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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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일진이었다.

출근길에 일방통행로에 끼어든 산타페 운전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회사에 지각을 했고 그 바람에 부서 미팅에 늦었다. 승진 인사를 앞두고 한층 예민해져 있던 박 부장은 기다리던 먹잇감을 만난 사냥개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아무래도 이번 인사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걸 스스로 감지한 모양이었다.

‘개자식!’

회사 일보다 윗사람한테 아부하고 집안 챙기는 데만 신경 쓰더니 이번에 아주 제대로 걸렸다 싶었다. 박 부장에 대한 온갖 나쁜 소문이 회사에 쫙 퍼졌다.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질기고 굵은 동아줄을 윗선에 대 놓고 온갖 아부와 뇌물을 바친 덕이었을 것이다.

나이도 세 살이나 어린놈한테 별의별 치욕적인 욕을 다 들은 탓에 점심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아무리 잊고 털어내려 해도 자꾸만 놈에게 당한 모욕이 떠올라 온종일 우울하고 속이 쓰라렸다.

일방통행로에 들어서서 뻔뻔하게 버티던 산타페 운전자 놈과 박 부장을 짓밟고 난도질하는 상상이 틈만 나면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와 하루 종일 내 의식을 붙들고 놓아 주지 않았다.

오후에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돌아서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혀 와이셔츠에 커피를 쏟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살기가 치밀어 그를 노려봤지만 이내 내 잘못이란 사실을 깨닫고 어색하게 시선을 거둬들였다. 내 몸 어딘가에 분노의 불덩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머피의 법칙.

자꾸 안 좋은 일이 연이어 일어나니까 진짜 나쁜 일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난 가능한 나쁜 기억을 잊으려고 애썼다. 모든 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가의 오랜 가르침을 떠올리며 퇴근할 때도 평소보다 훨씬 조심해서 운전했고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댈 때도 신중했다.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는데 아내의 날카로운 음성이 날아들었다.

“너 어디 모자라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내는 퇴근해서 들어오는 날 화난 눈길로 힐끗 쳐다보고는 인사도 없이 눈길을 돌렸다. 아내 앞에는 서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로 서 있었다. 서우가 아내에게 항변하듯 말했다.

“돌려 달라고 그랬단 말야! 근데 맨날 잊어버리고 안 가지고 왔다잖아! 안 가지고 왔다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고!”

아내가 흥분해서 쏘아붙였다.

“그럼 선생님한테 얘기를 하든가. 걔네 집까지 쫓아가서라도 가져 왔어야지! 니 체육복이잖아!”

내가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아내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어휴, 답답해. 얘한테 직접 물어봐!”

난 훌쩍이는 서우를 소파에 앉힌 후 자초지종을 들었다. 지난주에 같은 반 혜주라는 애한테 체육복을 빌려 줬는데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걔가 잊어버리고 체육복을 계속 안 가져 오는 거야?”

내가 묻자 아내가 목청을 높이며 끼어들었다.

“안 가져오는 게 아니라 일부러 안 주려고 그러는 거라구!”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서우가 눈물을 훔치며 기어드는 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집에 두고 잊어버리고 안 가져 왔다고 하더니 내가 자꾸 달라고 하니까 이번에는 자기 친구 빌려 줬는데 그 친구가 안 가져 온다고 그러잖아.”

“니 체육복을 빌려가서는 다시 지 친구를 빌려 줬다고?”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아내가 흥분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도 화가 나서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졌다.

“무슨 그런 애가 다 있어? 그래서 가만있었어? 가서 뭐라고 했어야지! 안 되면 선생님한테 얘기를 하든가.”

“안 돼! 그 애 친구들 다 노는 애들이란 말야! 저번에 재희도 걔한테 체육복 빌려 줬다가 못 받았다고 선생님한테 일렀다가 나중에 교실에서 얼마나 밟혔다구!”

중학교 2학년인 딸의 입에서 밟혔다는 소리가 나와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밟히다니?”

“쉬는 시간에 혜주하고 걔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재희 때문에 선생님한테 혼났다며 넘어트려서 때리고 밟고 그랬다니까!”

순간 어안이 벙벙해서 서우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물었다.

“교실에서 그랬단 말야? 쉬는 시간에? 다른 애들은 그냥 보고만 있고?”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목청을 높였다.

“등신 같으니까 그런 애들한테 당하는 거지. 학교에서 똘똘하게 굴었어 봐, 걔가 그러나. 니가 맹하니까 딱 찍어서 체육복 빌려 달라고 한 거 아냐. 그리고 그런 앤 줄 알았으면 당연히 빌려 주질 말았어야지! 빌려 주긴 왜 빌려 줘!”

“뻔히 있는 거 아는데 어떻게 안 빌려 줘?”

“너 혹시 빌려 준 게 아니라 뺏긴 거 아냐?”

내가 잔뜩 날이 선 말투로 묻자 서우가 울먹이며 말했다.

“몰라, 엄마 아빠하고 말 안 해!”

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내는 서우가 쾅 소리가 나게 닫은 방문에 대고 앙칼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내일 체육 시간인데 어떡할 거야! 멀쩡한 체육복 놔두고 또 살 수도 없고. 어떡할 거냐고!”

서우의 방문을 노려보며 식식대던 아내가 갑자기 날 돌아보고 말했다.

“쟤 저렇게 물렁한 것도 다 당신 닮아서 그런 거라고. 좋은 게 좋다, 손해 보는 게 남는 거다, 맨날 그런 소리나 하고 있으니 애가 돈 귀한 것도 모르고 지 꺼 지킬 줄도 모르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아내는 내 항변은 듣지도 않고 서우가 그랬던 것처럼 안방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내일 서우 체육복은 어떡할 거야?”

내가 소리를 질렀지만 아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거실 가운데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멀뚱하니 남겨졌다.

이제 겨우 중학 2학년인데 교실에서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니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학교 폭력이 심각하다지만 교실에서, 그것도 쉬는 시간에 버젓이 폭력이 행해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끔찍한 건 반 아이들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선생님한테 알리는 아이도 없다는 얘기였다. 다른 곳도 아닌 학교에서 아이들은 불의에 눈감고 비굴함에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안방에 들어가니 아내는 벌써 불을 끄고 침대에 들어가 있었다. 말을 붙이려다 그만두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왔다. 아내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 이런 문제에 잘 대처하지 못한다.

컴퓨터 방으로 들어가 인터넷 서핑을 하는데 문득 그 못된 아이들에게 서우가 폭행을 당하는 장면이 머리에 떠올랐다. 머리끄덩이를 잡히고 바닥에 쓰러트려지고 발로 밟히고.

성격상 한번 걱정을 하기 시작하면 쉽게 떨치질 못한다. 난 어쩔 수 없이 서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서우가 울음 자국이 있는 얼굴을 내밀었다. 서우에게 5만 원을 건네며 아내가 듣지 못하게 조용히 말했다.

“내일 체육복 사고 거스름돈 가져 와. 무리하게 체육복 달라고 하다가 괴롭힘 당할 수도 있으니까 안 주면 그냥 내버려 둬. 그런 애들은 상대하지 않는 게 상책이야. 그리고 다음부터 빌려 달라고 하면 무조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해. 알았지?”

“싫다고 말하기 그렇단 말야.”

“무슨 소리야? 체육복 빌려 가 놓고 가져 오지도 않았는데 또 빌려 준다고?”

서우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힘없이 말하며 문을 닫았다.

“다른 학교로 전학 갔으면 좋겠어.”

그제야 나는 서우가 그 애들을 얼마나 겁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

다행히 걱정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우는 그날 이후로는 혜주라는 애가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며 안도했다. 나 역시 겨우 마음을 놓았고 서우가 중학 2학년의 남은 기간을 무사히 보내기만을 바랐다.

기억에서 서우의 일이 차츰 잊힐 즈음 인사 결과가 나왔다. 어처구니없게도 박 부장은 이번 인사에서도 태풍을 잘 피해 갔다. 그 인간 밑에서 다시 끔찍한 1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렸다. 차라리 내가 회사를 관둘까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 회사도 얼마 못 가겠어. 정말 썩을 대로 썩었다니까. 그런 새끼가 안 잘리고 계속 남아 있다는 게 말이나 돼? 인사 검증 시스템에 문제가 많은 거라고. 젠장 할!”

나는 동기인 강 과장과 술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토로했다. 강 과장도 내 의견에 동조하며 위로의 말을 곁들였다. 주말이라 우린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눈을 뜬 건 다음 날 정오가 가까워서였다. 아내는 외출했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거실로 나가자 서우 방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우를 불러서 누가 왔냐고 물었다.

“친구들.”

서우의 말이 끝나자 여학생 두 명이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했다. 그중 한 아이는 화장을 꽤 진하게 했고 치마도 너무 짧아 마주보기가 민망했다. 아직은 딸의 중학생 친구들을 대하기가 어색했지만 서우가 모처럼 친구들과 지내는 모습을 보니 한편으론 안심이 됐다.

친구가 있다는 건 그만큼 든든한 울타리가 있다는 얘기고 학교에서 외톨이가 아니란 소리가 아니던가. 서우의 친구들이 돌아갈 때까지 안방에 갇혀 있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아내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로 나가자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서우를 세워 놓고 화를 내고 있었다.

“왜 그래, 또?”

“얘 엠피스리하고 지갑이 없어졌다잖아!”

“그게 왜 없어져? 방에 잘 찾아보면 있겠지.”

“그 기집애가 가져간 거야! 틀림없어!”

“그 기집애라니?”

“지난번에 서우 체육복 빌려가서 안 가져 온 혜주라는 기집애 말야! 그러게 등신 같이 그런 애를 왜 집에까지 데리고 와!”

순간 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서우가 울면서 말했다.

“억지로 우리 집에 가자고 하는데 어떻게 해?”

아내의 입에서 거친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이 등신아, 그런 핑계도 못 대니? 아빠가 집에 있어서 안 된다고 하든가, 엄마가 친구 데려오는 거 싫어한다고 말하든가! 화가 나서 죽겠네. 지갑에 그동안 용돈 모아 놓은 것까지 다 넣어 놨다는데. 그 싸가지 없는 기집애를 어떻게 하지?”

그제야 짧은 치마에 화장을 야하게 했던 여자애의 얼굴이 생각났다. 재빨리 날 훑어보던, 기억에 묻혀 있던 영악한 눈초리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키 크고 화장한 애가 혜주라는 애니?”

서우가 고개를 끄덕였고 아내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지난번 학교 급식 도우미할 때 내가 딱 알아봤어. 한눈에 봐도 머리 물들이고 화장해서 되바라져 보이는 게. 몸은 성숙하게 다 큰 애가 치마를 얼마나 짧게 줄였는지 팬티가 다 보이더라니까.

게다가 급식 탈 때도 건들거리면서 말끝마다 욕을 달고 있어서 너무 저질스럽더라구! 그런 애를 어떻게 집에 들일 수가 있어? 내가 딱 보니까 서우가 순진하고 만만해 보이니까 작정하고 덤비는 거야! 딱 찍힌 거라구! 너, 앞으로 어떡할 거야?”

“왜 자꾸 그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니가 왜 잘못이 없어! 니가 똑똑하게 행동했어 봐. 그런 똥파리들이 달라붙나!”

“왜 맨날 나보고만 그래! 잘못은 그 기집애가 했는데!”

서우가 울음을 터뜨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늘 부모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던 아이가 나쁜 친구 때문에 번번이 혼이 나고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아내가 날 돌아보고 물었다.

“어떡해?”

“아직은 그 애가 가져갔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잖아.”

“증거는 무슨 증거? 보나마나지. 둘 다 책상 위에 올려 놨다는데…….”

“섣불리 의심했다가 정말 괴롭힘 당하면 그땐 진짜 대책이 없는 거야. 설사 그 애가 가져 갔다고 해도 증거가 없는데 뭘 어떻게 하겠어?”

“하긴 그렇지. 당신하고 얘기해서 시원한 답이 나올 리가 있겠어? 됐어.”

아내는 안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 혜주라는 애 때문에 집이 또 발칵 뒤집혔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그 애는 서우의 물건을 멋대로 빌려 가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또 어쩌다가 서우가 핑계를 대고 물건을 빌려 주지 않으면 어느새 그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혜주가 훔쳐간 게 확실했지만 그걸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서우에게 학교에서 꼼짝도 않고 물건을 지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꽤 비싼 서우의 샤프가 없어졌는데 혜주의 필통에 들어 있더라는 것이다.

서우가 자기 샤프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도 산 거라면서 도리어 서우를 밀어 넘어뜨렸다는 것이다. 훌쩍이는 서우의 정강이에 검은 멍을 봤을 때는 너무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건 서우가 돈 2만 원을 빼앗겼다는 얘길 했을 때였다. 서우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된다고 했는데 정말 급하다면서 빌려 달래. 내일 꼭 갚는다고 하면서. 그래도 안 된다고 했는데…… 친구끼리 정말 이럴 거냐면서. 큰돈도 아니고 겨우 2만 원 갖고 자기하고 원수질 거냐면서.”

아내와 내가 한숨을 쉬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서우가 우리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틀림없이 내일 갚는다고 그랬어. 정말이야!”

아내도 더 이상은 아이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나는 알았다고 하고 서우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두통이 심한지 잔뜩 인상을 쓰고 관자놀이를 누르던 아내가 심각하게 말했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담임한테 얘기하자. 요즘 서우, 학교도 가기 싫대. 계속 이러다간 공부도 집중 못하고 큰일 나겠어.”

사실 나도 요즘 서우 때문에 회사에서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서우 학교 끝날 시간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은 별일 없었는지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다시피 했다. 그렇잖아도 박 부장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데 그 일까지 겹치니 늘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보통 영악한 기집애가 아냐. 서우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훔쳐간 건 증거가 없고 물건도 빌려 간다고 하고 돌려주지 않으니 선생한테 말하기도 애매하고 보통 문제가 아니네.”

내 말에 아내가 눈을 치켜떴다.

“왜 말을 못해? 오늘은 그 기집애가 돈까지 빼앗아 갔다잖아!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 다 얘기하면 담임도 조치를 취하겠지. 아마 담임도 알고 있을 거야. 그런 애가 서우한테만 그랬겠어?”

“내가 말하는 건 담임이 그런 일을 알고 있어도 증거가 없으니까 혜주라는 애한테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친구끼리 물건 빌리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 돈도 빼앗아간 게 아니라 빌려 갔다잖아!”

“걔가 돈을 갚을 것 같아?”

“그 말이 아니잖아! 갚든 안 갚든 형식은 빌려 간 거라는 거야. 무슨 말인지 몰라?”

아내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다. 마음이 약해 쉽게 상처를 받는 타입이기 때문에 긴장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견디지 못할 터였다. 어쩌면 학교를 찾아가 담임 앞에서 횡설수설하다가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서우뿐만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라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섣불리 나섰다간 상황만 악화시켜 벌통을 건드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었다. 그동안 학교 폭력에 대해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조사를 했지만 학교가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더욱 애매한 건 서우의 일은 학교 폭력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마치 법망을 최대한 이용하는 범죄자처럼 혜주라는 애는 교묘하게 서우를 괴롭히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서우뿐만 아니라 아내와 날 비롯해 우리 세 식구 모두가, 중학교 2학년 여자애가 쳐 놓은 그물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물고기 꼴이었다.

막막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낯선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윤형……준? 윤형진이던가? 가만…… 그때 명함을 받아서 어디다 뒀지?”

난 서둘러 책상 서랍을 열어 명함들을 모아 놓은 상자를 꺼냈다. 두 달 전인가 회사 동기 집들이를 끝내고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가 옆에 서 있던 차의 옆구리를 범퍼로 살짝 긁은 일이 있었다.

뜨끔해서 옆에 서 있던 진녹색 차를 보니 옆문에 내 차의 흰색 페인트가 묻은 게 보였다. 차는 연식이 꽤 오래된 것 같았지만 밤이라 정확한 상태를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니 목격자는 보이지 않았다. 난 본능적으로 뺑소니를 치기 위해 후진 기어를 넣고 차를 마저 뺐다. 그리곤 주차 구획선을 벗어나 막 액셀을 밟으려는데 클랙슨이 울렸다.

갑작스러운데다 소리가 엄청 컸기 때문에 심장 한가운데 얼음덩어리가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놀라서 주변을 살피는데 뜻밖에도 바로 옆 진녹색 차의 뒷문이 열리면서 사람이 내렸다.

‘젠장. 사람이 타고 있었어!’

밤인데다 창문이 까매서 그 차에 사람이 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날 한 번 흘낏 쳐다본 후 자기 차를 유심히 살폈다.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몰랐다는 듯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이구, 이거 죄송합니다. 부딪히지 않은 줄 알았는데…….”

쪼그리고 앉아 자기 차를 살피던 남자가 일어나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의 차를 받아놓고 뺑소니를 치려고 해요?”

“뺑소니가 아니라 안 받은 줄 알고…….”

돌연 남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남자는 두툼한 팔뚝을 들어 올리더니 주먹으로 내 가슴을 밀며 위협하듯 말했다.

“아까 보니까 창문 열고 다 보더구만. 계속 그런 식으로 거짓말하고 속 긁으면 당신 아주 밟아 버릴 거야!”

밟아 버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남자의 눈빛은 무슨 일이든 정말로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 남자는 몸도 단단해 보였고 눈매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헬스로 근육만 키운 덩치들하고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더 이상 변명을 늘어놓을 수가 없었다. 뒤늦게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몇 번이나 사과를 한 후에야 남자는 겨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난 법 어기는 인간들하고 거짓말하는 놈들은 반드시 응징을 하는 사람입니다!”

남자의 험한 말에 찔끔하며 낯이 달아올랐다. 내가 보험 처리를 하겠다고 하자 남자는 공장에 들어가면 수리비가 꽤 나올 테고 그렇게 되면 보험요율도 올라갈 테니 그냥 현금으로 적당히 합의하자고 했다. 어차피 낡은 차니까 성의만 표시하고 술이나 한 잔 사라는 것이었다.

나도 나쁠 것 없는 제안이라 15만원을 남자에게 건네고 어색한 술자리를 가졌다. 간단히 호프 몇 잔 하는 동안 남자는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남자는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뜻밖에도 그는 전직 형사였다. 그것도 강력반에서 근무한 베테랑으로 연배는 나보다 8년 아래였다. 상관이 업주와 결탁한 걸 알고 조치를 취하려다 도리어 누명을 쓰고 옷을 벗었다며 울분을 토로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저렇게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호감이 갔다. 헤어질 때 그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서랍에서 그의 명함을 찾아냈다.

“윤형준! 그래 맞아. 윤 형사라고 불러 달라고 했지.”

그는 퇴직한 다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자신을 형사라고 부르는 게 좋다고 했다. 아직 날 기억하고 있을지 알 수가 없었지만 혹시 조언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그는 당시에도 강력반 형사답게 곤란한 일에 휘말렸을 때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이런저런 요령들을 알려줬다. 법에 대해서도 꽤 해박한 듯 보였다.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음성이 넘어왔다. 내가 조심스럽게 지난 일을 얘기하며 기억하느냐고 말하기가 무섭게 예상보다 훨씬 반기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기억하다말다요. 어쩐 일이십니까? 전화를 다 주시고.”

그제야 안심이 됐다. 힘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냥 생각이 나서 걸었다, 어떻게 지냈냐는 따위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슬쩍 서우 얘기를 끼워 넣었다.

그다지 심각하게 얘기하지 않았고 혼잣말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을 뿐인데 전직 형사답게 재빨리 내 마음을 읽어 냈다.

“김 형, 그냥 솔직하게 말해요! 딸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인데. 전화로 말하긴 그렇죠? 내가 그쪽으로 갈까요?”

어쩔 수 없이 난 그에게 모든 얘기를 털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그쪽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극구 자기가 오겠다고 했다. 우린 아파트 앞 호프집에서 만났다. 자초지종을 들은 그가 말했다.

“요즘 애들 절대로 만만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중학교 2학년 여자애들이 친구 납치해서 성매매 시키는 세상 아닙니까? 현장에서 이런저런 일 겪다보면 놀라자빠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리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연배도 저보다 한참 윈데.”

난 말은 천천히 놓겠다고 했지만 그의 고집에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러게 말야. 나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더라구. 이럴 때보면 소시민이라는 게 참 힘이 없어. 딸아이도 하나 지켜주지 못하고. 갑자기 내가 무능하게 느껴지고 자괴감까지 들더라니까.”

“그 세계를 모르니까 당연하죠. 그런 애들은 겁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확실히 구분해요. 일테면 학교 선배라든가 형사들은 무서워하지만 학부형이나 선생은 아무리 얘기해도 지들 밥으로 생각하죠. 걱정 마시고 제게 맡기세요! 학교, 반, 이름만 가르쳐 줘요.”

“아냐! 그냥 조언이나 좀 들을까 해서 그런 거야.”

“김 형! 아니 형님! 제가 아무리 조언을 해 줘도 형님은 절대로 이 문제 해결할 수 없어요.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걔네들은 같은 방법이라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고. 집까지 찾아와서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정도면 보통내기가 아니에요.

그런 애들한테 제일 절실한 게 뭔지 아세요? 첫째도, 둘째도 돈이에요. 유흥비! 그거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니까요. 따님처럼 순진하고 한번 먹혔던 애들은 딱 찍어서 끝까지 괴롭힌다구요. 패거리로 몰려다니면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에 찍히면 배겨날 수가 없어요.”

윤 형사의 말을 듣고 있자니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고 가슴이 짓눌린 것처럼 답답하게 오그라들었다.

“부담 갖지 마시고 저한테 맡기세요. 다른 사람에겐 힘든 일이겠지만 저한텐 쉬운 일이니까. 아시잖아요. 제 직업이 뭐였는지.”

“말은 고맙지만 어떻게 그래? 윤 형사도 사는 일이 바쁠 텐데.”

“아이고. 세상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사는 거예요. 진짜 별 거 아니라니까요.”

그가 능숙하게 수첩과 볼펜을 꺼내며 물었다.

“학교하고 이름요!”

난 선뜻 대답을 못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말야, 내가 경비를 좀 댈게. 그렇잖아도 정 방법이 없으면 심부름센터 이런 곳에라도 부탁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윤 형사가 정색을 하고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이런 일 하는데 무슨 돈을 받아요. 그냥 해 드릴게요.”

난 잠시 고민했다. 그저 한 번 만난 사인데 이런 일을 부탁해도 되는 걸까. 이 친구는 내게 호감이 있어 이렇게 나서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그런 것일까. 하긴 세상에는 나 같이 계산적인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비록 소수긴 하지만 자기 만족이나 정의감 같은 걸 돈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게다가 윤 형사는 이전에 형사가 아니었던가. 잠시라도 그 시절의 기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남의 순수한 호의를 훼손하는 것 같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부탁한다며 혜주의 이름과 학교, 반을 알려주었다. 그는 일이 잘되면 술이나 한잔 사 달라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다른 화제를 꺼냈다.

윤 형사와 헤어지기 직전 나는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질문을 했다.

“근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나보다 잘 알겠지만 이게 워낙 조심스러운 일이라서…….”

“방법이야 많죠. 제가 한번 그 기집애를 살펴본 다음에. 아이고,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 형사가 조폭도 아니고 불법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할까 봐서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자 윤 형사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치고 말했다.

“그냥 저한테 맡기시라니깐요!”

*

윤 형사를 만난 후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문제가 커지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과 혜주라는 애가 다시는 서우 곁에 얼씬도 못하게 윤 형사가 제대로 겁을 줬으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공존했다. 걱정은 꼬리를 물었고 생각은 온갖 망상과 추측으로 발전했다.

등 뒤에서 박 부장의 소리가 넘어왔다.

“김 차장, 요즘 왜 그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툭하면 정신줄 놓고 있고. 치매야, 노환이야? 아니면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저께 한바탕 사무실을 뒤집은 후 이틀 동안 눈도 마주치지 않던 박 부장이 이제야 말을 붙여온 것이다. 그가 사장에게 제출할 월별 성과 보고서를 부탁했는데 내가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덕분에 박 부장이 사장실에 불려가 참담하게 깨졌다는 얘기를 뒤늦게 부속실 직원에게 들었다. 사장실을 다녀온 그는 마치 조폭처럼 사무실 의자를 집어던졌고 ‘씹할! 씹할!’ 하며 난리를 쳤다. 급기야는 날 향해 서류 더미를 집어던지며 악을 써 댔다.

“개새끼, 내가 너 가만 두나 봐라. 씹할 놈이 날 엿 먹여? 너 죽었어.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짓밟아 버리겠다고!”

직원들이 모두 보는데서 그는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솔직히 어떤 면으로도 그가 두렵진 않았다. 학교 때도 싸움이라곤 해 본 적이 없고 늘 약골에 속했지만 박 부장만큼은 이길 자신이 있었다.

또 아무리 지가 회사에 줄을 대 놓고 있다고 해도 이유 없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월말 성과 보고서는 엄연히 그의 일이지 내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억지로라도 떠맡았으니 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서우 일에 신경을 쓰느라 그걸 챙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건은 죄송했습니다. 하겠다고 했으면 제대로 했어야 하는데.”

그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다가 냉담하게 말했다.

“됐어. 어차피 내가 했어야 할 일이니까. 아무튼 오해는 풀자구. 한 사무실에서 다른 직원들도 불편하잖아? 그리고 김 차장이 나보다 나이 많다는 거 알아.

하지만 여긴 엄연히 회사란 말야. 가끔 보면 내가 뭐라 그랬다고 금방 눈 치켜 뜰 때가 있는데 그거 자존심이 아니라 공과 사를 구별 못하는 거야. 마음을 잘 다스려야지. 그런 것도 조절 못하면 회사 나오지 말던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놈은 바로 네놈이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독백은 마음속에서만 맴돌다 소리 없이 사그라졌다.

박 부장의 야비한 눈빛이 뒤통수를 간질여 집으로 돌아올 때도 찜찜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잘못한 게 없다지만 부서장의 평가는 인사에서 큰 비중을 차기하기 마련이다. 이전에도 내가 고분고분하지 않아 늘 껄끄럽게 생각하던 박 부장이었다. 분명 그는 이번 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고 윗사람들에게 날 모함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엔 회사를 나가야 하는 상황까지 생길지도 모른다. 퇴사까지 염두에 두며 우울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서는데 웬일로 아내가 상기된 표정으로 날 잡아끌었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아 안방으로 끌고 가더니 말을 쏟아냈다.

“그 기집애, 사고 났대!”

뜬금없는 아내의 목소리엔 긴장감과 함께 야릇한 흥분이 깃들어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불안한 느낌을 억누르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혜주, 그 기집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다쳐서 당분간 학교에 못 나온다고 담임이 그랬대.”

“다쳤다고? 어딜?”

“확실하진 않은데 서우 말로는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던데?”

“성…… 폭행?”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무서운 일을 당했다고 하니까 처음엔 안됐다 싶었는데 지금은 솔직히 잘됐다는 생각이 드는 거 있지. 서우한테만 그랬겠어? 그동안 애들한테 별의별 못된 짓을 다하고 다녔을 거 아냐. 벌 받은 거지 뭐. 하고 다니는 행색이 성폭행 아니라 뭔 일은 안 당할까.

거기다 맨날 남자애들하고 어울려 다니며 몸 간수도 제대로 안 했을 거야. 안 봐도 훤해. 아무튼 그 기집애가 서우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한다니까 1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거 있지?”

“그거 확실한 거야?”

“뭘?”

“성폭행 당했다는 거.”

“모르지. 서우 말로는 학교에 그렇게 소문이 쫙 퍼졌다고 하던데. 근데 왜?”

쿵쿵거리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냐. 아무것도. 나 차에 회사 서류 두고 온 게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아내를 뒤로 하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왔다. 머릿속에선 온갖 불길한 상상과 억측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서로 뒤엉켰다.

윤 형사를 만난 게 3일 전이다. 설마, 우연이겠지. 그도 말하지 않았는가. 대한민국 경찰이 불법적인 방법을 쓰겠냐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윤 형사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를 이유는 없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절묘하다. 윤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윤 형사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한편에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는 아직 혜주의 얼굴도 못 봤을 것이다. 성폭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핸드폰에서 윤 형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간단히 안부를 물은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혹시 우리 딸 괴롭힌다는 그 애, 혜주 만나 봤어?”

당연히 ‘바빠서 아직요.’란 대답을 기대했는데 웬일인지 윤 형사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시간이 2∼3초쯤 지난 것도 같고 1분쯤 기다린 것 같기도 했다. 기분으로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그의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쌕쌕 대고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감이 서서히 부풀어 올랐다.

“만난 거야?”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묻자 뜸을 들이던 윤 형사가 대답했다. 분명하지 않은 뭔가를 뒤쪽에 숨겨 놓은 그런 목소리였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난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목소리는 잔뜩 굳어져서 기계음처럼 들렸다.

“사실은 그 애가 성폭행을 당했대. 오늘 학교도 못 나왔다는 거야.”

다시 초조함을 억누르며 윤 형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가 내키지 않는 것처럼 물었다.

“그래서…… 그게 왜요?”

순간 그의 반문이 자신과 상관도 없는 일을 왜 물어보느냔 의미로 들렸다. 그럼, 그렇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그가 왜 그런 일을 하겠는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긴장이 풀어지며 쉽게 말이 나왔다.

“그렇지? 윤 형사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

이번에도 윤 형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불길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그가 말했다.

“내가 한 일 맞는데…….”

너무도 쉽고 담담하게 대답을 해서 귀가 의심스러웠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직접 한 건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는 현실이 아닌 내가 모르는 아주 먼 세상을 돌아오는 메아리 같았다. 난 여전히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물었다.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형님이 저한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까?”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목소리가 올라갔다.

“내가 언제 성폭행하라고…….”

난 말을 끊고 혹시라도 주위에 듣는 사람이 없는지 황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언제 그런 짓 하라고 시켰어? 분명히 자네가, 아니 당신이 그랬잖아. 불법적인 방법이나 문제가 될 만한 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방법은 일을 하다 보면 달라질 수 있는 거죠. 형님, 제가 지금 다른 일이 있어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거든요.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이봐, 윤 형사…… 이봐!”

전화가 끊어졌고 다시 걸었을 때는 핸드폰의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가 공허하게 흘러나왔다. 난 마치 헛것을 본 사람처럼 눈을 껌뻑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10년을 넘게 살았던 아파트 광장과 주변 풍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현실이라는 걸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살아오면서 지금껏 경찰서 한 번 가 본 적이 없는데 내가 성폭행을 하라고 시켰다니. 다리가 고무처럼 꼬이며 휘청거렸다. 현실의 땅을 딛는 것이 아닌 끔찍한 악몽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난 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내 손으로 담배를 사는 게 8년 만이었다. 아파트 광장 벤치에 앉아 이름도 낯선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8년 만에 피우는데도 몸은 어제 일처럼 담배 맛을 금방 기억해 냈다. 입에서 새나오는 연기와 호흡이 파르르 떨렸다.

‘뭔가 잘못된 거야. 이럴 수가 없어. 아니, 난 상관없는 일이야. 맙소사, 성폭행이라니!’

난 상관없는 일이라고 아무리 부인해도 두려움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일이 벌어졌고 내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두려움이 가슴 밑바닥에서 차곡차곡 부풀어 올라 숨통을 조여 왔다. 파란 담배 연기가 눈앞에서 흩어지며 괴물의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괴물이 날 향해 음흉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넌 범죄자야. 딸의 친구를 성폭행하라고 시켰어!’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