놋쇠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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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날 일을 기억 못하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 그건 말이야.

그냥 잊어버린 거야. 왜, 싱거운가요?

하지만 사실이야.

당신은 그냥 잊어버렸어, 왜? 남의 일이니까.

― 영화 「올드보이」 중에서

“와, 잠깐 맞았는데 쫄딱 젖었네. 벌써 장만가? 하여튼 미친 날씨야. 세상이 미쳐 돌아가니 날씨도 미쳐 돌아간다니까. 차문은 또 왜 이리 뻑뻑해. 야, 이거 구리스 칠 좀 해야겠다. 자고로 여자랑 차는 구리스 칠을 자주 해 줘야 부드러워지잖냐. 결혼 짬밥 몇 년이면 그 정돈 기본 아냐?”

“나 결혼 안 했는데.”

“어, 그래? 난 왜 했는 줄 알았지? 영철이랑 착각했나? 맞다, 그런가 보다. 영철이 생긴 게 너랑 비슷하잖냐, 입 툭 튀어나오고 눈 쭉 찢어진 게. 그나저나 이런 날씨에 운전이나 되겠냐. 그냥 차 놓고 찜질방 가서 눈 좀 붙이고 날 밝으면 가지?”

“걱정 마. 올해로 10년째 무사고니까.”

“10년째 무사고가 더 위험한 거야. 구미호도 꼭 백일 채우기 하루 전날 절단 나잖어. 아깝다, 하루만 더 채우면 인간이 될 수 있었는데……. 이딴 소리 지껄이면서. 아무튼 딴 건 몰라도 운전 실력은 절대 과신하면 안 되는 거야. 인생 종치는 거 한순간이라니까. 너 술도 마셨잖어. 꽤 마시는 거 같던데?”

“시늉만 한 거야. 애들 분위기 맞춰 주느라고.”

“그 거짓말을 정말이라고 믿어야 하는 거냐? 그건 아니다 싶은데…… 에이, 모르겠다, 나는. 핸들은 니가 잡는다고 우겼으니까. 난 분명히 말렸다? 나중에 원망하기 없기다?”

“걱정 말라니까.”

“하긴 콜택시를 불러도 여기서 홍주까진 요금이 장난 아니겠다. 새벽 세 시가 넘었지, 앞도 안 보이게 퍼붓지, 이런 날은 따블로 얹어 준대도 간단 택시 없겠다. 나라도 안 간다.

하여튼 동창회 추진한 놈들도 개념 상실이야. 뭔 깡다구로 좋은 홍주 놔두고 이 천리타향서 홍주고 동창회를 하냐. 기백이네 횟집 매상 올려주는 게 그렇게 중요해?

거기다 요새 같은 무더위에 회 잘못 먹었다 식중독이라도 걸리면 지들이 책임질 거야? 음식이라도 잘 나왔으면 말을 안 해. 스끼다시부터 완전 죽음이드만. 메추리알 몇 알에 당근 오이 서너 개, 콘치즈, 계란찜. 이건 뭐, 횟집 스끼다시가 아니라 로바다야끼 기본 안주야.

기백이 새끼도 그렇지, 뜨내기손님들도 아니고 명색이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신경 좀 써 줘야 되는 거 아냐? 날은 또 좀 잘 잡았어? 햇빛 쨍쨍한 날 다 놔두고 왜 하필 이런 날을 잡어. 동창회가 날구지야, 뭐야?”

“너, 말 많이 늘었다? 옛날엔 과묵했잖아.”

“말만 늘었냐. 술배도 늘고 대출금도 늘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늘고…… 딱 하나, 좆심은 줄대, 니미. 아아, 인간 박규완, 왕년엔 잘 나갔는데…….”

“잘 나갔지. 요새로 치면 일진, 짱…… 이런 축이었으니까.”

“일진? 짱? 야, 사회생활 해 보니까 돈 주는 놈이 일진이고 빽 있는 놈이 짱이더라. 중고딩 때 좀 놀았다고 호봉수를 더 쳐 줘, 보너스를 더 줘, 인사 고과에 쁠러스를 해 줘? 다 헛거야. 구복이 원수래더니, 좌우간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옛말도 틀린 거 많아.”

“뭐가?”

“그런 게 있어.”

“뭐냐, 너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여전히 실없어. ‘헛방’이었나, 맞지? 그 별명 누가 지었나, 참 잘 지었대니까.”

“헛방은 허성빈이고.”

“그랬나?”

“넌 니가 지어 준 별명도 기억을 못하냐.”

“내가? 니 별명을?”

“그래, 중학교 때.”

“진짜? 희한하네, 난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데……. 니 별명이 뭐였는데?”

“진짜 기억 못하는 거야, 아님 못하는 척하는 거야?”

“못하는 척을 내가 왜 하고 앉었냐, 진짜 기억 못하는 거지.”

“힌트, 내 이름.”

“니 이름? 조병구? 조병구…… 뭐였지? 뭔데?”

“좆삐꾸.”

“어?”

“니가 지어 준 내 별명, 좆삐꾸.”

“아…… 그랬나? 하여튼 작명 센스하곤…… 애들 땐 왜들 그런 별명을 붙이고 노나 몰라.”

“딱이었지. 이름도 조병구, 생긴 것도 삐꾸, 하는 짓도 삐꾸. 중2 때 학교 화장실서 오줌 누는데 옆에서 니가 이러고 들여다보더니 그랬잖아.

‘어, 이 새끼 좆이 완전 좌향좌야. 조병구가 아니라 좆삐꾼데?’ ‘어디? 어디?’ 이러면서 몰려들었던 니들 패거리들이 전교에 떠벌인 덕에 난 그날부로 좆삐꾸가 됐어.

일주일도 못 돼서 1번부터 43번까지 죄다 ‘좆삐꾸! 좆삐꾸!’ 오죽했으면 나중에는 조병구란 이름보다 ‘좆삐꾸’란 그 별명이 더 친숙했다니까.

그래도 진짜 싫더라. 누가 ‘야, 좆삐꾸!’ 이러고 나를 부를 때마다 달려들어서 그 인간 목을 졸라 버리고 싶을 정도였어. 그 별명이 고등학교 때까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거, 아냐?”

“와, 어떻게 된 게 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냐. 조기 치매가 왔나.”

“그래? 난 그날 변기에 누렇게 껴 있던 오줌 때까지도 기억하는데? 코를 찌르던 지린내며, 화장실 벽에 누가 써 놓은 ‘병신’이란 낙서며, 니들 패거리가 낄낄대던 소리, 유난히 ‘좆’을 힘주어 발음하던 니 말투, 행여 주먹이라도 날아올라 말대꾸 한마디 못하고 돌아서면서 느낀 기분까지…… 죄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에이, 왜 그러냐, 꽁생원도 아니고 다 지난 옛일 갖고 뭘 그리 꽁하게……. 아까 현철이가 그랬잖어. 못 들었어? ‘과거는 과거일 뿐, 연연하지 말자, 중요한 건 현재다!’”

“알아, 그냥 그렇단 거야. 철없는 애들 때야 다 그렇지, 뭐. 안 그래?”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잖냐. 전에 뉴스 보니까 요새 애들은 더 해. 대책 없드만. 중학교 졸업식 때 선배들이 후배들 옷 싹 벗기고 날계란 던지고 케찹 뿌리고…… 그걸 또 찍어 놓고 인터넷에 뿌리고…… 요새 애들은 도대체 커서 뭐가 될라고 그러냐. 적어도 우리 땐 그래도 그런 건 없었잖어.”

“그러는 너는…… 너는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랬는데?”

“나? 내가 뭘?”

“요새 애들 걱정하는 넌 커서 뭐가 될려고 애들 패고 다녔냐고.”

“그러게, 왜 그러고 다녔나 몰라. 그땐 그게 멋있는 줄 안 거지, 뭐. 야, 근데 지금 나오는 노래, 누가 부른 거냐?”

“산울림.”

“제목이 뭔데?”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아, 제목도 진짜 진상이네. 날도 구질구질한데 꼭 이런 노랠 들어야겠냐? 최신 가요 좋은 거 많잖아. ‘가 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예요’? 그래, 가 버린 날들이지만 잊혀지진 않을 거다.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데, 너, 가가멜 알지? 학생 주임.”

“알지.”

“그 인간 죽었대.”

“그래?”

“어, 벌써 몇 년 됐대네. 영철이가 그러는데 간경화로 죽었대지, 아마? 아아, 그 인간, 진짜 똘아이였는데……. 목장갑 끼고 다니면서 애들 패고, 바리깡 들고 다니면서 머리 긴 애들 쥐파먹고…….

하루는 아침에 내가 학교 와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거든? 근데 올라가다 보니까 계단참에 웬 무좀 양말 신은 발가락이 보이는 거야. 그 양말 신으면 모양이 상당히 웃기잖냐. 슬리퍼 사이로 튀어나온 발가락이 꼼지락대는 게 웃겨서 피식 웃었어.

그땐 그 발가락 주인이 그 인간인지도 몰랐지. 막 계단참에 올라서면서 고개를 딱 들었는데 가가멜인 거야. 인사를 할려고 했는데 타이밍이 늦은 거야. 그 인간이 나를 딱 붙들더니 이러네?

‘너, 나 알아, 몰라?’ 알지, 왜 몰라. 홍주고에서 가가멜 모르면 간첩이지. ‘아는데요.’ 이랬더니 ‘아는데 왜 인사 안 해, 새끼야.’ 이러면서 다짜고짜 목장갑 낀 주먹으로 죽통을 다섯 대나 날리는데, 와, 눈앞에 별이 번쩍번쩍 하네. 입술이 다 터졌대니까.

실컷 패고 나서 그 인간이 나한테 뭐랬는 줄 아냐? ‘개새끼야,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마라.’ 와, 그 말 듣는데 진짜 선생이고 뭐고 그 자리에서 맞짱 까고 싶더라.

아니, 상식적으로 무좀 양말 신은 발가락 보다가 인사 못한 게 죽통 다섯 방에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마란 소리까지 들을 짓이야? 아,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진짜. 너, 언제 누가 학교 벽에 빨간 락카로 ‘가가멜 뒤져라.’ 대문짝만 하게 써 놔서 학교 발칵 뒤집혔던 거 기억나냐?”

“기억나지. 가가멜이 누군지 잡히면 죽인다고 각목 들고 다니면서 설쳤잖아.”

“그거, 내가 한 거야.”

“그래?”

“어, 생각할수록 열 받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지가 인생 그 따위로 살라 마라야? 그래서 야밤에 깡소주 병나발 불고 가서 썼지. 그거 쓰고 나니까 분이 좀 풀리대. 어어, 야, 너무 밟는 거 아냐? 길도 미끄러운데…….”

“왜, 걱정돼? 어여쁜 처자식 두고 황천 갈까 봐?”

“그래, 혹시 내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내 마누라, 내 새끼들은 어떡하나……. 술배, 대출금, 콜레스테롤 수치에 겁까지 늘었다, 왜? 후우, 나오니까 확 오르네. 에어컨 좀 틀면 안 되냐?”

“고장 났어.”

“뭐? 요새 같은 찜통더위에 에어컨 고장 난 차를 맨 정신으로 어떻게 타고 다녀. 어? 뭐야, 이거, 유리도 안 내려가네.”

“고장.”

“문짝도 맛 가, 에어컨도 고장 나, 유리도 안 내려가. 엔간하면 하나 바꿔라. 요새 누가 이런 고물을 끌고 다니냐? 쓸 만한 차도 중고로 사면 몇 백 안 하드만. 와, 이 땀 좀 봐. 보여? 끈적끈적하고 뜨끈뜨끈한 게 미치고 환장하겠네. 불쾌지수 환상이다, 환상.”

“행복해?”

“행복하긴…… 미치고 환장하겠다니까?”

“사는 게 행복하냐고.”

“아, 난 또 뭔 소리라고. 새끼, 뜬금없긴……. 누군 행복해서 사냐? 행복하려고 살지. 그래도 통장에 월급 들어오면 마누라 입 헤벌어지고, 맛난 거 사 주면 새끼들 입에 납죽납죽 들어가는 거 보는 재미로 산다.”

“애들은 잘 커?”

“잘 크지. 큰놈이 이제 일곱 살인데 날 쏙 빼닮았어. 그래서 그런가, 지 엄마보다 날 더 잘 따러. 아빠가 세상에서 최고 잘생겼고 제일로 멋있댄다.”

“제수씬 예뻐?”

“마누라가 이뻐 봤자지. 그래도 어디 가면 빠지는 얼굴은 아니다. 애 둘 낳고도 아직 몸매도 아가씨 같고……. 온실 속 화초 같다는 말 있잖어, 딱 우리 마누라를 두고 하는 말이래니까.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고…….”

“너 학교 다닐 때 논 건 알어?”

“모르는 게 약이래잖어. 말 안 했어. 그냥 매년 우등상, 개근상 기본으로 타는 범생이었다고 그랬다. 아, 그랬더니 어쩌다 옛날 승질 나오면 깜짝깜짝 놀래. 그래서 이랬지, 범생이는 범생인데 가끔 욱하는 범생이었다고. 그럼 이 여자는 또 그걸 다 믿는 눈치야.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 하는 건지…….”

“희정이랑 비슷하네.”

“희정이? 희정이가 누군데?”

“희정이도 기억 안 나? 정말 다 까먹었구나. 홍주여고 조희정. 얼굴 하얗고 눈 똘망똘망하던 애.”

“얼굴 하얗고 눈 똘망똘망하던 애? 야, 우리 시골집 진돗개 백구도 얼굴 하얗고 눈은 똘망똘망하다. 조희정? 조희정…… 아아, 조희정! 난 또 누구라고. 근데 솔직히 나, 걔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누구한테 시집가서 애 낳고 잘 살겠지.”

“죽었어.”

“뭐?”

“죽었다고, 희정이.”

“언제?”

“작년에.”

“그걸 니가 어떻게 알어?”

“걔네 근처에 살았거든.”

“어쩌다?”

“자궁암.”

“그래? 한창 나이에 안됐네.”

“‘한창 나이에 안됐네.’ 그게 다야?”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데? 아이고, 아이고, 곡이라도 해야 되는 거냐?”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여자 아니야?”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철없을 때 몇 번 만난 거 갖구 사랑은 무슨, 애들 불장난이지.”

“불장난. 그래, 너한텐 불장난이었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너 오늘 아까부터 좀 이상하다? 말투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내가 기억하는 조병구가 아닌 거 같어.”

“니가 기억하는 조병구는 어떤데? 매일같이 너한테 얻어터지면서도 찍 소리 한마디 못하던 좆삐꾸?”

“아이 참, 왜 자꾸 옛날 얘긴 끄집어내냐. 너는 15년 만에 만난 동창한테 할 얘기가 그렇게 없냐?”

“할 얘기? 할 얘기 많지. 뭐부터 해 줄까? 내 얘기, 아님 니 얘기, 이도 저도 아님 희정이 얘기?”

“하아, 덥다, 더워. 차 안이 아주 그냥 찜통이네, 찜통. 차 유리에 김 끼는 거 봐라, 저거. 앞은 보이냐. 야, 그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 난단 노랜 들을 만큼 듣지 않았냐? 아까부터 계속 그 노래만 반복 되는 거 같다? 시디에 그 노래만 든 거야?”

“너랑 인연이 시작된 게 중1 때였어. 그 전까지만 해도 박규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지. 입학식 다음날이었을 거야. 막 1교시가 시작될 즈음에 니가 교실 앞문을 열더니 그 반들반들한 얼굴을 내밀더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교실 안을 탐색한 니가 애들한테 물었어. ‘야, 담임 왔냐?’ 그 얼굴이 딱 족제비 상이었어. 밤에 닭장으로 숨어들어서 닭 똥구멍에 손을 넣고 내장만 빼먹는다던 족제비.

그렇게 약삭빠른 인상이었거든. 물론 그때만 해도 그 족제비 같은 얼굴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며칠 후 체육 시간이었어. 그때 넌 주번이었고 체육실에서 배구공을 꺼내 와야 했지. 근데 그게 귀찮았던 거야. 그때 니 눈에 띈 게 나였지.

니가 열쇠 꾸러미를 나한테 휙 던지면서 이러대. ‘야, 배구공 좀 꺼내 와.’ 엉겁결에 열쇠를 받아들긴 했는데 뭐야 싶어. 주번은 전데 지 일을 왜 나한테 시켜? 내가 지 심부름꾼이야?

기분이 나빠서 열쇠 뭉치를 운동장 바닥에 던지면서 그랬어. ‘니 일이잖아.’ 그랬더니 니가 눈을 부라리면서 나한테 다가오대. ‘씨발놈이…….’ 이러면서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기세로.

솔직히 겁이 나긴 했어. 근데 가만 보니까 날 보는 니 얼굴이 성질은 나면서도 한편으론 당황한 기색이야. ‘어라? 이 새끼, 만만하게 봤더니 만만찮게 나오네? 보기보다 센 놈인가?’ 이런 마음이었겠지.

니가 한참 날 노려보더니 그랬어. ‘줏어.’ 나도 안 지고 맞섰지. ‘싫은데?’ 너랑 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주변에 슬슬 구경하는 애들이 똥파리처럼 꼬이기 시작했어.

그때 다른 주번 애가 달려와서 안 말렸음 분명 싸움으로 이어졌을 거야. 그날 일은 그걸로 일단락됐어. 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지. 그날부로 넌 날 찍은 거야. 안 그래?”

“모르겠다, 찍고 뭐고 당최 기억이 나야 말이지.”

“그때 니가 선뜻 주먹을 못 날린 이유는 그거야, 날 잘 몰랐으니까, 어쩜 너보다 싸움을 잘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래서 넌 눈을 부라리면서도 선빵을 못 날린 거야.

넌 본능적으로 너보다 약한 놈이랑 너보다 강한 놈을 기막히게 선별해서 그때그때 처신을 달리하는 족속이었거든. 자기보다 강한 놈한테는 한없이 약하고 자기보다 약한 놈한테는 한없이 강한 족속.”

“야, 말이 좀 심한 거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족속이 뭐냐, 족속이.”

“아, 족속이란 표현이 좀 심한가? 그래, 부류라고 해 둘게. 아무튼 그때 넌 약하게 본 내가 강하게 나왔으니 헷갈렸던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나를 예의 주시했지.

얼마 안 지나서 넌 알아챘어, 내가 너보다 약한 놈이라는 걸. 축구를 하다 헛발질을 했을 때, 단체 기합 받으면서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돌다 낙오되었을 때 고개를 들어 보면 여지없이 날 주시하는 니가 보였어.

속으로 같잖았겠지. ‘어쭈, 겨우 저딴 새끼가 나한테 개겼다 이거야?’ 벼르고 벼르며 이를 갈았겠지, 저 새끼 언젠가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그 즈음 넌 반에서 질 안 좋기로 유명한 패거리들하고 어울리기 시작했어. 니가 숨겨 왔던 발톱을 드러낸 것도 바로 그 즈음이었지.

하루는 니가 내 샤프를 빌려갔어. 말이 좋아 빌려간 거지, 사실은 뺏어간 거야. 쓰고 있던 걸 말도 없이 쏙 빼갔으니까.

그러면서 나를 흘끔 돌아보는 거야. ‘어쩔래?’ 이렇게 말하는 눈이었어. 나를 떠보려고 한 행동이 분명했지. 화가 났어. 나도 샤프는 그거 하나밖에 없었거든.

그래서 달라고 했지. 내 앞자리에 앉은 니 등을 두드리면서 ‘규완아, 미안한데 나도 그거밖에 없거든.’이라고, 비굴할 정도로 완곡하게 말했는데 넌 못 들은 척 돌아보지도 않더라.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별 수 없었어. 또 니 등을 두드리는 수밖에. ‘샤프 좀…….’ 그제야 니가 귀찮게 엉기는 파리를 쫓듯이 손사래를 쳤어. ‘꺼져.’

그 말까지 듣고 나니 진짜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더라. 그래도 꾹 참고 또 등을 건드렸어. ‘달라고…….’ 니가 홱 돌아보더니 ‘씨발 새끼, 골통을 확 부셔 벌라.’ 라면서 내 얼굴에 샤프를 확 던지대.

샤프가 날아와 내 이마를 찍었어. 그때 난 상처가 지금도 이마에 점으로 남았지. 나도 더는 못 참고 벌떡 일어났어. 의자가 뒤로 벌렁 넘어갔고 우당탕 하는 소리에 교실 안의 애들이 전부 너랑 날 돌아봤지.

그땐 진짜 니 면상에 주먹을 날릴 작정이었어. 질 땐 지더라도 내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보여 주고 싶었거든.

근데 니가 더 빨랐어. 빠른 데다 정확했지. 니 주먹은 정확히 여기, 흔히들 관자놀이라고 부르는 ‘하(霞)’에 적중했어. 그 일격 한 방에 정신이 아득해지더라.

너무 아파서,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파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어. 요새 UFC 같은 이종 격투기 보면 상대가 다운되자마자 달려들어서 미친 듯이 펀치를 내리꽂잖아.

그때 니가 딱 그랬어. 그 끔찍한 고통 속에 무방비가 된 날 죽도록 두들겨 팼지. 그때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정말 어디 한 군데는 부러졌을지도 몰라.

그래도 한쪽 광대뼈가 퉁퉁 부어오르고 코피까지 터져서 도저히 그 자리에서는 수업을 받을 수 없을 지경이었어. 선생이 들어오기 전에 몇몇 애들이 후환을 막겠단 심사로 날 교실 맨 구석진 자리로 옮겼어.

좀 있다 과학 선생이 들어와서 수업을 시작했지. 그때 그 선생이 결혼도 안 한 아가씨였는데 수업하다 짓궂은 애들이 던진 농담에 운 적도 있을 정도로 유약한 사람이었어. 한마디로 너한텐 만만한 선생이었다 이거야.

수업이 시작되고도 난 너무 아프고 분해서 훌쩍댔어. 언젠간 너한테 꼭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넌 너대로 분이 안 풀렸는지 자꾸 나를 돌아봤어. 수업이 시작된 지 10분이나 지났나?

갑자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났어. 고개를 들었더니 책상 위로 올라가서 나한테 성큼성큼 달려오는 니가 보이는 거야. 책상 몇 개를 뛰어넘은 넌 그대로 실내화발을 쳐들고 내 정수리를 콱콱 내리찍었지. 솔직히 그때 난 무서웠어, 그 무모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살의가…….”

“하아, 나…… 너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그렇게 시시콜콜한 것까지 어떻게 다 맘에 담아두고 사냐?”

“그러게. 근데 살아 보니 기억은 의지에 반하는 경우가 많아. 잊고 싶은 기억일수록 더 또렷이, 오랫동안 뇌리에 남지. 나도 너랑 관련된 내 머릿속의 기억은 모조리 잘라내서 살처분하고 싶어. 근데 어쩌냐, 20년도 더 지난 그 일들이, 그 말들이, 그 고통이, 그 공포, 그 수치심, 그 모욕감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래, 그래, 병구야, 기억은 안 난다만 그날 내가 오바해서 진짜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풀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어?”

“풀고 안 풀고가 어딨냐, 다 지나간 일인걸. 그냥 오랜만에 널 만나니 옛날 생각이 나서 하는 얘기야.”

“그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서 그러는 거 아니까 별로 유쾌하지도 않은 옛날 얘긴 인제 좀 그만하자고.”

“들어 봐,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그 뒤로 넌 공공연하게 떠벌리고 다녔어. ‘난 첨에 저 새끼 싸움 졸라 잘 하는 줄 알았어. 근데 알고 보니까 좆밥이야.’

좆밥에게 긴장하고 좆밥을 견제했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 상했는지 그 후로 넌 정말 지독할 정도로 나를 괴롭혔어. 난 꼼짝 못하고 당하기만 했지. 널 볼 때마다 그날의 공포가 되살아났거든.

거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좆삐꾸’란 별명을 지어 주고도 모자라 패거리들이랑 심심풀이로 나를 갖고 놀았지. 그 일들을 시시콜콜하게 열거하고 싶진 않다. 그래, 다 철없는 애들 때 일이니까.

하지만 그때 내가 정말 죽도록 힘들었다는 말만은 해 둘게. 내 평생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나한테 진짜 악감정 많았구나, 너.”

“악감정? 악감정이 아니라 살의였지. 죽이고 싶었다니까? 상상 속에서 널 내가 몇 번이나 난도질한 줄 알기나 해? 카터칼을 들고 니 뒤통수를 보면서 니 목을 따는 상상을 수천 번, 아니, 수만 번은 했을 거야.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