 유진에게 당장 나가줄 것을 요구했다.

 

-학생, 알잖아, 나 불면증 심한 거. 학생이 밤마다 옥상에서 중얼대고 돌아다니던 거까지는 내 참았어. 근데 이건 너무하잖아? 저 인간들이 쓰레기 버리고 가면 그것까지 내가 다 치워야 돼. 동네 사람들도 불만이 많아, 나만 보면 뭐라 한다고. 나 진짜 집 팔고 이사 가고 싶은 심정이야. 학생, 제발 부탁이야, 응?

 

안미현 교수가 유진의 사정을 듣고 당혹스러워했다.

 

-정말 미안해요. SETI는 민간인과 민간단체에서 기부를 받아서 운영하기 때문에 사업 내용을 숨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공개한 건데 이렇게 될 줄은……. 내가 대책을 마련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그녀가 SETI 회원들과 상의해서 마련한 첫 번째 대책은 케플러-444인들과 통신하는 사람을 바꾸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유진은 심장이 욱신 쑤시며 이유모를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난감한 상황을 그대로 둘 수도 없어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에게 물어봤다.

 

-저어, 그래서 제가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님하고 이제 얘기를 못 하게 됐는데요.

 

-아쉽지만, 나는 그대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대가 그만 둔다면 나도 그만둘 수밖에 없다.

 

-왜…….

 

-나는 원래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모두 그렇다. 필요한 의사소통 외에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관찰과 사유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와 이야기하는 것은 즐겁다. 나는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쿵, 크게 들썩인 심장이 뜨겁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거 무슨 고백 같은 건가?

 

-고백이란 감추고 있던 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나는 그대에게 감출 것이 없다. 비밀과 속임수는 신뢰와 관계를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된다.

 

-으아, 또 제 생각을 읽으셨군요.

 

유진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누가 볼까 봐 공연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파파라치들의 눈을 피해 방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성을 잃고 흥분하면 생각을 지키는 성벽이 무너지고 만다. 그대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

 

-으아, 알겠어요. 아 참, 교수님이 물어보라고 하신 게 있어요.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님은 어떤 통신 수단을 쓰세요?

 

-우리는 마음을 이용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을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 뇌 속에는 그대의 머리에 이식된 칩과 동일한 기능을 하는 부위가 있다. 따라서 우리 머리 자체가 통신 수단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다.

 

-정말 신기하네요. 근데 말을 안 하면 노래도 안 부르나요?

 

-우리는 발성 기관이 완전히 퇴화되었다. 우리가 연주할 수 있는 것은 악기뿐이다. 그래서 그대들의 골든 레코드에 녹음된 노래들은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다. 요즘 우리 지구에서는 머릿속으로 그 노래들을 부르는 게 유행이다.

 

-그럼…… 제가 노래 하나 불러 볼까요? 정말 좋아하는 노래예요. 잘은 못 하지만…….

 

-그대가 원한다면.

 

작은 조약돌이 하나 떨어지며 유진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건 유진이 아니라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가 일으킨 감정이 분명했다. 그의 생각을 지키는 성벽도 조금 허물어진 모양이었다. 유진은 목을 가다듬고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온 세상이 떨릴 듯 두근거리고. 익숙한 듯 편안해. 마치 꿈에서 만난 것처럼. 네가 느껴져. 오래된 친구 같아…… 보여줘. 난 겁나지 않아…… 끝없는 물음 속 대답이 바로 너야…… 내게로 와. 문을 열어. 내 맘 속에 들어와 줘……(https://youtu.be/hDpKHJerwpQ)

 

영화 한 번 보려면 몇 끼 치 식비를 써야했지만 유진은 겨울왕국2를 다섯 번이나 보러갔다. 엘사가 저 노래를 부르며 기억 속의 엄마와 재회하는 장면에서 유진은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자신도 엘사처럼 존재 이유와 소명을 깨닫고 운명에 맞서리라고 다짐했다. 이후 VOD가 출시됐지만 유진에게는 컴퓨터가 없었다. 전화기로 유튜브에 접속해 OST를 듣고 또 듣는 게 낙이었다.

 

유진의 마음속에 ‘진실의 빛을 밝히는 자’의 기쁨이 밀려들어왔다. 일렁이는 기쁨은 점차 감동과 격정으로 바뀌어갔다. 파문이 거세지며 파도를 일으켰고, 물결은 폭풍우를 만난 듯 너울거렸다. 파고가 급격히 높아지고 마침내 집채만 한 파도가 몸을 일으키며 유진을 덮쳤다. 유진은 무섭지 않았다. 그것이 계속해서 덮쳐오기를 바랐다. 반복적으로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유진은 한 남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물의 정령처럼 투명했지만 가장자리에서 일어나는 빛의 굴절로 인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인가요?

 

-그렇다.

 

-저도 당신한테 보이나요?

 

-아주 또렷이.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유진은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맞잡은 손을 꼭 쥐고 파도를 탔다. 그렇게 파도에 떠밀리다 격랑에 휩쓸려 손을 놓칠 뻔했다. 남자가 긴 팔로 유진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꼭 안았다.

 

-고마워요.

 

-나는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그의 품은 따뜻했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물속을 유영했다. 파도가 점차 가라앉자 그들은 눈부시도록 뽀얀 모래밭 위에 서 있었다. 마치 불순물 하나 없는 유리를 곱게 갈아 뿌린 가루 같았다.

 

남자는 회색빛 실크로 직조한 듯 은은한 광택이 도는 옷을 입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난 살결은 얼음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반투명했고 머리카락은 가느다란 은사(銀絲) 같았다. 얼굴이 두 사람이 디디고 선 모래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이목구비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의 홍채는 스위스 고산 지대의 어느 호수처럼 청록색을 띠었고 눈꺼풀에는 역시 은사 같은 속눈썹이 가지런히 나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이것이 내 모습이다. 두려운가?

 

-전혀요. 저는요?

 

-나는 그대의 눈으로 그대를 본 적이 몇 번 있다. 그래서 익숙하다.

 

-설마 욕실에서는 아니겠죠?

 

남자가 파안대소했다. 그리고 살짝 비껴간 대답을 내놓았다.

 

-내가 그대의 생각을 감추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한 이유를 이제 알 것이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모래밭을 함께 걸었다. 하늘의 반은 에메랄드색이고 반은 자주색이었다. 자주색 하늘에 낮게 뜬 태양에서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며 대지와 바다를 비스듬히 비췄다. 모래밭을 따라 이어진 숲의 잎들이 군청색과 라벤더색으로 빛났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는 아이보리 색이었다. 저쪽 하늘에서는 은반처럼 보이는 커다란 비행체들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여기가 케플러-444f인가요?

 

-그대들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렇다. 우리 지구다.

 

-정말 아름답군요.

 

-그런가? 그대의 지구에 비하면 훨씬 단조롭다. 지금 보이는 색들이 전부다.

 

-사색하기 좋은 곳이군요. 저 원반들은 우주선인가요?

 

-그렇다. 우리는 아직 그대들이 발견하지 못 한 원리로 성간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그 원리는,

 

유진은 재빨리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저한테 너무 많은 걸 알려주지 마세요.

 

-왜 그런가?

 

현재 지구에서는 케플러-444인들과의 교류를 더욱 확대하고 그들로부터 선진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구에만 머무르지 말고 우주를 탐험하며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로 경제계 인사들이 그런 주장을 펼쳤다. 그와는 반대로, 케플러-444인들의 흑심이 뭔지 알아내고 그들의 침공에 대비해 행성방위력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주장의 근거로 그들은 케플러-444인들이 규소형 생명체이고, 지구에 규소가 풍부하다는 사실을 들었다. 보다 강경한 이들은 선제공격을 하자며 광속 우주선 개발을 후원하는 모금 운동까지 벌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의 발전된 모습이 알려지면 그런 주장들이 얼마나 더 활개를 칠지 알 수가 없었다.

 

-경제계의 주장은 한 발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대들을 관찰하며 걱정한 것이 그것이다. 그대들은 고향을 파괴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것이 우주로 확장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는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규소라…….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우주는 그대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넓다. 규소는 그대들의 지구에만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그대들의 규소를 원한다면 침략이 아니라 거래를 할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여길 쳐들어오면…….

 

-우리도 그런 주장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