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절규

  • 장르: SF | 태그: #제왕나비 #생태 #자연 #파괴 #숲 #애벌레 #이동 #날개 #죽음 #코즈믹호러
  • 평점×24 | 분량: 96매 | 성향:
  • 소개: 여러 종족들이 자연의 순리를 따르며 살아가던 숲에 기괴하고 포악한 종족이 나타나 무자비한 파괴를 일삼고 숲의 질서를 흐트러뜨린다. 평화로운 순환과 죽음을 빼앗긴 어느 나비의 절규. 더보기

주황색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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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태어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때 나의 집이자 보호막이었던 알껍데기를 갉아먹은 것이다. 정정한다. 애벌레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내 어머니의 몸에서 나올 때 나는 알의 형태였으므로.

 

내 어머니는 나와 나의 수많은 형제자매를 낳고 죽었다. 정성스럽게도 풀잎사귀 하나마다 알 하나씩을 낳았다. 자식들이 먹이를 두고 다툴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그걸 무려 수백 번을 반복한 뒤 힘이 빠진 어머니는 아득한 저 아래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전에 아버지는 자신이 지닌 모든 씨를 어머니에게 제공하고 죽었다.

 

우리도 어른이 되면 자식들을 낳고 죽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의무이자 운명이다.

 

오늘 처음 바깥 공기를 맡았지만 나와 형제자매들은 우리의 운명에 대해 잘 안다. 까마득한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명심하고 있다. 그것은 열심히 먹고 잘 자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붙어 있는 풀잎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이 내 집이며 나의 먹이가 될 것이다. 다른 것은 먹지 않는다. 이 잎사귀만 먹는다.

 

우리의 탄생을 축복하듯 하늘은 티 없이 맑고 새파랗다. 나뭇가지 사이를 맴도는 공기가 싱그럽고 신선하다. 축축한 이끼와 흙의 내음, 막 얼굴을 내미는 꽃봉오리들과 어린잎들의 향기, 그런 것들이 섞여 있다.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 아래에서 겨울잠을 깨고 일어난 만물들의 기지개와 하품이 들려온다. 추운 계절이 끝나가는 참이다. 짝을 찾고 영역을 지키려는 두날개족들의 노랫소리가 숲에 울려 퍼진다.

 

 

 

*

 

 

 

우리는 먹고, 먹고, 또 먹는다. 잠도 거의 자지 않는다. 눈 뜨고 있는 시간 동안 우리는 먹는다. 심지어 싸면서도 먹는다.

 

우리는 풀잎을 먹는다. 이곳은 먹이가 풍부하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몸이 커지고, 색깔이 바뀌고, 허물을 벗는다.

 

우리는 오로지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먹는다. 자라서 변태하고 날개를 얻기 위함이다. 네 개의 크고 아름다운 날개. 그것을 파닥이며 북쪽으로 날아가기 위함이다.

 

우리는 큰날개여섯다리족 중에서도 특히 수가 많다. 어느 정도냐면 추운 계절 동안 우리의 부모들이 이 숲의 나무에 매달려, 모든 나무들이 주황색 잎사귀를 입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어떤 나뭇가지는 우리 부모들의 무게를 못 이기고 부러지기도 한다.

 

우리가 계속 이 숲에 머무른다면 이곳은 우리의 먹성을 감당하지 못 하고 벌거숭이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숲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남과 북을 오가며 사는 이유다.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애송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모른다. 그냥 안다. 헤아릴 수 없는 긴 시간 동안 몸속깊이 새겨진 본능이다.

 

우리는 그 본능에 따라 오직 이 풀잎만을 먹는다. 이 풀은 쓴맛이 나는 흰 물을 머금고 있어서 우리 피부는 똑같이 쓴맛이 난다. 다른 종족들이 싫어하는 맛이다.

 

덕분에 우리는 다른 종족들의 눈에 잘 띄는 노란색과 검은색의 조합이다. 눈에 잘 띄면 쉽게 잡아먹히지 않느냐고?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는 일부러 이런 색을 띄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다. 우릴 먹으면 너희는 쓴맛을 보게 될 거라는 경고.

 

 

 

*

 

 

 

두날개족 한 마리가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어찌나 덩치가 큰지 녀석의 거대한 날갯짓에 잎사귀들이 펄럭일 정도다. 저 커다랗고 뾰족한 주둥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위협적이다.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이 숲의 두날개족들은 대개 우리를 건드리지 않는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아무런 의심도 경계도 않고 잎사귀만 갉아먹던 내 형제가 두날개족의 공격을 받고 말았다. 노란 줄과 까만 줄이 반복되는 기다란 몸이 녀석의 주둥이 안으로 사라진다. 나와 똑같이 생긴 생명체가 포식자에게 먹히는 장면은 어린 나에게 무척 충격적이다. 나는 풀잎을 갉아먹는 것도 잊고 그 모습을 응시했다.

 

형제를 꿀꺽 삼킨 두날개족은 두리번거리다 그 다음 타겟을 정했다. 그것은 얼빠진 얼굴로 그쪽을 주시하는 나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녀석은 거대한 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나는 빨리 움직일 수가 없다. 다리는 많지만 길이가 몹시도 짧은 탓이다. 내가 빨리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부위는 입이다.

 

내 몸 위로 거대한 부리가 덮치는 그때, 두날개족이 몸을 움찔했다. 녀석은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를 내버려두고 부리를 벌리며 꺽꺽대더니 아까 잡아먹은 내 형제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쓴맛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삼켰더니 속에서 탈이 난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형제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포식자 하나를 물리칠 수 있었다. 저 두날개족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

 

 

 

이 숲에서 꽤나 강한 포식자 그룹에 속하는 두날개족이 싫어할 정도라면 우리가 무척 무섭거나 징그러운 종족일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벌레가 연약하기만 한 존재인 줄 안다면 오산이다. 우리 친척들 중에는 이런 녀석들도 있으니 말이다.

 

밤이 되면 나오는 녀석들이다. 녀석들은 밤에 깨어나 숲을 기어 다니는 어느 종족을 사냥한다. 동그란 집을 등에 얹고 돌아다니는 등집족들이다. 다리가 없어 몸 전체로 기는데 항상 끈적끈적한 물을 꽁무니 뒤에 기다랗게 남겨놓는다.

 

칠흑처럼 캄캄한 밤, 나는 여전히 잎사귀를 갉아먹고 있었다. 밤이면 숲은 새로운 세상이 된다. 낮 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도무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 생명체들이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친척 녀석 하나가 낙엽 사이를 바스락거리며 기어 나왔다. 하루 종일 그 아래에서 잠만 자던 녀석이다. 마침 그 근처를 등집족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친척 애벌레는 등집족이 남긴 점액질의 흔적을 따라갔다. 등집족은 누가 쫓아오는지도 모르고 느릿느릿 앞으로만 기었다. 그러다 애벌레가 기회를 잡았다.

 

녀석은 뾰족하고 기다란 턱으로 먹이의 축축하고 부드러운 살결을 찔렀다. 먹이는 집안으로 도망가 숨기도 하고 거품을 내뿜기도 하면서 방어했지만 결국은 잡히고 말았다.

 

애벌레의 포식이 시작됐다. 녀석은 날카로운 두 개의 턱으로 먹이의 살덩이를 잘라내 입안으로 가져갔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그렇게 마지막 한 점까지 철저하게 먹어치웠다. 사냥이 쉽지가 않으므로 먹을 기회가 왔을 때 든든히 먹어두기 위함이다. 등집족은 금세 집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무자비한 애벌레 녀석들도 종종 누군가의 먹이가 된다. 나는 아까부터 심상찮은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살이 벨 듯 날카로운 살기였다. 그것은 친척 애벌레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어딜까.

 

돌멩이인 줄 알았던 거무튀튀한 덩어리가 입을 쩍 벌린다. 축축한네다리족이다. 그것의 입에서 기다란 혀가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들어갔다. 혀끝이 닿은 곳에 애벌레가 있었다. 아마 녀석은 본인이 잡아먹히는지도 모른 채 네다리족의 뱃속으로 삼켜졌을 것이다.

 

 

 

*

 

 

 

애벌레들의 운명은 가혹하다. 두날개족이나 네다리족에게 먹히기도 하고 우리의 친척인 날개없는여섯다리족의 땅굴로 납치되기도 한다. 녀석들은 날쌔고 힘이 좋은 데다 늘 무리지어 덤비기 때문에 일단 공격이 시작되면 당하는 쪽은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녀석들도, 그리고 두날개족이 기피하는 우리도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종족이 있다. 괴물 같은 놈들이다. 온 숲의 여섯다리족들이, 심지어 일부의 네다리족조차 그들을 두려워한다.

 

나는 방금 놈들의 살벌함을 목격했다. 여섯다리족 한 마리가 나뭇가지 사이를 날아가다 별안간 멈추고 말았다. 녀석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녀석을 붙잡고 있는 것은 자세히 봐야만 알 수 있는 가느다란 실로 엮인 그물이었다. 녀석이 그물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그물이 흔들리자 어디선가 다리 여덟 개를 가진 생명체가 쏜살같이 기어 나왔다.

 

여덟다리족은 여섯다리족을 하얀 실로 친친 감아 움직이지 못 하게 만든 다음 녀석에게 독침을 꽂아 마비시켰다. 그리고 녀석의 몸속에 입을 처박고 내용물을 죽죽 빨아먹었다. 그 결과 녀석은 피부 겉껍데기만 남고 말았다.

 

우리가 여덟다리족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녀석들은 몸속의 살만 녹여먹으므로 쓴맛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내는 쓴맛은 주로 피부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먹고 먹히는 삶. 잔인해 보이면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해한다면 그것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희생돼야 하고(이 잎사귀들조차 우리에게 먹히지 않는가), 누군가가 살기 위해서는 내가 잡아먹힐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숲의 나무와 풀들을 비롯한 모든 종족들은 그것을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풀과 나무들이 우리에게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이유는 결국 보상을 노린 것이다. 우리는 풀잎을 갉아먹지만 훗날 우리에게 날개가 생기고 꽃꿀을 빨아먹게 되면 우리는 꽃들이 씨앗을 맺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태곳적부터 이렇게 서로를 이용하고 도와주기도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왔다.

 

 

 

*

 

 

 

이 질서정연하고도 유구한 흐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숲의 수많은 꽃들이 꽃망울을 틔우고 일부는 만발하던 어느 날이었다. 동그랗고 투명한 이슬방울들을 햇살이 비추며 오색빛깔 무지개를 빚어내던 신비롭고 황홀한 아침에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이상한 소리였다. 여섯다리족 중에 꽁무니에 독침이 있는 녀석들이 있는데 그들의 날갯짓과도 비슷하지만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렁찬 소리였다. 그 소리가 숲 전체를 맹렬히 뒤흔들고 있었다.

 

저쪽 어딘가에서 종족들의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그 괴상한 소리와 더불어 비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날개족, 네다리족 할 것 없이 모두 괴상한 소리가 나는 쪽으로부터 도망오고 있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 우리가 무슨 일이냐 물어봐도 대답 없이 저 멀리 뛰어가거나 날아가고 말았다.

 

이상한 굉음이 한참 울린 뒤에는 세상이 부서지는 것 같은 큰 소리와 함께 바닥의 육중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하늘을 가릴 정도로 키가 큰 나무들이 속속 쓰러지는 탓이다. 저 멀리에서 나무의 우듬지들이 하나둘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된 나무가 썩어서 제 무게를 감당치 못 하고 이따금씩 쓰러질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는 일은 그것과는 다르다. 왜냐면 나무들도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무시무시한 이빨로 자기들의 허리를 통째로 잘라내고 있다며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고통이 가득한 그들의 호소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일부 종족들이 그들의 몸통에 구멍을 뚫어 집으로 삼을 때도 의연하게 대처하는 그들이다. 수백 년간 우리에게 집과 양식과 놀이터가 되어준 큰 어른이자 신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니.

 

불안하고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 왔다.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나뿐 아니라 숲의 종족들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우리가 이토록 공포에 떨었던 적이 있었던가.

 

거센 폭풍이 숲을 휩쓸거나, 폭우가 내려 숲이 물에 잠기거나, 여러 달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아 숲이 마를 때조차 숲의 종족들은 나무들의 굳센 의지를 믿고 함께 버텨 왔다. 하지만 지금 그 나무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린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무들이 쓰러지며 일으키는 바닥의 진동이 더욱 거세질 무렵, 이 모든 재앙의 주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로만 듣던 두다리족이었다. 두날개족처럼 두 다리로만 땅을 디디며 걷고 있었다.

 

 

 

*

 

 

 

두다리족은 숲의 웬만한 네다리족보다도 덩치가 컸다. 기이한 생김새였다. 머리가 저렇게 높이 달려 있으면 어지럽지 않을까? 다리 두 개로만 뛰어다니면 기둥처럼 솟은 몸이 휘청대지 않을까?

 

그들의 다리는 실제로 네 개였으나 머리 아래에 달린 앞다리는 두날개족과 달리 날개가 아니라 한쪽으로 구부러지는 짧은 막대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 끝에 기괴한 굉음을 내는, 나무들이 무시무시한 이빨이라 부르는 것들이 들려 있었다.

 

일렬로 늘어선 뾰족한 이빨들이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거대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뿜으며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들이 나무의 몸통에 닿자 나무껍질이 가루가 되어 온 사방에 튀었다. 나무의 속살에서 풍겨 나오는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무는 손쓸 사이도 없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절단되고 말았다.

 

두다리족들이 저들끼리 뭐라고 외친다. 그들이 어디론가 뛰어가자 반대편으로 나무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무에서 먹고 자는 두날개족들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차마 멀리는 못 가고 둥지에 두고 온 제 새끼들 주위를 맴돌며 달아났다 다가오기를 반복했다.

 

쿵! 거대한 나무와 땅이 충돌하며 온 세상이 묵직하게 진동했다. 나뭇가지와 함께 추락한 두날개족 새끼들의 가녀린 울음, 새끼들을 잃은 부모들의 통곡, 나무의 굵은 몸통 아래에 깔려 단말마를 맞이한 종족들의 비명, 그것을 지켜보는 다른 종족들의 공포 어린 탄식, 그것들은 두다리족의 웃음소리와 그들이 지닌 무시무시한 이빨의 굉음에 묻혀 버렸다.

 

 

 

*

 

 

 

저들은 나무를 왜 자르는 걸까. 먹으려는 걸까. 나무를 먹을 수 있는 종족은 내가 알기로는 일부 날개없는여섯다리족 뿐인데. 설사 먹을 수 있다 쳐도 왜 저렇게 많이 자르는 걸까.

 

숲에 나타난 두다리족은 십 여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베어낸 나무는 백 그루가 넘는다. 저장해뒀다 먹으려는 걸까. 하지만 왜? 추워지는 계절도 아닌데. 나무들은 항상 이 자리에 있는데.

 

먹으려고 잘라낸 건지도 의심스럽다. 그들은 나무에 붙은 잔가지를 모두 잘라내 불태웠다. 남은 몸통은 바닥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죽은 나무들의 시신 조각들과 그 사이에 섞인 여러 종족들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온 숲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죽음의 냄새였다. 숲의 종족들은 그 역하고 두려운 냄새를 피하지도 못 하고 고스란히 맡고 있어야만 했다.

 

두다리족들은 그 냄새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저들끼리 웃으며 오히려 그 불 위에다 무언가를 구워서 먹기 시작했다. 아까 그들에게 덤벼들었다가 사냥당한 털많은네다리족이다.

 

일부 소형 네다리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가 두다리족들이 가진 막대기 때문에 죽어버렸다는 사실이 온 숲에 삽시간에 퍼졌다. 두다리족들의 검은 막대기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불을 뿜었다. 그리고 그 불이 향한 생명체는 피를 흘리며 고꾸라져 죽었다.

 

두다리족들은 자기들이 잡은 네다리족의 가죽과 내장을 먹지 않았다. 그들은 가죽을 어디론가 가져가고 내장은 숲에 버렸다. 내장은 수많은 다리많은족들의 성찬이 되었다.

 

두다리족들은 엄청나게 먹었다. 털많은네다리족은 물론이고 두날개족, 다리없는족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그들은 불을 피웠고, 숲에는 죽음의 냄새가 퍼져 나갔으며, 다리많은족들은 덩달아 배가 불렀다.

 

숲의 소형 족종은 바짝 긴장했다. 언제 우리 차례가 돌아올지 몰랐다. 저들이 먹지도 않을 네다리족과 두날개족을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앞에 어두운 운명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었다.

 

 

 

*

 

 

 

숲의 상당 부분이 허허벌판이 되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늘 가려져 있던 바닥은 제 몸을 하늘 아래 당당히 드러내기를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그곳은 딱딱하게 메말라 부스러지는 황폐한 땅이 되었다. 왜냐면 두다리족은 나무뿐만이 아니라 바닥에 붙은 관목과 풀들도 모두 베어버렸기 때문이다.

 

두다리족이 빠르게 돌아가는 무시무시한 이빨을 우리 풀을 향해 휘두르던 순간은 이 몸이 몇 번을 죽고 다시 태어나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머리가 아찔해지도록 귀가 먹먹해지고 세찬 공기의 흐름이 너울대는가 싶더니 우리는 잎사귀들과 함께 모두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높이도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두다리족들은 바위덩이 같은 두 발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들을 짓밟고 돌아다녔다. 나는 운 좋게 그들의 궤적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렇지 못 한 내 형제자매들은 두다리족의 발아래에서 짓이겨져 터지고 말았다. 일부 시신은 두다리족의 발바닥에 들러붙은 바람에 그들이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으깨어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는가. 내 동족이 처참하게 부서지고 터진 채로 주변에 산재한 모습을. 노란 줄과 검은 줄의 피부 조각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더듬이와 눈동자들, 여기저기에 흩뿌려진 비릿한 체액들.

 

시신과 잔해들이 뿜어내는 시큼한 죽음의 냄새는 며칠이 지나도 사그라지지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느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자아냈다. 뱃속이 뒤틀리고 머리가 아득해져 풀잎을 갉아먹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것들이 어느 정도 자취를 감춘 것은 온갖 다리많은족들이 몰려와 조각들을 남김없이 먹어치웠을 때였다. 시체를 제거하는 숲의 청소부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제 도리를 다 할 뿐이지만, 역겹고 게걸스러운 식성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그들이 이번만큼은 밉다. 한편으로는 저 끔찍한 잔해를 더 이상 안 봐도 되니 고마운 마음도 든다.

 

두다리족들은 우리의 존재를 아는 것 같지 않았다. 알더라도 신경 쓰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들은 무심해 보이는 모습으로 우리를 밟고 지나가기도 했고, 어떨 때는 다분히 고의적으로 보이는 동작으로 우리를 힘주어 내리치기도 했다.

 

우리를 먹으려고 그러는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들은 내 형제자매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서도 내버려두거나 재빨리 털어버리기 일쑤였다. 먹으려는 게 아니면 왜 죽인단 말인가. 그 점이 두다리족에 대한 공포를 가중시켰다.

 

이들은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 한 종족들이다. 단지 배고픔이 아닌 다른 필요에 의해 혹은 재미로 혹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종족을 죽이는 족속들이다. 이 세상의 것들이 아닌 것 같았다.

 

 

 

*

 

 

 

두다리족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우리 애벌레들은 싱싱한 잎사귀를 찾아내 우리의 식이를 이어갔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그 소용돌이에 우리가 언제 어떻게 빨려들든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이 세상의 멸망이든 아니든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는 두다리족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우리에게 고마운 보금자리가 되어 준 나무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지는데도 우리가 도와 줄 수 없다는 사실이 개탄스럽기만 했다. 스스로가 비겁하고 나약하게 느껴졌지만, 내가 저 괴물들의 이빨이나 발에 희생당하지 않기를, 그리고 저들이 이 숲에서 강탈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얼른 일을 마치고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두다리족들은 이윽고 나무 베기를 멈췄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이빨은 바닥에 얌전히 모여 있었다. 이 비참한 재앙이 끝난 걸까. 저들은 이제 이곳을 떠나는 걸까.

 

안도하는 우리를 비웃듯 숲의 종족 그 누구도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 한 괴이하고 경악스런 종족이 나타났다. 그들이 등장할 때 우리는 벼락이 치는 줄로만 알았다. 깊은 땅 밑에서 가끔씩 솟구친다는 뜨거운 쇳물이 터져 나오는 줄 알았다. 무시무시한 이빨과 불을 뿜는 막대기와는 차원이 다른 무지막지한 소음과 진동 때문이었다.

 

숲의 모든 종족들은 까무러칠 듯 놀라며 각자의 은신처로 숨어들었다. 굉음과 흔들림은 계속되었다. 서로의 말조차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럽고 땅이 무겁게 울려 우리는 안식을 얻지 못 했다.

 

폭풍우가 몰려오려는 걸까? 화산이 터지려는 걸까? 하지만 하늘은 새파랗기만 했고 그 어디에서도 뜨거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종족은 두다리족 여러 마리를 태울 정도로 거대했다. 발이 정말 이상하게 생겼는데, 커다랗고 둥글고 시커먼 발이 양옆에 여러 개가 달려 돌아가고 있었다. 그 발이 돌아가면서 저 거대한 괴물이 앞뒤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발은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