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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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엘리베이터를 내려 아파트 현관 입구에 섰다. 아침 햇살이 축복처럼 그의 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최고급 브랜드인 키톤 슈트를 입은 남자는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바람이 그의 슈트를 어루만지며 어딘지 모를 곳으로 흘러갔다.

기분 좋은 출근이다. 남자는 옷깃을 한 번 매만진 후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아파트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숱이 적은 남자의 머리칼을 가볍게 흩어 놓았다. 그는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광장을 가로질렀다. 안면이 있는 주민들과 마주치면 예의 바르고 교양 있는 몸짓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남자의 시야에 낯선 물체가 들어왔다. 102동과 103동 건물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너머로 상의와 하의가 붙은 옷 한 벌이 펄럭거리며 날아가는 게 보였던 것이다.

‘어느 집 빨래가 저렇게 잘 날아가나?’

남자는 재미있는 광경이란 생각이 들어 눈으로 날아가는 옷을 쫓았다. 옷이 어디까지 날아갈까 궁금해 하며 지켜보던 남자에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옷이 바람에 날리는 게 아니라 마치 살아서 제 의지대로 휘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옷의 소매는 스스로 팔을 움직이는 것처럼 제멋대로 펄럭이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비비고는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옷이 아니었다. 날아가던 옷 한 벌이 허공에 멈춰서더니 남자를 쳐다보는 것처럼 가만히 펄럭일 때였다. 갑자기 남자의 왼팔이 머리 쪽으로 휙 하고 올라가더니 누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오른손까지 위로 치켜 올라갔다.

당황한 남자가 몸을 비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놀라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슈트와 와이셔츠의 단추들이 저절로 열리더니 왼쪽 소매가 그의 머리채를 덥석 움켜쥐고는 슈트 안에서 그의 육신을 훌렁 끄집어냈다. 말이 이상하지만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옷이 남자를 벗겨 낸 것이다. 늘 남자가 자랑으로 여기던 최고급 브랜드의 슈트가 남자를 벗어 버리고는 그를 아스팔트 위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알몸이 된 남자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아스팔트 위에 쪼그리고 앉아 놀란 눈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남자의 불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치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남자의 몸이 뒤틀리며 기이하게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은 아스팔트와 점점 가까워졌고 급기야 바닥에 눌어붙은 껌처럼 납작하게 쪼그라들어버렸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쳐 몇 가닥 없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사납게 휘감았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런 불행이 남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파트 광장 곳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옷이 사람을 벗겨 내고는 멋대로 허공으로 치솟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온갖 종류의 다양한 색상을 가진 옷들이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 펄럭이며 화려하게 비상했다.

차가운 아스팔트에 남은 사람들은 변변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남자와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다. 다들 쪼그라들고 아스팔트의 껌이 되어 여기저기 바닥에 눌어붙었다. 아파트 광장의 바닥은 어느새 납작해진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

원종은 경찰복을 입기만 하면 자신이 국가 권력을 대변하는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에게도 가족에게도 그는 늘 지배자이고 군림하는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도 그는 경찰복을 차려입자마자 아내와 딸에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내가 자신의 말에 토를 달자 고함을 질렀고, 어린 딸이 대든다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평소에도 그는 경찰복만 입으면 곧잘 폭군이 되곤 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벌컥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뒤에는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딸과 겁에 질린 아내가 서 있었다. 물론 원종의 마음이 마냥 편한 건 아니었다. 손찌검을 하고 나면 뒤늦게 후회가 되고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싶은 생각도 추호도 들지 않았다.

아파트 현관을 나선 원종은 빳빳이 다린 경찰복에 신경 쓰며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아침부터 그 난리를 치느라 지각하지 않으려면 신호를 무시하고라도 있는 대로 액셀을 밟아야 할 것 같았다.

경찰한테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정신없이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던 원종은 이상한 예감에 주변을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아파트 광장에서 옷들이 사람을 벗겨 내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옷에 의해 벗겨진 사람들이 물건처럼 내팽개쳐져서 아스팔트에 알몸으로 처박혔다. 온몸이 구겨지고 오그라드는 게 오징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믿기지 않는 현실에 원종은 혹시 꿈을 꾸는 건 아닌지 의심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사방에서 기이한 비명이 터져 나왔고 그 무시무시한 사건은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원종은 숨이 막히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원종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경찰복을 만지작거리며 옷을 벗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우물쭈물하던 원종의 앞으로 낯익은 남자가 정신없이 도망을 쳐 왔다. 그는 같은 동에 살면서 자주 인사를 나누던 택시 기사였다.

공포에 사로잡힌 남자가 원종을 보고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벌리는 순간 양팔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택시 기사 복이 남자를 벗어 던진 건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알몸이 된 남자는 그대로 아스팔트에 처박히더니 오징어처럼 오그라들었다. 정신이 번쩍 든 원종은 그의 분신과도 같던 경찰복을 허겁지겁 벗어젖혔다.

속옷 바람이 된 그는 진저리를 치며 손에 들고 있던 경찰복을 멀리 내던졌다. 그의 손을 떠난 경찰복 상의와 바지가 공중에서 껴안듯 뒤엉키더니 얼마 가지도 않고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고 있던 구두와 속옷, 양말까지도 모조리 벗어서 집어던졌다.

여전히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원종은 저만치 떨어진 경찰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바람이 불었는지 축 늘어진 경찰복이 얼굴을 찌푸리듯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원종은 동공이 튀어나올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경찰복을 노려봤다.

숨을 죽이고 있던 경찰복은 순식간에 땅에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경찰복은 허공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몇 번 휘돌더니 원종을 향해 덤벼들었다. 연회색 상의는 머리 위로 날아와 상반신을 덮어 씌었고 검정색 바지는 두 다리를 끼워 넣기 위해 종아리에 찰싹 감겨들었다.

그는 경찰복이 달라붙자 비명을 지르며 옷을 벗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마치 거머리를 떼어내듯 힘겹게 옷을 벗겨낸 그는 근처 난간에 옷을 감아 놓고 알몸으로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도망쳤다.

옷들이 공격할까 봐 하늘만 쳐다보며 달리던 그의 맨발에 축축하고 말랑말랑한 고무장갑 같은 게 계속 밟혔다. 바닥을 내려다본 원종은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서 미끄러졌다. 벗겨져서 납작해진 수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들러붙어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끔찍하게도 그는 사람들을 짓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광장 곳곳에 납작해진 사람들이 포개지고 겹쳐져 하나같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원종은 손을 짚고 일어나다가 누군가의 얼굴에 알몸이 닿자 기겁을 하며 몸을 굴렸다. 하지만 그 옆에도 또 그 옆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엉덩이 아래에서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어느 남자가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원종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지만 두 발로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 깃발이 힘차게 펄럭거리는 것 같은 소리에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수많은 옷들이 그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아파트를 벗어나기 위해 입구를 향해 뛰었다. 원종은 사람들의 몸과 얼굴을 짓밟으며 미친 듯이 달렸다. 개중에는 아파트 앞 마트의 주인도 있었고 옆집 여자도 있었다. 그가 밟고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원종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파트를 벗어났다.

‘경찰서로…… 경찰서로 달려가서 대원들을 이끌고 와야겠어!’라는 생각을 하던 그에게 가족 생각이 났다. 비록 손찌검도 하고 겉으로는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지만 그는 아내와 딸을 사랑했다. 그에게 가족이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원종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뒤돌아서서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옷들이 한데 뒤엉켜 거대한 괴물처럼 다시 그의 뒤를 쫓아왔다.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원종은 이를 악물고 날아드는 옷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처럼 아파트 단지를 빙빙 돌았다.

간신히 옷들과 간격을 벌린 원종은 102동 현관문을 밀어젖혔다. 문이 부서질 듯 덜커덩거리며 안으로 세차게 밀려들어 갔다. 그는 곧장 엘리베이터 앞으로 달려갔다. 돌아보니 서로 뒤엉켜 덩치가 커진 옷의 괴물이 현관을 통과하지 못해 자기들끼리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들었고 6층을 눌렀다.

6층에서 내린 원종은 집 앞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여보! 혜진아!”

하지만 딸도 아내도 대답이 없었다. 집은 텅 비어 있었고 어디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내가 늘 틀어놓던 TV만 혼자 신이 나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아내는 TV를 힐끗거리며 딸의 등교 준비를 돕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는 거실과 화장실은 물론 두 개의 방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졌다. 불길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고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원종은 허탈하게 베란다 옆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 안에 있었다면 아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이상했다. 진득하게 땀이 밴 그의 얼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원종은 어떤 예감에 반사적으로 베란다를 돌아봤다. 베란다로 통하는 유리문이 좌우로 활짝 열려 있었다. 베란다에 하얀 커튼이 드리워져 살랑살랑 나부끼는 모습이 보였다.

원종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엉거주춤 일어나 베란다로 조심조심 나아갔다. 그는 눈앞에서 살랑살랑 움직이는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으악!”

원종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는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납작하게 오그라든 알몸의 아내가 빨랫줄 위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밑에 놓인 작은 행거에는 속옷과 양말 대신 역시 벗겨져서 납작해진 딸아이가 빨래가 되어 춤을 추고 있었다. 경악한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여보! 혜진아!”

그는 빨래가 된 아내와 딸의 몸을 움켜잡다가 아파서 인상을 찡그리는 두 사람을 보고 얼른 손을 놓고 물러났다. 아내와 딸은 공포와 불안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기가 막혀서 눈물을 훔치고는 말했다.

“설마 내가 당신하고 혜진이를 어떻게 할까 봐 그러는 거야? 아침의 일은 정말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러니 더 이상 날 무서워하지 말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도 무서워 죽겠단 말야!”

그는 빨래가 된 아내와 딸 앞에 무릎을 꿇고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사과를 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절대로 손찌검 따위는 하지 않는 가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는 훌쩍훌쩍 울며 무릎걸음으로 아내와 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내와 딸의 몸은 점점 뒤쪽으로 펄럭였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처참한 심정이었다. 원종은 아내와 딸을 끌어안고 펑펑 울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게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그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원종이 벌떡 일어나 돌아보니 거실에서 옷들이 전투를 준비하는 적군처럼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낯익은 옷들이었다.

원종은 그제야 그가 집 안에 들어와 장롱을 열어놓은 덕에 그 속에 있던 옷들이 튀어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옷들이 피 냄새를 맡은 피라니아 떼처럼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그중엔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훈장이 달린 경찰관 정복도 끼어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힌 원종은 울부짖으며 옷들을 뿌리치고 밖으로 내달렸다. 아내와 딸을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자신의 몸이 납작하게 오그라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는 아내와 딸을 버려둔 채 집 밖으로 정신없이 달아났다.

원종은 눈물콧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102동을 뛰쳐나왔다. 아파트 광장에는 수많은 옷이 나풀거리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휙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어느 사이엔가 그를 발견한 옷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원종은 다시 죽을힘을 다해 뛰어 아파트를 벗어났다. 하지만 바깥은 아파트 광장보다 더 아수라장이었다.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는 택시 한 대가 인도로 올라서서 벽에 처박혀 있었고 그 옆으로는 하얀색 카니발이 가로수를 들이받은 채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섬뜩한 기분이 든 건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원종은 알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양쪽으로 길게 뻗은 도로를 황망하게 쳐다봤다. 도로 곳곳에 차들이 부딪치거나 뒤집힌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일은 그런 자동차 안에 알몸의 사람들이 좌석에 축 늘어져 있었는데 옷들이 자동차 내부에서 미친 듯이 날아다니는 모습이었다. 아니, 날아다닌다기보다는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 같았다.

원종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고 폐허가 된 도시를 종종거리며 걸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알몸으로 버려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바닥에 눌어붙은 사람들의 얼굴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입을 찢어지게 벌린 얼굴이 있는가 하면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옆을 째려보는 얼굴. 실눈을 뜨고 이를 악문 얼굴도 있었고 미간을 찌푸리며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얼굴도 있었다. 분명한 건 다들 공포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가까운 어딘가에서 옷들이 떼를 이루어 빌딩숲 사이를 날아다니는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원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뒤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그의 눈에 길 건너 좁은 골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저분하고 어두운 그 안에서 무언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게 보였다. 사람이었다. 원종과 마찬가지로 두 발로 서 있는 사람이 전봇대 뒤에 숨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원종은 멸망한 지구에서 처음으로 인간을 만난 최후의 생존자 같은 심정이 되어 두 팔을 높이 들고 좌우로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괜찮은 겁니까? 여기에요! 여기!”

하지만 남자는 원종을 보고도 공포에 넋이 나간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원종이 어쩔 수 없니 남자를 향해 다가가려는데 옷들이 달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심을 누비던 옷들이 그의 외침을 듣고 일제히 몰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먹잇감을 채기 위해 고공낙하를 하는 독수리 떼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

원종은 기겁을 하며 남자를 향해 달렸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원종의 외침에 비로소 정신이 든 남자가 전봇대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던 그의 표정이 원종을 추격해 오는 옷들을 보고는 하얗게 변했다.

“얼른 뛰어요! 뛰라고요!”

원종이 큰소리를 지르며 골목 안쪽으로 달려들자 남자도 얼떨결에 획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옷들이 좁은 골목길을 가득 메우며 그들을 쫓아왔다.

골목의 먼지와 쓰레기들이 옷들에 휩쓸려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맹렬히 뛰는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결이 어두운 골목을 가득 메웠다. 좁은 골목이라 옷들은 여기저기 걸리기도 하고 서로 뒤엉켜 찢어지기도 했다.

정신없이 골목을 누비며 달아나던 원종이 뒤를 돌아봤을 때는 다행히 옷들이 보이지 않았다. 원종이 가쁜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멈춰 섰다.

전봇대에 숨어 있던 남자도 자리에 퍼질러 앉더니 토할 것처럼 기침을 해 댔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원종이 물었지만 알몸의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마구 내젓다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남자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좁고 기다란 골목 안을 공명했다. 원종은 노곤함을 느끼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영문도 모른 채 아침부터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남자가 울음을 그치곤 말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내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냥 성이 김이었다는 것밖에는.”

김은 충격이 몹시 큰 모양이었다. 하긴 원종도 아내와 딸의 모습을 봤을 때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팠다. 원종은 남자에게 쉬라고 말하곤 벽에 고단한 몸을 기댔다. 어둠속에 파묻혀 있던 원종의 시야에 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좁은 골목의 틈으로 보이는 하늘.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별들이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원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골목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밀자 화려한 도심의 밤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적막한 도심의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과 불빛들이 별천지처럼 신비롭게 보였다. 원종은 슬픔에 잠긴 도시의 야경을 감상했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뭔가 움직이는 기척이 전해졌다. 원종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쳐 앉았다. 좌측 아래쪽의 주유소 앞으로 알몸의 남자가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이마가 M자 형으로 벗어지고 안경을 코에 걸친 배불뚝이 50대였다. 그 역시 충격을 받은 듯 걸음걸이가 어눌했고 꼭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다시 큰길로 나가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남자를 저대로 놔둔다면 옷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은 옷들이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습게도 원종은 옷들을 인간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원종은 갈등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경찰이란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골목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던 배불뚝이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오는 원종을 주시했다.

원종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옷들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에 눌어붙어 있던 사람들도 누가 싹 쓸어 담았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도로에 뒤엉켜 있던 자동차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느릿하게 걷던 원종이 배불뚝이와 거리가 좁아지자 재빨리 달려가서 말했다.

“여긴 위험해요! 날 따라와요!”

원종이 배불뚝이의 손을 잡아 골목으로 이끌었다. 배불뚝이는 얌전한 어린아이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원종의 뒤를 고분고분 따라왔다. 마침내 배불뚝이가 무사히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김도 반가운 듯 활짝 웃었다.

하지만 배불뚝이 역시 충격을 받은 탓인지 무슨 얘기를 물어도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하긴 이 험한 도시에서 혼자 살아남아 알몸으로 거리를 걷고 있던 상황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이제 셋으로 늘어난 알몸의 생존자들은 말없이 어두운 골목에 둘러앉았다. 참담한 현실에 할 말을 잃었는지 다들 땅만 쳐다보며 시간만 계속 흘려보냈다. 그렇게 기다리다 보면 구원의 손길이 그들을 찾아올 것처럼.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다들 알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바닥에 납작하게 눌어붙을 것만 같았다.

가족생각 때문에 감상에 빠져있던 원종이 눈물을 훔치며 배불뚝이에게 물었다.

“댁의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그러자 그때까지 무슨 말을 해도 고개만 내젓던 배불뚝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원종에게 매달리며 말을 쏟아냈다.

“제 가족 좀 살려주세요. 분명히 집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예요. 맙소사! 내가 아내와 아이들을 깜빡 잊고 있었다니! 제발 저하고 같이 가 주세요! 부탁합니다!”

배불뚝이는 아예 무릎을 꿇더니 말문이 트인 어린아이처럼 울며 매달렸다.

“제발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부탁할게요. 제발요!”

원종은 배불뚝이의 애원을 외면하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배불뚝이의 울음은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원종의 심금을 울렸다. 원종 또한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지 않았던가. 결국 원종은 벌떡 일어나 말했다.

“갑시다! 우리가 도와줄게요. 어디로 가면 되죠?”

배불뚝이가 감격해서 소리쳤다.

“그게 정말입니까?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가족은 화장실 안에 숨어 있어요. 저만 따라오시면 돼요. 빨리 가요!”

배불뚝이는 새로 기운을 얻은 사람처럼 힘차게 소리쳤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저만 따라오세요!”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앞장서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원종과 김이 그를 놓치지 않기 위해 숨을 헐떡이며 걸음을 옮겨야 할 정도였다.

배불뚝이는 그 어떤 주저함도 없이 골목길을 이리저리 누볐다. 아무리 가족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 있다고 해도 아까와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새로운 골목으로 들어설 때마다 원종과 김은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옷들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불뚝이는 두 사람이 뒤로 처지면 중간에 멈춰 서서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따라오는지 확인한 후 다시 걷곤 했다.

배불뚝이는 그 둔한 몸으로도 전혀 지치지도 않는 것처럼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다시피 걸었다. 오히려 원종과 김이 힘이 들어 주저앉아 쉬고 싶을 정도였다.

정신없이 배불뚝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황량한 야산으로 변해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김이 원종의 옆으로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원종도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긴 한데…….”

김이 앞장서서 걷는 배불뚝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조금 전부터 저 아저씨 몸에 이상한 게 자꾸 보여요.”

“이상한 거라뇨?”

“저기 허리 쪽을 봐요, 저기, 저기! 방금도 또 보였잖아요!”

김의 말에 원종도 배불뚝이의 허리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신음처럼 소리쳤다.

“나도 방금 봤어요! 저게 뭐죠?”

놀랍게도 앞장서 걷는 배불뚝이의 허리 밑에서 뱀의 혓바닥처럼 가느다란 뭔가가 살짝 삐져나왔다가 다시 사라지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종이 말했다.

“가까이 가서 봅시다!”

둘은 서둘러 배불뚝이를 향해 달려갔다. 배불뚝이는 뒤를 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앞만 보고 걸었다. 불과 2~3미터까지 바싹 다가간 두 사람은 그의 허리에 매달린 기이한 물건을 눈으로 확인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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