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빙라이트

  • 장르: 판타지
  • 평점×54 | 분량: 151매 | 성향:
  • 소개: 나의 왼손은 비밀스러운 인덕션, 식은 커피도 데우고 언 대문이나 변기도 녹이지!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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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빙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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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어붙은 문

“폰데링님!”

철제 대문을 뚫을 기세로 가빈이 소리를 질렀다. 여느 도시의 집과 달리 여기는 바깥 대문에서 작은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안쪽까지 소리가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린다.

“저예요, 가빙라이트!!”

대체로 글자로 쓰거나 작게 속삭이기만 하던 닉네임을 목매이게 부르고 있자니 누가 들을까봐 좀 쪽팔리기도 했으나 트친이니 어쩔 수 없었다. 가빈은 폰데링네 깜빡 두고 간 휴대폰을 되찾아야 했다. 그래서 눈 내리는 이 먼 길을 다시 돌아왔다.

“폰데링니이임!”

독자들은 가빈이 왜 대문 우측 상단에 위치한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 대답은 어렵지 않다. 지금은 정전 상태다. 눌러도 소용이 없다.

“가빙님이에요?”

곧 대문 너머에서 폰데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패딩 점퍼의 지퍼를 부욱 올리는 소리, 대충 꿰어 신은 슬리퍼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죄송해요, 저 다시 왔어요.”

“어머, 안 그래도 걱정했어요. 지진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했는데.”

폰데링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안도감이 반반 섞여있었다. 그 목소리에 가빈도 내심 안도했다. 지난 밤 존잘님이 어떻게 된 건 아닐까 가빈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저 폰을 두고 가서.”

“폰? 우리 집에?”

“네, 근데 폰데링님은 괜찮아요?”

“이쪽은 그렇게 흔들리진 않았으니까요. 전 일산이 걱정이었는데.”

“전 괜찮았어요.”

“폰 놓고 간 줄 꿈에도 몰랐는데, 가빙님. 아마 꺼져 있나 봐요.”

폰데링은 ‘그래서 답장을 못 했구나. 디엠 많이 보냈는데.’ 중얼거리며 대문 잠금쇠를 열림 방향으로 당겼다. 그러나 가빈에게는 철컥 하는 소리만 전해질 뿐, 문틈은 조금도 벌어지지 않았다.

“어라, 왜 이러지.”

이번에 폰데링은 대문을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낮은 기온에 밤새 문이 얼어붙어 버린 모양이었다. 문은 열리지 않고 폰데링의 목소리만 담을 넘어왔다.

“어떡하죠, 얼었나 봐. 가빙님 혹시 담 넘을 수 있어요?”

“헐.”

운동신경 없는 가빈에게 담을 넘을 자신은 요만큼도 없었다. 꽤 높은 담이었다. 이 추운 겨울 안 그래도 몸이 굼뜬데다, 어제 한반도를 강타한 지진에 놀란 가슴은 아직 진정되기도 전이었다. 사실 수도권은 그리 흔들린 편은 아니어서 지진에 놀랐다기 보다는 지진의 영향으로 찾아온 전국의 대정전에 놀랐다고 보는 편이 더 맞았다.

가빈이 지진을 느낀 것은 폰데링네 집에서 2박 3일을 보낸 후 귀가하던 길, 그러니까 고양 버스터미널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터미널이 좌우로 흔들대고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분신술을 하듯 서너 개의 모습으로 번져보였다. 버스 여행이 아니라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사람들 같았다. 편의점에 진열되어 있던 컵라면들이 우르르 쏟아져 바닥을 뱅글뱅글 맴돌았다. 흔들림은 몇 분간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가빈은 백팩으로 머리를 감싸고 흔들림이 멈출 때까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지진은 지금껏 뉴스로만 들었지 몸으로 경험한 건 처음이었다. 무서웠다.

다행히 땅이 갈라지고 천장이 내려앉는 그런 정도의 위험은 아니었지만 다른 문제가 곧 들이닥쳤다. 터미널 내 모든 형광등과 백열등이 박자를 서로 맞춰 계산한 듯 깜빡거리다 일제히 동시에 빛을 잃었다. 해가 없는 저녁시간이라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실내는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흔들림이 멈추자마자 가빈은 터미널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도시가 정전에 휩싸였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리에는 빛이 없었다. 차들은 라이트를 뿜고 있었지만 교통신호가 사라진 거리에서 우왕좌왕하는 중이었고 저 앞에선 이미 사고도 난 듯했다, 길에 선 사람들은 대부분 휴대폰 손전등을 밝혀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제야 가빈도 휴대폰을 꺼내려다 지난 며칠 지냈던 폰데링네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이거 뭔가 되찾기도 힘들어진 상황 같은데 어떡하지, 작게 짜증을 흘리며 어둠을 헤치고 자취집으로 겨우 돌아왔다.

현관이 번호키 자물쇠라 순간 멈칫 했으나 다행히 그 안의 1.5볼트짜리 배터리는 살아 있어서 무리 없이 집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기를 잃은 삶은 간단하지 않았다. 초인종이 안 눌러지는 건 그렇다 쳐도 냉장고가 꺼져 아이스크림이 녹고, 보일러가 맛이 갔고, 전기장판이 안 켜지고,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일상은 대혼돈이었다. 카오스가 찾아온 것이다.

정부는 전례 없는 재난과 사고에 대국민 양해를 구하며 최대한 빠른 복구를 위해 노력중이나 이 상태가 며칠에서 지역에 따라 길게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라고 했다.

가빈은 평생의 수면 중 가장 추운 잠을 자고서, 평소라면 편도 2시간으로 충분할 거리를 6시간이나 걸려서 되짚어 왔다. 폰데링의 집에. 휴대폰을 찾기 위해. 대문에서부터 막히고 말았지만.

그나저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재난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찾게 된 사람이 부모님도 애인도 아닌 트친일 줄이야, 생각해보니 조금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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