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Dou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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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빗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침대가 억센 팔로 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 마냥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빗소리와 기억나지 않는 악몽, 어제 시작된 생리통이 겹쳐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새벽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 덕분에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는 또 병원비 때문에 앓는 소리를 했고, 내 신경질적인 반응에 거의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래도 결근은 싫었다. 진통제를 먹은 다음 꾸역꾸역 일어나 세수를 하고, 색조화장은 포기한 채 립스틱만 바른 후 옷을 입었다. 검은 스커트에 어울릴 것 같아 검은 우산을 챙겼다. 지하철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북적거렸고 남자 하나가 뒤에 붙어 슬그머니 내 엉덩이에 손을 가져다댔다.

우산 끝으로 남자의 눈을 찌르는 상상은 지웠다. 대신 뒤로 돌아 남자의 뺨을 때리고 싶었지만, 결심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남자가 하차해 버렸다. 놈들은 어디에나 있다. 수치심과 분노가, 안 그래도 곤두선 신경을 더 뾰족하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 뒷모습과 만났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안 좋은 몸 상태나, 전철의 치한, 엄마의 앓는 소리는 그 뒷모습에 비하면 너무도 현실적이었고, 그래서 사소했다.

역사의 플랫폼을 나와 회사로 이어지는 투명차양이 드리워진 아케이드 인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앞서 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중 유독 한 여자가 눈에 띄었다. 3, 40미터쯤 떨어져 있었음에도 화인처럼 뚜렷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오직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없는 것?

그 사람이 바로 그랬다. 머릿속으로 내 좁은 인간관계 안의 지인들을 하나하나 그 뒷모습과 엮으려 해보았지만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사람들의 사이로 언뜻언뜻, 어깨에 살짝 닿는 커트머리, 회색 시폰 블라우스, 검정 스커트가 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정수리에 떨어진 충격이 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녀와 나는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챔과 동시에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어디에서 보았는지도 떠올릴 수 있었다. 옷가게. 상점의 거울 속. 뒤태를 살피던 내 시선에 잡힌, 바로 나의 뒷모습. 상념들이 모두 손가락을 들고 홀로그램처럼 반짝이는 한 지점을 가리켰다.

‘더블.’

시선이 잠깐 흐트러진 사이, 그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됐다.

*

그 단어가 몰고 온 불안은 마치 징그러운 벌레처럼 피부 위를 기어 다니며, 하루 종일 나를 휘감았다. 은행에 도착하고 나서도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창구에서 세 번이나 연속으로 실수를 하고 컴퓨터의 지적을 받아 2시간 정직까지 당했다. 벌점이 작년 한 해의 총계보다 많았다. 과장에게 불려가 질책까지 받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말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잘못 본 것뿐이야. 그렇잖아? 요새는 더블이 출현하는 것이 아주 드물다고들 하잖아.

다들 떠들어대기는 하지만 실제로 과거에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고. 잊어버리는 게 좋겠어. 잊어버려, 피곤해서 착각한 걸 거야. 그렇게 다독이는 목소리로, 끈질기게 그것은 더블이었다고 주장하는 가슴 한편의 말대꾸를 억눌렀다.

하지만 퇴근시간이 될 즈음에는 스스로의 다독임도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누군가든 만나서 무언가든 이야기 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고, 약속은 없었지만 준영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그의 회사 앞으로 간다고 선언했다. 40분 후에 강남 31구역의 상업빌딩 앞에서 만난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이러니까 연애할 맛이 좀 나네. 만날 내가 졸라야 선심 쓰듯 만나주더니만 오늘은 무슨 심경의 대변화야?”

“내가 그랬어?”

“암요, 그러셨지요. 내가 연애를 하는 건지, 아니면 안 넘어가는 나무에 도끼질만 해대는 건지 헷갈린 때가 한두 번이었어야 말이지.”

늘 있는 투덜거림이었지만, 어쩐지 새로웠다. 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스스럼없이 그의 팔에 매달렸다.

“아니, 진짜 무슨 일이야? 손끝만 닿아도 질색팔색을 하더니. 오늘은 좀 이상한데?”

“이상할 거 없어. 어디든 들어가자. 빨리.”

그는 몇 마디 농담을 더 하면서 카페로 나를 이끌었다. ‘레몬트리’라는 카페는 한산했다. 내부에는 요새 유행하는 바닷물 홀로그램이 깔려 있었고 2층에는 과일나무 그래픽이 무성했다. 2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한동안 그가 잡담을 했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와인을 가볍게 마시고 입을 열었다.

“저기, 더블이란 거 있잖아. 어떻게 생각해?”

“응?”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이상한 주제를 끄집어내자 당황한 눈치였다.

“더블? 갑자기 그건 왜?”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잖아. 어딘가에 나랑 똑같은 사람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다니. 근데 그걸 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아니, 실제로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준영은 대답 없이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몸을 앞으로 조금 숙였다.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눈빛에 약간의 흥분이 어렸다. 그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서 말했다.

“이건 진짜 비밀인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더블을 본 사람이 있어.”

“진짜?”

“그래. 친한 직장 선밴데, 몇 년 전에 같이 출장을 갔었거든. 술한잔 하다가 그 선배가 잔뜩 취한 거야. 그 상태에서 나한테 자기 비밀을 전부 털어 놓은 거지. 아침에는 하나도 기억 못했지만.”

*

“어떻게 본 건데?”

“어렸을 때였대. 한 열 살쯤?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안방 쪽에서 뭐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는 거야. 크게 다투는 소리도 들리고. 방학이라서 집에는 자기랑 엄마밖에 없었으니까, 이상해서 가본 거지. 안방 문을 열었는데, 거기에 엄마가 두 명이 있더래.”

“두 명?”

“응. 하나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하나는 손에 피묻은 망치를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는 거야. 서 있던 엄마가 그 선배를 보면서 ‘아무 일도 아니니까, 가서 공부해.’라고 했다던가.”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준영은 웃으면서 내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실환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생겨도 정부가 잘 처리하잖아. 게다가 요새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하고. 크게 문제될 것도 없어. 연예인이나 정치인 관련 스캔들이나 루머는 많지만, 그것도 다 한 때고.

‘빅 슬립’ 이후로 강력범죄도 3배 이상 늘고 정신병원도 대호황이 됐다지만 우리는 그 사건을 직접 겪은 세대도 아니잖아. 뭐랄까, 실감이라는 게 없는 거지. 과거의 재난이라는 게 다 그렇지 뭐.”

“아침에 출근하는데, 내 더블을 본 것 같아.”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입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말을 충동적으로 뱉어냈다. 준영은 멍하게 내 눈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내 더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천천히 지워졌다. 내 눈빛에서 장난이나 농담이 아님을 읽어낸 것이다. 말이 없던 그는 씹는 담배를 꺼내며 미간을 구겼다.

“확실해?”

“……사실, 잘 모르겠어. 그냥 뒷모습만 본 거라서. 하지만 느낌이 그래. 그걸 본 사람은 알 거야. 가슴을 강하게 때리는 느낌이 있었어.”

준영은 담배를 씹으며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더니, 지갑을 꺼냈다. 그 안을 한참 뒤적이던 그는 플라스틱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이 번호 저장해. 잘 아는 선배거든. 연락해 놓을 테니까, 내일 퇴근하고 한번 들러봐.”

명함에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라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왠지 이럴 것 같았던 예감이 들어맞아 화가 나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게 가장 현실적인 접근 방식인지도 몰랐다.

“나, 미친 거 아니야.”

“수진아, 네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 잘 알잖아. 요즘에는 상담소에 안 가는 사람들이 드물어. 그냥 현대인의 일과잖아. 편하게, 잠깐 쉬면서 이야기 나누는 것뿐이야. 심각할 거 하나도 없어. 전부 예방하는 차원이니까.”

대학시절 동창인 현주가 생각났다. 현주는 ‘더블망상증후군’ 때문에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집 안에 틀어박혔다. 그 병은 누구에게나, 아무 조짐 없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현주가 중퇴한 이후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는데, 방 안에서 한발도 나오지 않던 그녀는 내내 불안해하며, 혹시 자기랑 이틀 전에 만난 적 없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면서.

나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명함을 휴대전화에 접촉시켜 번호를 저장하고 화장실에 간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요의를 느끼진 않았지만 그를 피하고 싶었다.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어.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잘 알았잖아. 나는 괜히 손을 씻고,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푸석푸석한 피부의 어딘지 낯선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뒤쪽의 칸막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응, 그래. 내가 내일 들를 테니까. 병원비는 너무 걱정 마.”

그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나는 얼어붙었다. 그것은, 내 목소리였다. 은행업무 때문에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녹음해 창구에서 활용했을 때 느꼈던 그 낯섦과 친근함이, 공포로 변질돼 진득한 액체처럼 등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천천히 뒤로 돌아, 목소리가 흘러나온 칸막이 쪽을 응시했다. 목소리가 이번에는 언성을 낮춰 몇 마디 더 속삭였다.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다만 내 것이라는 점은, 한 치의 다름도 없는 강수진의 목소리라는 점만은 확실했다. 내가 내 것을 알아보는 데에는 어떤 증거도 필요 없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가가서 문을 열어젖히고도, 그대로 도망치고도 싶었다. 정신 차려, 강수진! 확인, 그래 확인을 해야 해. 저 안에 정말 내 더블이 있는지, 아니면 그냥 잘못 들은 것뿐인지.

나는 석고처럼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달래서 한 발 앞으로 나갔다. 또 한 발 움직였다. 손을 뻗을 수 있을까?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을까? 저것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망설이며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물을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나오겠지, 저 안에서, 나와 똑같은 목소리를 가진 그것이. 머릿속이 물감을 엎지른 것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뒤로 돌아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카페를 나와 정신없이 뛰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낯설고 더러운 도심의 후미진 거리였다. 이슬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속에서 자꾸만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 허리를 숙이고 구역질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나는 한참이나 그렇게 있었다. 몇 방울의 눈물인지, 빗물인지가 내 볼을 타고 떨어져내려 거리의 조그만 물웅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

둘째 날

깨어났을 때는 오전 10시가 넘어 있었다.

카페에서 나온 뒤 어떻게 집에 돌아온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밤새 심하게 앓았고, 조금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미열이 눈 주위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와 침대에 느긋하게 누운 햇살을 보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더듬었다. 아마, 목요일이겠지. 그래, 회사. 전화부터 해야 해.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어제 가지고 나간 토트백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현기증의 틈새로 어젯밤 카페에서 뛰쳐나올 때 토트백과 우산을 놓고 나왔음을 떠올렸다. 준영이 챙겼을 것이라 추측하며 거실의 전화기로 가 버튼을 눌렀다.

네, 어디로 연결할까요? “회사.”

신호가 세 번 울리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화상연결은 하지 않아 모니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최 대리임은 알 수 있었다.

“네, 최 대리님, 저 강수진인데요.”

“아, 창구 쪽 수진 씨? 근데 웬일이야?”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결근했어요. 잠든 바람에 아침에 결근 확인 전화도 못 받은 것 같고요.”

잠깐의 침묵 뒤에, 큰 웃음소리가 나왔다.

“무슨 장난인지 모르겠는데, 그럼 아침조회 때 내가 본 수진 씨는 뭐야?”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잠깐 숨이 막혔다.

“여보세요? 강수진 씨?”

급히 버튼을 눌러 통화를 끊어버렸다. 요동치는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어지럼증 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모니터에 초조해 하는 준영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다. 버튼을 눌러 화상으로 연결했다. 준영이 휴,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빠르게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지고, 휴대폰은 받지도 않고. 혹시나 해서 집에 건 건데…….”

“아침에 사라졌다고?”

내가 거의 비명을 지르듯 반문하자, 준영의 눈이 두 배쯤 커졌다.

“그, 그래. 왜?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다 얘기해. 어제 내가 카페에서 없어진 다음부터.”

“무슨 소리야? 카페에서 없어지다니. 너 어제 나랑……, 그러니까 네가 그런 거 진짜 싫어하는 건 아는데, 너도 어제는 더 이상 싫은 눈치도 아니었고…….”

눈을 감았다가, 치켜떴다. 가슴 속에서 불꽃이 확 일어났다.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수진아?”

“같이 잤지. 그년이랑.”

“야, 너, 어제부터 진짜 이상한 거 알아?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나 너랑 장난으로 만나는 거 아닌 거 알잖아.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그건 내가 아니야! 아니라고!”

전화를 끊었다. 선도 뽑아 버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로 눈앞이 흐려질 지경이었다. 눈앞에 나의 더블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화장실을 나와 준영에게 간다. 술을 마시고, 더블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잡담을 나누다, 그와 함께 무인모텔로 간다. 섹스를 하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내 백을 챙기고, 나처럼 출근을 한다.

단 하루 만에 그것이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다음에는? 이제 뭘 하려는 거지?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은 나를 없애야만 자신을 인정받을 수 있다. 안절부절 못하며 거실을 서성였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더블에 대한 교육은 무용지물이었다. 그 교육은 모두 자신이 아닌, 타인의 더블을 목격했을 때의 이성적인 대처 요령에 대해서만 가르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의 더블이 나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어느새 밀물처럼 불어, 나를 완전히 뒤덮어 버릴 것이다. 시간이 없다.

신경이 모두 끊어진 것처럼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문득 그것이 내 토트백을 챙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시계를 확인하니 11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은행에서는 11시부터 2교대로 30분간의 점심시간을 주었고, 목요일은 내가 먼저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전화선을 꽂고, 내 전화기로 연결을 시도했다. 신호가 길게 이어지다가 정지했다. 침을 삼켰지만 넘기기가 힘들었다. 목이 바짝 말라 있었다.

“그래, 나야.”

어제 화장실에서 느꼈던 익숙한 공포감이, 기묘한 안락감과 함께 혈관을 타고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 나야? 무엇이든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평온한 나의 목소리가 현실감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당황하지 말고 기다려. 곧 갈게. 대신 도망가지 마. 그냥 전부 받아들여. 너의 전부를. 그리고 나의 전부를. 그럼 바빠서 이만.”

전화가 끊긴 것은 한참 후에야 알아챘다. 억눌린 비명이 집 안 가득 번졌다.

보건경찰국 43지서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층 로비에서 접수를 하고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자 안내원이 호출을 했다. 건네받은 플라스틱 키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 4031호를 찾았다. 1층보다 사람이 적어 방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사방이 막힌 아주 좁은 방에 의자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사물함처럼 생긴 방이었다. 의자가 바라보는 방향의 벽에 붙은 스피커에서 남자 목소리가 나왔다.

편히 앉으세요. 중간에 저희가 끼어드는 일은 없을 테니까 상담하실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하시면 됩니다.

피상담자의 기분을 편안하게 하려는 의도에 의해, 아마도 컴퓨터로 합성한 음성 같았다. 그것은 놈의 목소리와 비슷했고, 그 때문에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나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있었던 모든 일을 천천히 말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부끄러우면서도 가슴에 매달렸던 무거운 추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편에 있는 것은 신부가 아니라 무뚝뚝한 컴퓨터일 뿐이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이 의식이 더 성사(聖事)에 가까워진 것인지도 몰랐다.

오전의 통화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하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기다렸다. 1, 2분쯤 흐르자 예의 목소리가 다시 등장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잠시 침묵.

잘 알겠습니다. 1층 5번 데스크의 D열에서 잠시 기다려주세요.

순순히, 지시대로 했다. 1층으로 내려가 기다린 지 40여 분쯤이 지나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데스크의 안내원에게 항의를 하려 일어났을 때 내 번호가 불렸다. 이번에는 3층이었다. 공무원들의 일처리를 저주하면서 도착한 곳은 앞의 상담실보다 좀 더 넓었고, 정면으로 창문이 있었으며, 더불어 사람도 있었다.

쉰 살 정도로 보이는, 얼굴에 살집이 많은 남자가 ‘경위 박두영’이라고 쓰인 명패가 놓인 책상과 모니터 뒤에 앉아 서류를 넘기는 중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남자였다. 그는 방에 들어선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요 앞에 앉으시고요.”

어느 지방의 말투인지 알 수 없는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자리에 앉는 나를 흘끔 보고, 그가 말했다.

“몇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강수진 씨 맞으시죠? 27세. BGI은행에 근무하시고. 맞으시지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하고요. 여기, 일단 제 명함부터 챙기시고.”

명함을 건네받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리저리 가라고 하는 게 더 짜증나던데요.”

“그것도 참 그렇지요. 하루에 여기 와서 상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평균 600명도 넘지요. 그 정도니 일일이 다 대면진술을 받을 수도 없고요. 할 수 없이 컴퓨터로 걸러내야 되거든요. 망상증후군이랑 실제 사건 진술이랑 구별을 안 하면 일이 끝도 없이 쌓일 판이라.”

“그래서, 저는 망상증후군처럼 안 보였나요?”

“어디 보자…… 예, 뭐 일단 컴퓨터로 분석한 결과로는 그렇지요. 신뢰도는 92퍼센트 정도고. 망상증후군 특유의 징후도 안 보이고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올라오신 거지만.”

“그럼 경찰에서 대책을 세워주는 건가요? 저는 어떻게 해야 되죠?”

남자는 턱밑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다가, 내 눈을 한 번 보고,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글쎄요, 보통 더블 관계 사건은 72시간 내에 종결이 되는데요, 일단 강수진 씨가 원하시면 중앙보건국 쪽에서 심리상담사를 붙여줄 수도 있고…….”

“저기, 잠깐만요.”

나는 화를 삭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제 진술 다 들으신 거 맞아요? 나한테 온다고 했단 말이에요! 네? 당장 오늘 제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심리상담사라뇨?”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뭘 원하시는 거지요?”

“네?”

“경호원이라도 붙여드려야 된다, 그런 말씀이신가?”

“경찰이잖아요! 어떻게든 보호를 해주셔야……”

“누구한테서, 누구를 보호하지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박두영 경위는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설령 아가씨 말이 전부 다 맞다 치고요. 그래서 아가씨의 더블이 아가씨를 뭐 어떻게 해보려고 한다고 해도 말이지요, 저희로서는 둘을 차별해야 될 이유가 없지요. 안 그렇습니까? 여기서 이렇게 화를 내는 아가씨가 혹시 더블이 아닌가, 저희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요.

특별법 제1조는 발생 시점부터 더블은 원개체와 동일한 사회적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지요? 둘은 구분이 불가능하니까, 아예 사회에서는 구분을 안 한단 말입니다. 순수하게 법적으로 말한다면 아가씨랑 접촉했다던 그 더블은 바로 아가씨 자신이란 말이지요. 자기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는 법은 없지요. 이런 얘기는 전부 아시잖아요?”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