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마인드, 지구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J’avoue j’en ai bavé, pas vous, mon amour.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 왔다는 걸 인정할 게요, 내 사랑.

Avant d’avoir eu vent de vous mon amour

당신이라는 소원을 가지기 전까지는, 내 사랑.

부드러운 선율이 라운지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오래된 영화 장면을 떠올리며 우주 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손가락으로 짚어 호를 그렸다. 뽀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샹송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록 아니면 듣지 않는 ‘록 순혈주의자’이자 영어로 된 노래만 고집하던 내가 프랑스 노래를 듣게 된 건 순전히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때문이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 주인공이 바다에 사는 괴물과 사랑에 빠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대학에서 영화 강의를 들을 때 반쯤 의무로 보게 된 영화인데, 이 우주선에 승선하고 난 뒤에 부쩍 좋아졌다. 과제를 쓰고 내기에만 바빴던 대학생 때와는 달리 지금은 여유가 넘쳤다. 그래서 그 감정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도. 고전의 품격이란 걸 지금에서야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달콤한 멜로디를 매들린 페이루의 목소리와 함께 흥얼거리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듀엣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 때 문이 열렸다. 기계 승무원이겠거니 하는 마음에 돌아보지 않았고, 그 생각은 역시 맞았다.

「건강 상태 체크하러 왔습니다, 지희 씨.」

항상 이 시간만 되면 온도 조절기를 점검하는 스티븐이 오는데, 왠걸. 건강 상태를 점검하러 오는 에드였다. 나는 모든 기계 승무원에게 이름을 붙였고, 이 녀석들도 그 이름을 알아들었다. 복잡한 정식 명칭보다는 정겨운 별명이 부르는 게 훨씬 나았다.

“아, 에드. 오늘도 열만 재면 돼?”

「그렇습니다. 이마를 가까이 대주시겠습니까?」

나는 앞머리를 옆으로 넘기고 그가 팔에서 꺼내는 체온기를 이마 가까이에 댔다. 이 체온계의 특징은 체온을 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어떠한 증표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에드가 말해주는 결과가 전부였다.

「항해 38일째, 이름 박지희. 체온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강상태가 정상입니다. 운동은 주기적으로 계속 하고 계십니까?」

늘 그렇듯이 별 다른 이상은 없었다. 우주선에만 있는 데 병이 생길리가 있나. 하지만 에드가 자주 체크하는 이유는, 바로 그 희귀한 예외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발생하면 난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재앙 덩어리가 될테니까.

“네가 이렇게 자꾸 찔러대니까 하게 되더라.”

「긍정적인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50일째 되는 날에 건강검진을 한 번 더 진행해야겠군요. 어쩌면 승선 때보다 건강해셨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좁은 곳에 있어도?”

「한정된 곳에서의 생활이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건 이미 자명한 사실입니다. 특정한 패턴만 유지한다면 말이에요. 거기에 지희 씨와 커뮤니케이션을 할 선원들과 오락거리인 타블릿도 있지 않나요?」

“말은 잘해.”

기계 승무원을 대할 때 좋은 점은 비꼬아서 말해도, 그들이 사실만을 걸러 알아 듣는다는 점이었다. 에드는 내 열을 잰 뒤에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기계 승무원과 하는 대화도 이게 나흘만인 것 같은데, 너무 일찍 끝나버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타는 날만 해도 이렇게 저런 감정 없는 기계들을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신경 쓸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뒷모습을 본다는 건 꽤 괜찮은 감정을 들게 한다. 적어도 죽어 있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설령 기계에게 느낀다고 해도.

에드가 나가자 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드라마를 볼 생각으로 태블릿을 들었다가, 창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는 끝없이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우주선 헤르메스는 안정적으로 센타우루스 자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유사 지구 행성 프록시마 B로, 우리의 옛 세대가 건설한 신도시 페니안으로.

인류는 바이러스에 멸망하진 않았다. 다만 자멸했을 뿐이었다.

2020년대에 창궐한 바이러스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단락되었다. 백신 개발에 매달린 의료진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 급증한 일회용품의 사용과 안일한 기후 대처가 환경에 결정타를 가했다. 동시에 수많은 분야의 기업이 쇠락했기에, 이상 기후와 겹쳐져 지구는 빠른 속도로 퇴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늦게 환경오염을 막아보려고 했다. 연예계 셀럽들은 기후를 되살리자는 홍보를 했고 정부 기관 근처 곳곳에는 나무를 심자는 포스터나 일회용품 사용 지양 권고 안내문이 붙었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사람들은 40년 전에 그 행동을 했어야 했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바로 그 년도에. 악운이 겹쳤다고 해야겠다.

나는 그 뒤의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 사람들의 사투를 모른다. 때늦은 환경운동을 하기 보다는 척박해진 지구에서 살아남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한 때에 태어났으니까. 역사책에는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그들의 노력을 알았다. 그렇지만 우리 세대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2074년, 더 이상 따뜻하지 않고 무더워지기 시작한 4월에.

사람들이 고갈되어버린 지구를 결국에는 버리는 선택을 했고,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두 번째 우주 시대가 시작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들이 지구에서 살 수 없게 되자 반쯤 쫓겨난 것이었다. 사람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았다. 이 이상 지구가 심각해지기 전에, 욕심으로 더 큰 재해를 불러 일으키기 전에 이주를 결정한 건 잘한 일이었다. 어떤 환경 칼럼니스트는 ‘그것이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썼고, 난 그 글을 보고서 이미 늦은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긴 했다. 옳은 선택이었지만 너무 늦었다고.

각국에서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추첨하거나 선출하거나, 혹은 비밀스럽게 사람들을 우주에 보냈다. 그렇게 30년이 지나 2090년대가 되었다. 30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내가 떠날 즈음에는 국제 항공우주국 연합이 새로운 조항을 내세워 더 많은 민간인들이 페니안으로 향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조항이 조금 특이했다. 연합은 페니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정착하길 원했는지 각 나라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보내길 원했으며, 언론계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여기서 내 이야기가 시작된다.

각국의 신문사는 하나의 팀을 보내는 걸 방침으로 삼았다. 한국도 역시 세계의 경향을 따라갔는데, 내가 다니는 언론사에는 젊고 저널리즘 정신이 투철한 기자가 나서길 원했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 누구로든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을 지구 밖으로 보내고 싶은 거잖아. 새 신입도 뽑을 겸에. 해고나 다름 없지 이게 뭐야. 내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불확실에 자신의 삶을 걸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지구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 묶여 있었다. 쉽사리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다른 분야에서도 몇몇 괴짜들이나 삶에 희망이 없는 사람들과 그 외의 학자들이 페니안으로 이주하려 했다.

결국 우리 회사에서는 내가 나서기로 했다. 부장님이 아무도 없으면 랜덤으로 추첨한다고 했을 때, 우리 직원들의 표정을 모두가 봤어야 하는 건데. 나만 아니면 된다는 그 긴장된 분위기. 결국 나는 내가 가는 게 모두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다. 대형 언론사에서 나갈 사람이 나 혼자밖에 없다니. 나는 회사 사람들이 주변에 얼마나 많은 미련을 남기며 사는지 알 것 같았고, 그와 반면에 내가 이곳의 삶에 별 미련이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가족들에게 기나긴 설명을 하고 난 뒤에야 페니안으로 아주, 아주 긴 출장을 갈 수 있었다. 많이 싸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뭐하는 짓이었나 싶긴 하다. 페니안으로 가면 다시 지구로는 돌아올 수 없을텐데. 엄마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텐데. 지구를 떠나 우주선에 몸을 싣고, 신도시로 향한다는다는 건 그런 건데.

그래도 창 밖을 바라보며, 우주에서의 삶을 즐길 때면 후회가 조금 사그라든다. 많은 미련이 남았지만 버틸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