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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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아들은 이만하면 됐으니, 여우같은 딸 하나만 점지해주십시오…”

두 노부부가 바위 앞에서 손을 마주 비볐다.

그 흔한 쌀밥 한 그릇 없이 오직 정화수 한 그릇만을 둔 채 간절히 빌었다.

여우 한 마리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털이 희고 꼬리가 8개였다.

여우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가만히 노부부를 굽어보았다.

늙고 병들어 두 눈만 그렁그렁한 인간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아이를 바라니, 그 꼴이 우습고 가련했다.

치성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해가 저물자, 노부부는 그제야 여우고개를 나섰다.

서로를 부축하며 터덜터덜 돌아가는 뒷모습이 사무치리만치 쓸쓸했다.

여우는 그제야 정화수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비록 보잘것 없는 공물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우고개의 산신령이 용하다는 말만 믿고 천리 밖에서부터 찾아온 인간들이었다.

거뭇거뭇한 짚신은 귀퉁이가 거의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고, 걸친 옷도 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식을 원하면 삼신에게나 빌 것이지, 아둔한 인간이로다.’

아이를 점지하는 것은 삼신의 영역이었다.

제아무리 영물이라 한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우는 몸을 돌렸다.

그대로 고개를 나서려다가, 문득 미련이 남아 그 자리에 멈춰섰다.

노부부의 뒷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방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를 점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여인에게 수태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여우는 맑은 정화수를 들여다보았다.

하얀 털이 숭숭한 짐승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그는 이 모습을 버려야만 했다.

축생도의 악연을 끊고 곧바로 인간이 되어, 더 나아가 해탈하여 이 윤회를 끝내는 것이 그가 바라던 평생의 업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것이 999년, 앞으로 1년이 지나면 그는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저 1년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에게 1년은 억겁과도 같았다.

여우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정화수가 담긴 그릇에 입을 담가, 한 모금 목을 축였다.

공물은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

울긋불긋한 낙엽이 흩날리던 날, 부인은 아이를 낳았다.

보름달 같은 딸이었다.

발간 얼굴에 벌써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마치 여우처럼 어여뻤다.

부인은 따끈따끈한 아기를 안고 눈물을 글썽였다.

예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얻은 기적 같은 딸이었다.

온 집안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와 세 아들은 갓 태어난 아기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인이 건강한 것도, 어여쁜 딸이 나온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노부부는 이것이 하늘이 내려준 은혜라 믿었다.

그리고 그것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딸의 이름을 은혜로 지었다.

은혜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태어난 지 열흘이 되지 않아 벌써 몸을 뒤집었고, 한 달이 지날 무렵 일어나 앉아 몸을 가누게 되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는 법이 없었다.

세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글을 깨우쳤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에는 신묘한 일화로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느 가을, 첫째 아들이 은혜에게 목마를 태워준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발을 헛디뎌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은혜는 손바닥에 큰 상처가 났고, 아들은 팔에 얕은 상처가 났다.

그러나 은혜는 사람들이 도착할 때까지 엉엉 우는 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오라버니를 위로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비록 제가 더 크게 다쳤다고는 하나, 오라버니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하겠습니까. 게다가 피를 나눈 가족이 상처를 입었는데, 어찌 애통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일이 있은 후, 첫째는 크게 감동하여 은혜를 더욱 살갑게 대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노부부의 집에서 보살이 나왔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은혜가 보살이 아니라 요괴라는 소문도 간간이 마을을 떠돌았다.

노부부는 그런 소문을 못 들은 척하면서도 내심 마음에 담아두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은혜는 홀로 마당 산책을 나섰다.

연못에 뜬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터럭 하나 없이 곱고 맑았다.

그녀는 행복스레 웃으며 가만히 얼굴을 쓸어보았다.

비록 천년을 채워 인간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선행을 쌓아 집안을 일으키고, 인간으로서 어질게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등 뒤에 노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은혜를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렸다.

연못 너머에 노파 한 명이 서 있었다.

치렁치렁한 붉은 저고리가 풀을 먹인 듯 단정했고, 양손에는 풋고추와 자패를 들고 있었다.

은혜는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듯 능청스레 대꾸했다.

“제가 무엇을 잘못하였단 말입니까?”

“어찌 축생의 몸으로 인간의 몸에 들어간단 말이냐? 실성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느냐?”

“여우 같은 딸 하나만 점지해달라고 빈 것은 제가 아니라 그들입니다. 그 정성이 갸륵하고 인품이 좋아 잠시 딸이 된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체 어떻게 걱정을 안 한단 말이냐?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고 살 수 있겠느냐?”

“인간의 법도를 지키고 측은지심을 지키면 인간도 부처가 될 수 있고, 짐승도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들이 안쓰러웠으면, 진작 딸 하나 점지해주지 않고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모름지기 옳고 그른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 감히 하늘의 섭리를 거스를 수 있겠느냐? 너는 이 가문의 인간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그 책임은 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바란 인간들 또한 책임이 있습니다. 왜 모든 잘못을 저에게만 물으시는지요?”

“너는 영물이다.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그릇된 일을 바란다면 계도를 할 것이지, 무턱대고 들어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네가 그러고도 영물이라 불릴 수 있겠느냐?”

조금은 기세가 꺾인 목소리였다.

은혜는 싸늘한 눈으로 노파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방에 한기가 서리고,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노기를 꾹 눌러 참으며 노파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한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삼신입니다. 태어난 아이와 가정을 축복해주는 것이 당신의 역할 아닙니까? 그런 자애로운 신이 한낱 어린아이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으니, 그 모습이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 이상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설령 따진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이는 없었다.

그들 모두 나름의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삼신은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뱉었다.

“당분간 이 일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겠다. 허나, 혹여라도 이 집 사람들을 건드렸다가는 막중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니라. 그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해두거라.”

삼신은 훌쩍 몸을 일으켜 걷기 시작했다.

아차 하는 사이, 그녀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

열두 살이 되던 해, 은혜는 첫 달거리를 했다.

몸은 어느덧 호리호리하게 변했고, 얇은 두 눈은 마치 여우처럼 눈꼬리가 치켜졌다.

비록 아직 키는 작았지만, 벌써부터 아리따운 여인의 티가 물씬 풍겼다.

부부의 집을 들르는 사람 중 은혜의 아리따운 자태를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은혜는 점차 야위어갔다.

늘 기운이 없었고, 식사도 좀처럼 입에 대지 못했다.

안색이 파리하게 변해 방에만 틀어 박혀있는 일이 잦아졌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밥상을 허술하게 차려준 것도 아니고, 고된 일은 일절 시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은혜는 시름시름 앓으며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부부는 애가 탔다.

용하다는 의원을 불러 맥을 짚어보게도 하고, 침을 놓아보게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첫째와 둘째 역시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귀한 약초를 구해 먹여보기도 했고, 탕약을 손수 끓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보다 못한 셋째가 집을 나섰다.

번듯한 유교 집안에서 유일하게 무당집을 들락거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남몰래 동네 무당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녀는 노부부의 족보와 사주가 적힌 책을 쓱 훑었다.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흘렸다.

“참 묘합디다.”

“무슨 뜻입니까?”

“그 집안에 딸이 나올 수가 없는데, 어떻게 딸이 나왔나 모르겠습니다. 그 은혜라는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입니까? 외모는 어떻고, 어떻게 나왔습니까?”

“예쁘고 참하지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전국으로 치성을 다니다 얻은 자식입니다.”

“혹시, 그 아이가 여시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 순간, 무당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혹여 남이 들을세라 몸을 바짝 숙이고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듯 내뱉었다.

“그 아이가, 달거리를 한 다음부터 그렇게 되었다고 했지요?”

“그렇지요.”

“혹시 날음식을 먹여본 적 있습니까? 날고기를 좋아한다든지…”

“날고기는커녕 고기조차 입에 대지 않는 아이입니다.”

무당은 더더욱 몸을 낮췄다.

그리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쇤네가 보았을 때, 아무래도 그 아이는 인간이 아닌 듯합니다.”

“그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입니까? 그럼 은혜가 여우라도 된단 말입니까?”

“여시도 보통 여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몸을 빌어 태어날 정도면 보통 도술이 아니지요. 말하자면, 여시가 억지로 사람 몸속에 들어앉은 형국입니다. 어릴 때야 이럭저럭 속여 넘길 수 있어도, 여시가 날고기를 먹고 살아야지, 사람 음식을 먹고 살 수야 있겠습니까?”

“집어치우시오! 보자보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구려!”

“그러지 말고 부디 한 번만 들어보시지요. 지금 바로 장에서 날고기를 사다 먹여보십시오. 쇤네의 예상이 맞다면, 아이는 그걸 먹고 씻은 듯이 나을 겝니다. 만약 차도가 있다면, 복채는 그때 주십시오.”

————-

은혜는 한참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들고 있던 바느질거리를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반갑게 문을 열어 오라버니를 맞았다.

“은수 오라버니 오셨어요?”

“오냐, 장에서 너 먹을 것 좀 사왔다.”

“… 생간이로군요.”

은혜는 묘한 얼굴로 접시를 들여다보았다.

셋째는 은혜가 생간을 단박에 알아맞히는 것이 조금 신경 쓰였다.

그러나 이내 의심을 떨쳐내고 말을 이어갔다.

“생간이다. 보기 좀 거북하지?”

은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힘이 없어 보이던 평소와는 달리,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셋째는 그 모습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구운 고기조차 먹지 못하는 은혜가 이런 것을 입에 댈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권해보았다.

“네가 고기조차 입에 대지 않는 건 잘 알지만, 이게 다 네 건강을 위한 일이란다. 한 점만 먹어보지 않으련?”

“…”

“너는 아직 어리지 않느냐. 어린 불자들도 고기를 먹는데, 너라고 안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게다가 이것은 특별히 너를 위하여 죽인 고기도 아니다. 그러니 꼭 먹어주었으면 좋겠구나.”

은혜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착잡해 보이기도 했고, 어딘가 슬퍼보이기도 했다.

셋째는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먹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게로구나.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마. 먹든 먹지 않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셋째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을 나섰다.

그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은혜는 비로소 젓가락을 들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생간.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진저리를 칠 만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은혜는 서슴지 않고 젓가락을 들었다.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어보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혈기가 도는 듯했다.

그녀는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게눈 감추듯 한 접시를 모조리 비워내고는, 그제야 만족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살색이 돌던 입가에 새빨간 피가 번져 있었고, 파리한 얼굴에 혈기가 돌았다.

문틈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셋째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한 접시로도 모자라,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핥는 그 모습이 도저히 평소에 보던 은혜 같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뚜둑 하고 바닥 틀어지는 소리가 났다.

은혜는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놀란 두 눈동자가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