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이 있었다.

  • 장르: 호러
  • 태그: #공포 #하우스호러
  • 분량: 103매 | 성향: 어둠
  • 소개: 나는 맞은편 아파트 베란다에서 우리집을 바라 보고 있는 네명의 똑같이 생긴 남자들을 목격한다. 더보기

넷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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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겪었고, 시달리고 있는 일을 누구에게 말해야 할지도, 어디에 올려야 할지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 이야기의 형식을 빌려 이곳에 남겨봅니다.

 

처음에는 해괴한 발상 같이 여겨졌었지만, 막상 힘겹게 내뱉은 단어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문단으로 증식해 나아가는 걸 바라보고 있자니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곳의 성격상 내 글을 접한 누군가는 이걸 제법 정교하게 지어내 가상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평생 일기 한번 꾸준히 써본 적이 없는 나의 조야한 문장 때문에라도 여러분은 내 글을 이야기의 형식을 갖추는데에도 실패한 조악한 거짓말 덩어리로 여기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저에게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가 이글을 완성케 하는 동력은 가상의 독자로부터 받을 격려나 위로가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기 힘든 경험이 내 영혼에 깊숙이 남긴 상처.. 그 상흔을 어루만질 때마다 내면이 아닌 아득히 먼 곳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 끔찍한 동시에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한 비명과도 같은 고통의 감각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도록 채찍질한다고나 할까요?

 

언제인가 누군가에게 ‘이야기란 말하는 이의 입을 떠나고 나면 무엇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요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해준 것인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비명의 주인이 잠이든 내 귓가에 몰래 속삭여준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제 나름으로 이해하기로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여러분을 향해 던진 이 글이 내 손을 떠날 때는 솔방울이었을지 몰라도 여러분의 머리에 내려앉았을 때는 돌멩이가 될지 수류탄이 될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내 글이, 내 이야기가 여러분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었기를 바라봅니다.

 

장황한 서두는 이쯤에서 마무리 하고 본격적으로 이 일이 시작되었을 때를 되짚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인물과 그에 얽힌 사건이 있는 법이고 그 사건은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을지라도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되짚어 보면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었던 법이지요.

 

제 이야기의 시작은 이제 막 중학교 2학년이 된 제 아들로부터 시작됩니다.

 

1.

 

“아빠!”

 

아무리 집안이라고 해도 밤 11시에 이제 막 변성기를 벗어난 아들이 굵직한 목소리를 드높여 ‘아빠’를 찾는 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라도 섬뜩한 기분이 들것입니다.

 

특히나 방과 후 집에서는 일과를 물어보는 내 질문에 최소한의 단답식 대답만을 내뱉은 채 방문을 걸어 잠그고 게임을 하는지, 음악을 듣는지, 아니면 부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새로 발견한 놀이에 몰두하는지 알기 힘든 나이대의 아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면 말이지요.

 

그 나이대의 남자애들은 돌연 세상이 감추고 있던 비밀을 깨닫곤 하지요. 자기는 무적이라는걸, 자기를 두렵게 할 대상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걸 말입니다.

 

제 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까지 제게 가지고 있던 존중과 두려움은 어느새 억눌린 조롱과 경멸로 뒤바뀌어 있었지요. 그래서인지 세상 그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는 듯한 태도의 아들이 다급히 내지른 나를 찾는 소리가 너무나도 생경하게 느껴졌습니다.

 

분명히 안전한 집 안이고, 아들이 방 안에서 나를 다급히 찾아야 할 만큼 큰일을 당할 리는 없다는 걸 머리로는 깨닫고 있었지만 알 수 없는 본능이 나를 아들의 방으로 뛰어가게 했습니다.

 

“왜 그래?!”

 

서둘러 아들의 열린 방문으로 뛰어 들어간 내 눈에 처음 들어온 건 평소에 아들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몰두하던 게임 화면이 보이는 모니터 뒤로 활짝 열린 창문이었습니다.

 

나를 부른 아들이 좀 전까지 붙들고 있었을 게 분명한 마우스와 키보드에서 손을 뗀 채로 무언가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듯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 창문 말이지요.

 

또다시 알 수 없는 본능이 내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하는 걸 막아섰습니다.

 

“뭔데 그래?”

 

애써 여전히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들의 얼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다시 한번 물어봤습니다.

 

“창문 밖… 저기 맞은편 동 베란다요.”

 

그때는 창문 밖을 가리키는 아들의 치켜든 손가락 끝을 바라보기가 왜 그리 두렵게 느껴지던지…

 

어쩌면 그때 본능을 따라 창문 밖을 외면한 채 커튼을 치고 아들에게는 잠이나 자라고 호통을 쳤더라면…

 

하지만 강력한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내 시선은 아들의 손끝이 가리키는 창문 너머의 한 지점으로 향했습니다.

 

쌀쌀한 가을 밤공기가 내리깔린 어둠 넘어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불이 꺼진 베란다에 나란히 늘어선 네 명의 남자였습니다.

 

‘세상에, 다들 똑같이 생겼잖아?’

 

20층이 훌쩍 넘는 신축 아파트의 중간층 베란다에서 불을 끈 채로 우리 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네 명의 남자를 발견한 제 머릿속을 처음으로 강타한 생각이 저거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집과 맞은편 동 사이에 두텁게 내리깔린 어둠 너머에서도 네 명의 얼굴이 똑같다는 게, 모두가 똑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게, 키도, 체형도 서 있는 자세도 똑같다는 게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였습니다.

 

어쩌면 우습기까지 한 최초의 인상에 바로 뒤따라온 건 어깨 끝에서부터 팔 끝을 훑어 내려오는 듯한 서늘한 냉기와도 같은 감각이었습니다.

 

‘우리 집 바라보고 있잖아?’

 

아니. 사실 우리 집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건 그때도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인정하는 순간 애써 억누르고 있던 내 감각을 사로잡으려 하는 압도적인 공포감에 잡아먹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 깨달음을 부정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징표도 보이지 않는 광경에서 그저 고개를 돌리고만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리면 그들이 눈치를 챌 것만 같았습니다.

 

무엇을요? 제가 그들을 이제 막 발견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왜인지 그들이 그걸 알게 되면 큰일이 벌어질 거라는 선험적인 깨달음이 저에게는 있었습니다.

 

“밤늦었잖아. 게임 그만하고 얼른 씻고 자. 공부를 하든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시선을 방으로 돌려놓고 이미 나의 공포와 두려워해야 할 게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깨달음을 눈치챈 아들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뱉었습니다.

 

아들의 얼굴에 처음 떠오른 표정은 당황이었습니다.

 

아빠가 왜? 저걸 못 본 척하지? 왜 아무런 말을 하지를 않지? 왜? 왜? 두려워해야 마땅한 것을 애써 외면하지?

 

하지만 사춘기의 소년에게는 어느 정도 어른의 노회함과 간교함이 깃들기 시작하는 법이지요.

 

이내 제 의중을 파악한 듯 작은 경멸과 분노와 그보다 더 큰 안도가 뒤섞인 감정을 내뿜으며 제게 동조했습니다.

 

“…알았어요.”

 

저는 아들의 대답에 화답하듯 더는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뒤돌아 방을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자석 같은 강렬한 끌림은 물리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 내 시야에 들어온 건 네 명 중 가장 오른쪽에 서 있던 남자가 몸을 돌려 베란다 너머 집을 가득 메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었습니다.

 

 

2.

 

마루에 불을 환히 켜놓고 멍하니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포츠 뉴스의 현란한 하이라이트 영상도, 심야 뉴스 진행자의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도 제 눈과 귀를 사로잡지 못했습니다.

 

나는 무얼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처럼 자꾸만 시계를 바라보았습니다.

 

11시 10분을 넘어 15분 근처로 분침이 다가갔을 때 제가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굳게 닫힌 방문을 뚫고 흘러나오는 아들의 비명 말입니다.

 

아까와는 달리 아들이 조금 더 어렸고, 말수도 많았고, 좀 더 쉽사리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던 시절의 높고 찢어지는 목소리였습니다.

 

잠깐, 아주 잠깐 다른 방에서 잠들어 있는 아내와 딸아이가 깰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 뒤에 든 생각은… 부끄럽지만 소파에서 일어나기 싫다…는 거였습니다.

 

그냥 아들의 비명은 외면하고 해가 뜨면 밤에 무슨 일이었냐고? 모르는 척 물어보고 싶다….

 

어차피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이 집안에서 우리 가족에게 해를 가할 건 아무것도 없다….

 

뭐 그런 생각들 말입니다.

 

아들의 굳게 닫힌 방문 너머에서 내가 마주할 것에 대한 공포로 덜덜 떨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어 일어서는데 집안 기온이 순식간에 한 10도는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의식도 못 하는 사이에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습니다.

 

갑작스러운 부끄러움과 아들에 대한 보호 본능이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그제야 용기를 내어 닫힌 아들의 방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니 아들은 홀린 듯 창밖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습니다.

 

아들의 볼에도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흘러나온 눈물이 길게 자국을 남겨두었더군요.

 

쩍 벌린 아이의 입이 쉴 새 없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딱딱! 하는 불쾌한 리듬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와는 체격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아들을 품에 끌어안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아까와는 달리 분노가 치밀더군요.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지는 명확했습니다.

 

맞은편 동의 세 명은 여전히 우리 집을, 아들의 방 안을, 그리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잠깐의 당혹감 뒤에 바로 시선을 맞은편 동과 우리 동 사이에 있는 단지 내 공원으로 돌렸습니다.

 

아까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남자가 은은한 방범등 불빛을 찢어발기며 천천히 하지만 단호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우리 동쪽으로 걸어오고 있더군요.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아파트 단지 안은 기묘할 정도로 짙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절대로 그럴 리는 없었지만, 그남자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정적 속에서 유리를 때려대는 망치 소리처럼 커다랗게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고 있어요! 오고 있어요! 이제 곧 우리 집으로 올 거예요!”

 

아니. 절대 못 들어올 거고, 들여보내지도 않을 거다.

 

아들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까요? 하지만 그건 단지 제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저 자신도 쉽사리 확신하지 못하는 말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있을까요?

 

사실 애써 용기를 내보려 해보았지만 나 역시 바로 아들과 비슷하게 압도적인 공포에 사로 잡혀버렸습니다.

 

‘그들이 날 봤어! 나를 봤다는 걸 내가 알았다는 걸 눈치챘어! 오고 있어! 계속 걸어올 거야!’

 

공포에 떠는 피붙이를 품에 안고 있을 때만 가능할 법한 의지력을 발휘해서 저는 우리 집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내 시선이 그 느리지만 단호한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패막이라도 되는 양 말이지요.

 

자신을 가로막는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단지 내 공원을 걷고 있던 남자의 발걸음이 멈추어 섰습니다.

 

허공을 잠깐 부유하던 남자의 눈동자가 내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그 먼 거리에서도, 그 짙은 어둠 속에서도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이 뚜렷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작지만, 너무나 뚜렷한 파국에 대한 예감이 바로 뒤따라왔습니다.

 

시작되었다는걸, 절대 막을 수 없다는걸….

 

갑작스럽게 어처구니없게도 그들 네 명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다는 깨달음이 들더군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저와 눈싸움을 하던 남자의 입매가 작게 흔들렸습니다.

 

비웃음? 슬픔? 경멸?

 

그 무엇도 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 해답을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단지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정적은 귀를 찢을 듯 요란하게 울리는 엔진 소리와 비명을 질러대는 타이어 소리에 깨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소리를 낸 주범은 커다란 자동차였습니다.

 

눈 깜박할 새도 없이 숨 막히는 정적을 몰아내고 단지 내 공원으로 뛰쳐 들어온 자동차가 검은 옷의 남자를 덮쳐버리더군요.

 

비명 하나 없이 검은 옷의 남자는 보안등을 들이받고서야 멈춰선 시커먼 자동차의 형체 아래로 사라졌습니다.

 

아들의 눈을 가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전에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맞은편 베란다를 보니 나머지 세 명의 표정이 뚜렷이 보이더군요.

 

커다란 만족감으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띤 채로 그들은 등을 돌려 베란다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웅성거림과 함께 산발적인 불빛들이 아파트 단지 내 공원에 내리깔린 어둠을 군데군데 밝혀 주었습니다.

 

죽은 괴수의 시체와도 같았던 신축 아파트가 갑작스럽게 생명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직 입주가 마무리되지 않아 군데군데 비어있는 아파트가 그때만은 사람들로 꽉 찬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갑작스럽게 현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안도가 되더군요. 좀 전까지 그토록 두려움에 떨던 나 자신이 한심스럽게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그래. 아파트 주민 한 명이 밤 산책을 나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거다.

 

아들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도 쉽사리 답해줄 수 없었던 모호한 질문에 대한 뚜렷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경찰이나 병원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들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천천히 하지만 완강하게 내 품에서 벗어나더니 물어보더군요.

 

아들의 얼굴에 평소의 오만하고 반항적인 표정이 되돌아온 게 무엇보다 안심이 되었습니다.

 

여전한 혼란과 부끄러움의 흔적이 작게 묻어나오고는 있었지만, 그 역시 이내 사라질 게 분명해 보였습니다.

 

“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신고했을 거다. 밤이 늦었으니 이제 진짜 그만 자라.”

 

아들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아들과 나는 눈앞에서 목도한 공포를 애써 외면하고 던져진 질문에서 도망갔습니다.

 

3.

 

그날 밤 제가 쉽게 잠을 이루었는지 아니면 악몽에 시달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을 준비하는 아내에게 지나가듯이 어젯밤에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더군요.

 

모든 게 평소와 똑같은 아침이었습니다. 교복을 입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건성으로 밥을 먹는 아들의 모습도, 몇 주째 지저분하게 늘어지고 있는 시공업체의 인테리어 마무리 작업에 대한 아내의 불만도 여전했습니다.

 

평소라면 의미를 알기 힘든 질문을 엄마나 오빠에게 끝도 없이 늘어놓고 있을 딸아이만이 달라 보였습니다.

 

사실 그때는 딸아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명확해진다고, 지금에 와서야 딸아이가 입을 굳게 다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 그런 딸 아이 옆에서 식탁에서 혹시라도 흘러내려 오는 음식이 없을까 눈빛을 빛내며 끙끙대고 있었어야 할 우리 집 강아지 해피가 위축된 자세로 얌전히 엎드려 있었던 게 떠오릅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절제된 식탁의 풍경이 만족스러웠던 것도 같습니다.

 

인간의 기억과 감정이라는 것이 그토록 쉽게 변하고, 왜곡되고 잊히는 것이었던 건지….

 

하지만 딸아이의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 전날 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압도되었던 감정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의 여파였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4.

 

평소와 다를 거 없는 하루가 끝나고 퇴근을 하는 그 시간까지도 전날 밤에 그토록 나를 두렵게 했던 모든 것이 비명을 지르고 깨어나는 바로 그 순간 빠르게 잊히는 악몽처럼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마음속 깊숙한 곳에 묻어 두었던 일말의 불안감이 나를 평소보다 이른 귀갓길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서울의 직장에서 30여 분 정도 떨어져 있는 신도시에 있는 집이었지만 이른 퇴근길은 제 예상보다 더 막혔습니다.

 

서둘러야 한다거나, 다급하다거나 하는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습니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어젯밤 사고의 흔적, 쓰러진 방범등이 여전히 남아 있는 공원을 지나 집으로 향했습니다.

 

우리 아파트 단지의 지상층은 모두 공원이고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던 게 갑자기 떠올랐지만, 급발진 사고를 당했거나 음주 운전을 했거나.. 뭐 그런 경우가 아니었을까? 하고 스스로를 이해시켰습니다.

 

현관문을 열려고 보안키 패드를 켰는데 그제야 문의 잠금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나더군요.

 

그러니깐 그때까지 현관문은 닫혀만 있는 채로 잠금장치가 걸려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보안키가 작동해 문이 잠기는 아파트인데도 말입니다.

 

아침에 아내가 인테리어 시공업체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던 게 떠오르더군요.

 

이 사람들 또 뭔가 이상하게 건드려 놓고 갔나 보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습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고 아파트 내에 입주해 있는 집들의 불은 모두 켜져 있었는데 우리 집안의 불은 모두 꺼져 있었습니다.

 

어둠이 집어삼킨 거실에는 이상하리만치 서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어젯밤의 일들이 묻어 두었던 꿈의 영역에서 되살아나 현실로 침범해 오는 듯했습니다.

 

“왜 문도 안 잠가두고.. 불은 또 다 꺼놨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부러 큰소리를 내었습니다.

 

대답 대신 섬뜩한 기운이 발치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억눌러 참아야만 했습니다.

 

작은 발소리를 내며 나를 스쳐 지나간 해피의 뒤를 홀린 듯이 따라갔습니다.

 

거실 한가운데에 딸아이가 서 있더군요.

 

반가운 표정도, 인사도, 평소의 뜻 모를 단어들의 폭격도 없었습니다.

 

딸아이는 대리석처럼 반들반들한 무표정의 가면을 쓴듯한 얼굴로 물끄러미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마른침을 삼키고 거실의 불부터 켰습니다.

 

무표정의 가면을 쓴 딸아이가 어느새 몸을 돌려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딸아이의 시선에 잡아 먹힐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엄마는? 어디 갔니?”

 

굳게 닫힌 딸아이의 입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는 나를 쏘아만 보는 딸아이를 마주 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몸을 돌려서 안방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딸아이의 손이 치켜 올라가더니 아들의 방 쪽을 가리키더군요.

 

“저 밖에 있어요.”

“어디? 엄마 오빠 방에 있다고?”

 

딸아이의 입매가 누군가 위로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활짝 올라가더니 경쾌한 웃음이 그 사이로 터져 나왔습니다.

 

“아니 거기 말고! 더 멀리! 어디 말하는지 아빠도 알잖아요?”

 

아이의 천진한 질문에 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해피야. 아빠는 다 알고 있다니깐? 내가 아빠가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도 알고 있어.”

 

뭐가 그리 재미난지 딸 아이의 웃음은 그칠 생각을 하지 않더군요.

 

딸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기라도 한지 안방 문이 열리고 아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걸어 나오더군요.

 

순간 아내의 얼굴에도 딸 아이처럼 무표정의 가면이 씌워져 있을 거란 두려움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멍한 표정으로 나와 웃고 있는 딸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더군요.

 

낮 동안 시공업체에 시달려서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이 시간이 되었다는 둥….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한번 입이 열린 딸아이는 평소처럼 단어를 내 쏟기 시작했고 저녁 준비를 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아내가 주방에서 내는 소리가 작은 아이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화음이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냉기를 몰아내는 듯했습니다.

 

“유진이는 오늘 별일 없었어?”

“당신 출근하고 애가 평소답지 않게 창밖 구경을 하겠다고 떼를 쓰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열이 좀 올라서 병원 데려가려고 준비하는데 다시 멀쩡해져서 또 해피 괴롭히고 있더라고요.”

 

평소였다면 절대 내 입에서 튀어나오지 않았을 성격의 질문이었지만 아내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해 보였습니다. 대답에 이어진 것은 또다시 시공업체에 대한 끝도 없는 불평불만이었습니다. 하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