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등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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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당하는 것은 최악의 일이지만, 저항하다 죽는 것도 권장할 만한 일은 아니다. 만약에 노예 생활이 몸에 맞는다면 그냥 적응해서 생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배자들은 노예들에게 관대했다. 나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원래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별다른 차별을 느끼지 못했다.

지배라는 말을 쓰는 것도 어쩌면 합리적이지 못했다. 전쟁이나 지배는 차별을 만들어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배당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행동지침이 발표되었지만, 차별이 없으니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방송에 나온 아나운서는 지구가 어떤 것에 지배당했으며 그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희극적인 사건. 사람들은 방송을 보고 웃었다. 뉴스를 잘 보지 않는 어린 아이들도 그 말을 듣고 웃었다. 그 사건은 사람들의 술안주거리가 되었고, 나 역시 술집에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인터넷에도 장난스런 글이 올라와서 온통 게시판을 어지럽혔다. 늘 듣던 지구라는 말이 지배라는 단어와 함께 쓰이자 사람들은 어색해했다.

하지만 다시 방송이 나왔고, 같은 내용이었으며, 아나운서는 웃지 않았다. 방송국에는 전화가 폭주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아나운서가 화면을 통해 말했던 정보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방송국도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다.

곧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 나섰다. 그리고 아나운서가 했던 얘기를 반복했다. 덧붙여서 지배자들이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냥 행동지침에만 따라달라고 대표자는 말했다.

곧이어 다른 나라의 대표들이 그들의 언어로 같은 말을 내뱉는 모습이 방송되었다. 그들이 덧붙인 말도 같았다. 인터넷 게시판은 혼란스런 글들로 가득 찼지만, 현실은 의외로 조용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신문은 더 이상 이 사건에 대해 논평하지 않았다. 단지 아나운서의 말, 대표자의 말을 그대로 적어놓은 광고를 한 면에 실었을 뿐이다. 커다란 사이트에서도 그 일을 공론화 시키는 것을 자제하는 눈치였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정말로 지배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작은 사이트들을 찾아다니며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나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주위에 생긴 일을 말해 주었다. 작은 시위가 있었고,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정부에 항의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그들은 항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지배자의 방침이어서 어쩔 수 없다는 말과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아나운서가 처음 지배자의 지시를 발표한 지 29일이 지났고, 대표자들이 말을 한 지 28일이 지난 날, 우리에게 소포가 배달되었다.

소포에는 통이 들어 있었다. 항아리 모양의 검은 통이었다. 겉은 매끈한 도자기처럼 생겼고, 광이 나는 왁스가 칠해져 있었다. 사람 얼굴보다 5센티미터 정도 커 보이는 통은 화분으로 쓰기에도 적절치 못해 보였다. 방송은 통의 사용법에 대해 말했다.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아나운서는 통 속에 얼굴을 넣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게 될 일이라고 했다. 아나운서는 통에 대한 설명을 계속했다.

첨단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는 복잡한 기계다. 얼굴을 넣으면 첨단 장치들은 파란색 눈을 뜬다. 얼굴 골격, 눈 속의 핏줄 등을 분석해서 정보를 지배자의 중앙 정보 관리국으로 보낸다. 사람들을 관리하기 위해 지배자가 고안한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아나운서는 말했다.

경보가 울렸을 때나 밤 12시에 얼굴을 넣지 않는다면, 바로 탈영자 취급을 받는다고, 꼭 지켜달라고 당부까지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배자의 뜻에 따라 처벌당할 것이라 했다.

나라의 대표자가 통에 얼굴을 넣는 장면을 스스로 연출했다. 사람들은 대표자가 무릎을 꿇는 장면을 봐야 했으며 비참한 자세로 얼굴 전체를 통 속에 넣는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야 했다.

사람들은 분개했다. 인터넷은 폭주했으며 큰 소리로 선동하며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이 굴욕에 대항한 행동지침을 말해 주기를 바랐다. 지배자에 맞서서 뭔가를 하자는 말이 흘러나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규방송은 변함없었고, 간간이 화면 밑쪽에 통에 머리 넣는 것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말만 깜빡거렸다.

“지배자란 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면서 언제까지 이렇게 무릎을 꿇고 통에 얼굴을 넣는 한심한 짓을 반복해야 하냔 말이야. 도대체 이놈의 세상이 어떻게 된 거냔 말이야!”

아버지는 실체가 없는 상대를 향해 욕을 해댔고, 난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급기야 분을 참지 못한 아버지가 통을 땅에 내리치려는 자세를 취했다. 우리 가족은 묘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통이 깨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내 주저하더니 통을 내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성급하게 경거망동하는 것 보다 일단은…… 그들의 말에 따르며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굴욕감이 찾아들었고 깊은 주름이 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아버지를 조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 어딘가에는 통을 깨뜨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분명히 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글을 봤다. 다음날 경찰이 그를 연행했고, 다시 보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신문이나 방송은 더 이상 통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통에 얼굴 넣는 생활을 하며 6년을 지냈는데, 아직 경보가 울린 적은 없었다. 적어도 12시까지만 집에 들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었고, 차라리 규칙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어 편리한 점도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통에 얼굴을 넣는 일에 익숙해졌다.

하루는 친구들이 학교 앞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얘기를 했다. 학교 앞 도로에서 벌어진 일이었고, 사실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축제 계획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다른 모든 생각은 하얀 백지처럼 사라졌다.

대학가 길거리에 땅거미가 길게 늘어지자 좌우에 늘어선 상점들은 하나둘 불을 켜기 시작했다. 나는 후배와 함께 밥을 먹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이었고, 하늘이 좀 흐린 것이 기분 나빴을 뿐, 다른 징후는 없었다. 살인이 일어나기 좋은 그런 시각도 아니었고, 불들이 환하게 길가를 밝히고 있어, 마땅한 장소도 아니었다.

살인 사건의 피의자인 남자는 키가 컸으나 광대뼈가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낼 만큼 말랐고 단발머리였다. 보통 사람은 소화하기 힘든, 언뜻 보면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눈동자가 깊고 어두워서 음침했다. 오랫동안 어둠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상대에게 각인시키는 그런 눈이었다.

남자의 팔에 붙잡혀 있는 여자는 축 늘어진 채 목에서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아직도 심장이 헐떡이는 여자의 목을 짧은 단도로 계속 그어댔다. 목이 절반 정도 잘려졌지만 남자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상점의 불빛 앞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어느 서양화가의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은 느낌. 주저앉아 버린 여학생들도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무도 살인자를 말리지 못했다.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남자의 단 한마디였다.

“나는 지배자의 명령을 받았다!”

지배자.

그는 지배자의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소리쳤다. 사람들은 그 말에 굳었고, 아무도 다가서거나 여자를 구해줄 용기를 내지 못했다. 지배자라는 존재를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모두 지배당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남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모른 척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지배자와 관련된 사항에는 그렇게 행동하도록 몸에 배어버렸다.

피는 보도블록 위를 물들이고, 여자는 괴상한 자세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남자는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곤 재빨리 골목으로 사라졌다. 남자가 사라지자 비로소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는 사람들이 보였고, 그 중 몇 명은 경찰서의 번호를 눌렀다. 나는 그대로 지나쳐 학교 정문을 통과해 동아리 방으로 향했다.
“넌 그냥 보고만 있었다고?”

스노보드 장비들이 창가 쪽으로 흉물스럽게 기대어 서 있는 동아리 방에서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몰아세웠다.

“어쩔 수 없었어. 지배자의 명령을 받았다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거짓말인 게 당연하잖아. 설마하니 지배자가 길 한 가운데서 살인을 하라고 시켰겠어?”

보도블록 바닥에 뿌려진 피가 엉겨서 내 머리 속의 혈관들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조금 전의 영상이 떠나질 않았다.

“거짓말일 것이 당연하다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네가 지배자에 대해 아는 게 뭐가 있는데? 매일 통 속에 머리를 넣고 잠자는 건 상식적인가? 지배자가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을 계획하고 시키더라도 우린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어. 우린 지배자의 실체조차 알지 못 한다고.”

분노했던 친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에는 대항할 방법이 없어. 확신이 없으면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하지. 너 오늘 통 속에 얼굴 넣지 않을 수 있어? 그렇게 못하잖아. 확신이 없으면 나약해질 수밖에 없어.”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후배는 걱정스러울 정도로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는 후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동아리 방을 나와 학교 정문을 나섰을 때 거리에는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하철로 향하는 도중 살인이 일어났던 장소를 지났으나 컴컴한 어둠에 묻힌 핏자국을 제외하면 사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통 살인 사건 현장에 남겨지는 하얀 테두리 그림조차 없는 걸 보면 경찰이 다녀갔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사람들은 그 길 위에서 태연하게 웃고 떠들어댔다.

지하철의 한쪽 유리창에 기대어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 모습이 투영되던 컴컴한 유리창은 이내 광고판의 밝은 불빛들로 가득 찼다. 옆에 서서 수다를 떨던 몇 명의 여고생들이 역에서 내리고 대신 니코틴 냄새를 잔뜩 풍기는 남자가 타더니 내 옆으로 섰다.

무척 피곤해 보이는 남자는 회색 양복에 서류가방을 돈 가방이라도 되는 양 꼭 붙들고 서 있다가 이내 문과 좌석 사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남자의 굳게 다문 입에서 흘러나온 깊은 한숨소리가 벽에 붙은 TV 광고 소리에 섞였다. 그 숨소리 끝에는 영락없이 술 냄새가 걸려 있었다.

전차가 흔들릴 때마다 남자도 흔들렸다. 자기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보였다. 남자가 집으로 돌아가면, 그의 아내는 술 취한 남편의 얼굴을 통 속에 넣기 위해 낑낑댈 것이 뻔했다.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살인 사건이 다시 생각났고, 살인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곧 사라지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동아리 후배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동아리 후배는 살인자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살인 사건 자체에 대한 두려움도 아닌 것 같았다.

실체가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요즘 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부쩍 자주 보았다. 지배자에 대한 말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 희극을 연극하는 배우들처럼 어색한 웃음이 나타났고, 그 피부 안쪽에는 두려움을 꼭꼭 숨겨두고 있었다.
4년 전, 그 술자리에서도 사람들의 표정은 오늘 본 동아리 후배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대학에 갓 들어왔을 때였고, 대학의 구석구석은 지배자에 대항하기 위한 비밀 단체들이 결성되어 있었다. 어느 동아리나 지배자에 대해 분개하는 그룹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나는 친구를 따라 스노보드 동아리에 들어갔고 선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막노동으로 4년간의 학비를 벌었다는 깡마른 체구의 선배는 소주를 들이켜자마자 지배자에 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너도 매일 통 속에 얼굴 집어넣어? 하긴 너무 당연한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지도 않았을 테지.”

선배가 통 얘기를 꺼내자 주위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향했다. 누군가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그들의 눈 속에 그려져 있었다. 깡마른 선배는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 있었고, 감정이 격앙되어 있기도 했기에 충분히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처음에 통이 배달되어왔을 때, 당연히 난 지시에 따르지 않았어.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치고 다녔지. 친구들도 나처럼 그런 명령에 따르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선배는 날 응시했다. 그의 눈 밑으로 짙은 다크서클이 도드라졌다. 난 반쯤 채워진 소주잔을 비우고 잔을 선배 앞으로 내밀었다. 소주잔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졌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선배가 열기를 뿜으며 말했다.

“통이 배달되고 며칠 지나서 동식이란 놈이 없어지더군. 나랑 가장 친한 놈이었는데. 고등학교도 같이 나왔고 대학도 같이 오고 스노보드 동아리도 같이 들어왔지. 그런데 보드 시즌이 돌아오기 직전에 사라져 버렸어.

당연히 경찰에 신고했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경찰도 어쩔 수가 없다는 거야. 그게 말이나 돼? 사람이 사라졌는데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 경찰서에 가서 난리를 폈지.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해결되나?”

조금 시끄러운 음악이 나왔지만 선배의 목소리는 반대로 작아졌다.

“며칠 지나서 또 한명이 사라졌어. 정현이라고 후배인데 학교에 안 나오기에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정현이 어머니가 더 난리를 피우시는 거야. 내 아들 어디 갔냐고. 느낌이 안 좋았어. 왜냐하면 동식이 사라질 때하고 상황이 너무 비슷했거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고 소지품도 다 그대로 있고. 말 그대로 증발해 버린 거야.”

“오빠, 제 친구도 그 당시에 그렇게 없어졌어요.”

유정이 선배의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유정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자기 소개 때 아역 배우를 했다고 해서 학생들의 환호를 받았다. 내가 보기에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여서 유정이 출연했다는 영화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유정이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새벽 1시 30분 정도였는데, 그 애 엄마한테서 전화가 온 거예요. 같이 독서실에서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서. 우린 그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고 밤 11시 30분쯤 함께 나왔거든요. 그게 그 친구를 본 마지막이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그 친구가 보이지 않더라고요. 정말 기분이 나쁜 건 아무도 그 친구의 실종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거였어요.”

유정의 말 중간에 선배는 잔을 비웠다. 부대찌개가 부글거렸고 위에 올려진 햄과 야채들이 들썩거렸다.

“사실 난 지배자가 나타난 초창기만 해도 통이 없었어. 잠잘 때 머리를 넣으라는 지시와 함께 통을 배달 받은 날, 그걸 한강에 던져버렸거든. 당연히 통에 머리를 넣을 수가 없었지. 그런 수치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어.

그런데 평소 지배자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던 친구 녀석들이 사실은 모두 통에 머리를 넣고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처음엔 배신감을 느꼈지.

그런데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어.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는데, 사라진 사람들은 통에 머리를 넣지 않았다는 거야. 급기야 내 주위에서도 가까운 사람이 둘이나 없어지자 생각이 달라지더군. 세상 무서운 거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가 잠시 말을 끊고는 자조적으로 웃다가 불쑥 내뱉었다.

“난 결국…… 친구 자취방에 놀러 갔을 때 통을 훔쳤어.”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