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한 번이면 인내를 면한다

  • 장르: 추리/스릴러, 기타
  • 태그: #야구
  • 분량: 131매 | 성향: 광기
  • 소개: 야구장에서 어떤 여자가 나에게 황당한 요구를 한다. 이 여자, 어떻게 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여자와 야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야구 보는 인간들은 왜 성질... 더보기

살인 한 번이면 인내를 면한다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야구장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말을 뉴스에서 접한 당신,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십중팔구 사고라고 여겼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누가 야구장에서 살인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겠나. ‘보통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곳이 이끼 가득한 어두운 골목길도 아니고, 5만 명의 인간들이 10만 개의 눈깔을 굴리며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는 곳이다. 그런데 살인이었다. 심지어 우발적인 살인도 아니었다. 바로 어제 야구장에서, 정확히는 샤크스 파크에서─Sharks Park. 서울 샤크스의 홈구장으로 중앙 전광판 위에 상어 대가리가 튀어나와있는 점이 상징이다─사람이 살해당했다.

 

무표정으로 대본을 읽는 앵커의 말에 따르면, 피해자는 20대 남성으로 원정석 3층 여자 화장실 두 번째 칸 변기 위에서 바지를 까고 엎드린 채 죽어있었다. 남자가 입고 있던 등번호 39번 유니폼은 피로 얼룩져있었고, 수십 번 칼이 들어갔다 나온 흔적으로 선수 이름 부분이 너덜너덜했다. 샤크스는 이날 역전패를 당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역전패를 이끈 주인공이 바로 등번호 39번의 베테랑 1루수였다. 그는 첫 타석과 마지막 타석에서 병살타를 치고 모두의 원성을 산 대역적이 되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뷰에서 그는, “죄송합니다.”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코를 훌쩍였다. 아마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선 코를 후볐을 것이다. 앞에 앉은 후배에게 던지는 아주 간단한 물음과 함께. 내일 선발 누구냐?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우선 여자 화장실에서 남자가 죽었다. 남자가 여자 화장실 두 번째 칸까지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이날 야구장에는 이목을 충분히 끌만한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없었으며─물론 마지막 병살타가 터졌을 때 곳곳에서 비명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나긴 했지만─비명소리는 경기가 끝나고 모두가 나간 뒤, 잠겨 있던 두 번째 칸을 열고 시체를 발견한 청소부의 몫이었다.

 

또한 범인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날 날씨가 제법 나빴고, 대략 5천 명의 관중이 몰려있는 현장이었다. 우선 화장실 쪽은 공수교대 때마다 북적거린다지만, 원정석 3층 여자 화장실은 꽤나 한산한 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지문이 가득했으며, 공교롭게도 사건이 일어난 화장실 입구를 살피던 34번 CCTV는 파울볼에 맞아 파손된 상태였다.

 

죽은 남자에게도 이렇다 할 단서가 없었다. 여자 화장실에는 왜 들어갔으며, 왜 잠겨있던 두 번째 칸에서 죽었는지, 바지는 왜 내리고 있었는지─어느 종합편성채널 토론회에선 희끗한 턱수염을 자랑하는 어느 원로가 “남자가 맥주를 과하게 마시고 취한 나머지 남자 화장실로 착각해 들어가서 볼일을 보던 게 아니냐.”라며 낄낄거리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등으로 오히려 의구심과 갈등만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경찰은 자살을 염두에 두었으나, 스스로 등에 칼을 꽂고 뒈질 수는 없지 않은가? 명백한 살인이었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살인이었다. 경찰은 이런 상황에서 범인을 찾아야 했다. 차라리 어두운 밤, 스탠드를 끄고 월리를 찾는 쪽이 더욱 쉬울 것이다.

 

그러니까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야구장에서 누군가를 죽일 생각 따윌 하다니! 지옥에 있는 스티븐 패덕의 멱살을 잡고 물어보라. 녀석은 아마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왜 하나만 죽여?”라고 누런 이를 드러낼 것이다.

 

물론 야구장에서 사람이 죽은 일은 여럿 있었다.

 

글로브 라이프 파크에선 아들을 위해 공을 받으려던 소방관이 난간 밑으로 추락해 천국으로 갔고, 결혼기념일을 맞아 다저스타디움에 방문한 노인이 파울볼로 인해 숨졌다. 터너필드에선 로드리게스가 대타로 나오자 야유를 퍼붓던 남성이 난간 아래로 추락해 명을 다했다. 뿐만 인가? 서울 고척돔에선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한 남성 관객이 죽었고, 일본 구마모토현에선 어느 고등학교 야구부원이 연습 경기 중 머리에 사구를 맞고 사망하는 등 야구장에선 생각 보다 사람이 많이 죽었다. 단지 살인 사건이 없었을 뿐이다. 물론 시도가 있긴 했었다. 워싱턴에서 60대 남성이 야구장에서 총기 난사를 저지른 바 있었지만, 공화당 서열 3위를 비롯한 몇 명의 사람이 다쳤을 뿐 아무도 죽지 않았고, 총을 쏜 등신만 바쁘게 죽어버렸다. (트럼프는 바쁘게 트윗을 날렸다.)

 

즉, 야구장은 비명조차 집어삼킬 테러가 어울리지, 고작 한 명 은밀하게 살인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장소란 이야기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이 샤크스 파크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문제는 야구가 오늘도 진행되어야 하는 점이었다. ‘고작’ 사람 하나 죽은 걸로 리그 전체를 스톱시킬 순 없었고, 샤크스는 제2의 홈구장이 없으므로 장소를 바꾸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샤크스 구단 측은 남자가 죽어있었던 화장실만 노란 테이프로 막아놨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팬들을 맞이했다. 우습게도 오늘은 만원관중이 예상됐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니 오히려 유명 관광지에 방문한 사람들 마냥 들떠있었다. 야, 저기서 사람이 죽었대! 오, 저기야?

 

그도 그럴 것이 샤크스에겐 중요한 경기였다. 오늘 이긴다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고, 지면 탈락, 곧바로 내년을 준비해야 한다. 그깟 플레이오프가 왜 중요한가? 샤크스에겐 중요하다. 샤크스는 지난 10년간 플레이오프에 오르지 못하고 바닥에만 머문, 그야말로 유사 야구팀이었다. 그런 팀이 모처럼 기회를 잡았다. 이런 경기를 집에서 볼 순 없지 않은가? 나는 구장 밖을 서성이는 암표상에게 비싼 값에 표를 건네받아 샤크스 파크로 들어왔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 또한 누군가가 이곳에서 살해당한 사실이 소름 끼치진 않았다. 중요한 건 오늘 경기다. 샤크스 파크에 들어서고, 그라운드가 보이는 순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그래. 야구는 야구장에서 봐야지.”라고 흡족해했다. 게다가 구하기 힘든 1루 측 프리미엄석이다. 거의 밀폐된 공간이고, 무선 충전이 제공되는 고급 테이블이 있으며, 짐을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다. 한 손에는 갓 튀긴 프라이드치킨과 1리터짜리 싸구려 맥주가 있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혼자 오셨나 봐요?”

 

어떤 여자가 내 옆에 앉기 전까지는.

 

‘젠장. 옆자리도 나갔나보군.’

 

야구장에 혼자 가게 되면 옆자리가 비어있길 바란다. 그래야 편하게 야구에 집중할 수 있다. 더구나 내가 앉은 1루 측 프리미엄석은 공식적이진 않지만, 사실 커플용이다. 지붕이 있고, 옆쪽으로 칸막이가 세워져 있다. 좌석은 딱 두 자리. 간질간질한 애정행각을 나누기에 적합한 자리다. 보통 이런 자리는 한자리만 나가질 않는다. 만약 한자리만 나갔다면, 남은 한 석은 공석이 될 확률이 크다. 당연하지 않은가? 누가 거의 밀폐된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과 단 둘이 있으려 하겠나.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내가 프리미엄석에서 딱 한자리만 달라고 했을 때 암표상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옆으로 앉게 된 것이다. 남은 자리를 ‘여자’에게 팔다니! 쓸데없이 사려 깊은 암표상 같으니라고.

 

순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남자들이 흔하게 하는 망상이다. 이름 모를 여자와 야구를 함께 보다가 눈이 맞는다. 경기가 끝나고 술 한 잔 하러 야구장 근처 술집으로 들어간다. 즐겁게 술을 마신다.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다시 근처 모텔로 들어가 격렬한 행위를 즐긴다. 이후 만남을 유지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갖고, 키우고, 늙어서 손주를 본다. 생각만으로도 헤벌쭉한 상상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조심해야 한다. 그래. 여자를 돌로 보자.

 

“잘 됐네요. 저도 혼자 왔는데.”

 

여자가 말했다. 나는 애써 “아, 예.”라는 건조한 대답과 함께 야구장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다.

 

“선수들 분위기가 나쁘지 않네요.”

 

여자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다리를 더욱 오므리고 엉덩이를 살짝 옆으로 옮겼다.

 

“프로잖습니까.”

“어머. 화나지 않으셨나요? 어제 경기 안보셨어요?”

“봤습니다. 그래서요? 1년에 100패를 하는 팀도 있는데요 뭘. 어제의 영광과 상처 모두 잊고 오늘을 시작하는 게 저들의 특기이자 의무입니다.”

 

조금 까칠하게 나가려는 내 목소리가 진중했다. 역시 나란 녀석은 목소리도 꽤 괜찮다니까.

 

그런데 여자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어제 일은 다르죠. 그건 잊어선 안 되죠.”

“살인 사건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럼 선수들이 검은 리본이라도 달고 왔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이죽거리자, 여자는 들고 있던 긴 가방을─야구 배트가 들어갈 정도로 길었다─테이블 옆으로 놨다.

 

“리본을 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 그러십니까?”

“네.”

 

뭐야 이 여자. 나는 미간을 슥 구기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내 시야 정면으로 샤크스의 간판타자가 캐치볼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손가락을 뻗더니,

 

“만약.”

 

간판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선수의 가족이었다면?”

“예?”

“어제 살해당한 남자요. 만약 저 선수의 가족이었다면? 예컨대 아버지이거나, 사촌이거나, 아들이거나 했다면 오늘 경기가 열렸을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 그대로예요.”

 

구긴 눈으로 여자를 살폈다. 분명 샤크스 유니폼이다.

 

“당신 샤크스 팬 맞습니까? 무슨 그런 가정을 해요?”

“샤크스 팬이라면, 이런 가정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인가요?”

 

여자는 생글생글 웃는 표정이었다. 나는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요. 샤크스 팬이 아니더라도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소리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습니다.”

“그냥 한 번 생각해보자는 거죠. 진짜로 죽는 것도 아니고.”

“선수에게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행여나 들을까 걱정입니다.”

“저 선수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우리 팀 간판 아닙니까.”

“그 간판이 어제 9회말 동점 찬스에서 병살을 쳤죠. 덩치에 안 맞게 장타는 없고, 출루는 잘하지만 발이 느려서 별 도움도 안 되고요. 저걸 보세요. 캐치볼조차 제대로 못하다니!”

 

공을 놓친 등번호 39번이 실실 쪼개면서 뒤뚱거렸다. 이내 선수들은 경기 준비를 위해 각자 자리로 움직였다. 나는 샤크스 간판타자에게 머물던 시선을 돌려 여자를 쏘아봤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어제 죽은 사람이 저 선수의 가족이었다면?”

“대답하고 싶지 않습니다.”

“보기보다 과묵한 성격이신가 봐요.”

“제가 사람을 가리는 성격입니다.”

 

내가 다시 이죽거렸다. 여자는 내 말뜻을 못 알아들었는지 여전히 생글생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야구 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죠. 스포츠라는 건 인간에게 못된 심성을 심어주곤 하지만 야구는 특히 그래요. 야구를 보다보면 성격이 더러워지죠.”

“그거 참 재밌는 소리군요. 그래서 성격이 더러우신가봅니다?”

 

내 물음과 동시에 국민의례가 진행됐다. 여자는 벌떡 일어서서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멀리 태극기를 바라봤다. 화가 났나보군. 이제 말 걸지 않겠지. 나는 흡족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다. 오늘따라 태극기가 멋지게 펄럭인다. 엄숙한 멜로디가 끝나면서 관중들의 박수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시작이다. 오늘 경기는 분명 이길 것이다. 이겨야만 한다.

 

그런데 여자가 멈추지 않고 입을 움직인다.

 

“야구 보는 사람들이 높은 확률로 괴팍한 이유를 알려드릴까요?”

 

자리에 앉은 여자의 말투는 천연덕스러웠다. 짜증나는 여자로군. 나는 잔뜩 미간을 구기고 여자의 말을 무시했다.

 

“그쪽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요.”

 

무시.

 

“그러나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는 점에선 변함없지요.”

 

또 무시.

 

“이번 살인 사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항이고요.”

“그게 뭔데요! 도대체!”

 

끝까지 무시하려고 했으나 참을 수 없었다. 야구 보는 사람들이 괴팍한 이유 따위야 알 거 없으나, 여자가 언급한 살인 사건이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좋아요. 그렇게 반응을 하셔야지. 이제 곧 야구는 시작하고,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없으니까요. 오늘 선발 투수는 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들이라 7회, 적어도 6회까진 순식간에 지나갈 겁니다.”

“예언가 납셨군. 토토나 하지 그래요?”

 

이번엔 대놓고 비아냥댄다. 그래도 여자는 변함없어 보인다.

 

“아쉽게도 저는 돈에 관심 없어요.”

“역시 제정신이 아니로군.”

 

이제는 아예 돌직구를 날렸다. 더 이상 말 걸지 말라고! 그러나 여자는 내 말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한 웃음을 유지하고 있다.

 

“이제 보니 과묵하지 않고 직설적이로군요. 맞아요. 이 세상에 야구 보는 인간들치고 제정신인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 말이 좋아요. 그런 아이러니함이 바로 야구의 꽃이니까요.”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야구는 왜 인간을 괴팍하게 만드는가.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면 재밌지 않겠어요?”

“친구랑 하시지 그래요? 아, 미안합니다. 없겠군요. 그러면 인터넷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키보드로 두들기세요.”

“뭐 하러 그래요? 옆에 이렇게 좋은 대화 상대가 있는데.”

“나 원 참. 당신이랑 그런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요.”

“그럼 어떤 주제로 대화하고 싶으세요?”

“글쎄요. 어떻게 하면 당신 입을 막을 수 있는가 정도?”

 

내가 피식 웃어보였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 요구를 들어준다면 이룰 수 있겠군요.”

“요구가 뭡니까?”

“나를 죽여주세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여자를 빤히 바라봤다. 여자는 여전히 생글생글했다. 이 여자,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 심판의 “Play Ball!” 소리가 우렁차게 퍼졌다.

 

야구가 시작됐다.

 

“죽여 달라고요? 이유가 뭡니까?”

“간단해요. 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러지 마세요. 목숨은 소중하게 여겨야죠.”

 

나는 순간 아차 했다. 살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게 훈계식으로 이야기하다니! 그런데 여자는 전혀 불쾌하거나 어두운 기색 없이 씩씩하다.

 

“그래서 저는 살해당하는 걸 선택하는 거예요. 살해라니! 이 얼마나 황홀한 말인가요? 특히 ‘살(殺)’이라는 단어가 그래요.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야구에도 있잖아요. 병살, 보살, 삼중살…… 누군가를 죽이는 스포츠인 거예요! 정말 해로운 스포츠 아닌가요? 하지만 저는 야구를 참 좋아해요. 그래서 ‘살’이라는 단어에 더 애정이 가요. 살.”

 

아무래도 미친 여자 같았다. 정말 짜증나는군. 지금 야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듣고 있으니 절로 미간이 구겨진다.

 

“그럼 자살이나 하지 그러세요?”

“자살은 다릅니다. 그건 무섭고 아주 이기적이죠. 생각해보세요.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의 그 두려움. 그리고 내가 죽고 나서 내 시체를 처리해야할, 예컨대 모텔 주인이나 구급대원들에게 못 볼꼴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럴 순 없죠.”

“나 참. 살해당하는 건 두렵지 않다는 겁니까? 그리고 살해당하면 당신 몸뚱이가 멀쩡하답니까?”

“아니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자살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거예요. 자살보다는 살해당해서 모두에게 의문을 남기고, 기자가 바쁘게 취재하고, 경찰이 움직이고, 부검의가 내 몸을 해체하고, 시민들이 공분하여 제도를 개선하는 등 모두가 바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는 겁니다. 물론 자살도 비슷하게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보이겠지만, 살해에 비하면 턱없이 미약한 행위죠.”

“저기 미안한데 조용히 좀 해주실래요? 야구 좀 봅시다.”

“야구장에서 조용히라니! 무슨 도서관 오셨나요? 저기 응원단석 사람들을 보세요. 이미 이곳은 조용하려야 조용할 수가 없는 공간이라고요.”

 

떼거지로 몰린 응원꾼들의 응원구호가 시끄럽게 울렸다. 원래 이정도의 소음이었나?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에 나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쪽만 조용히 하면 저는 야구에 집중할 수 있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죽고 싶은 걸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발 딴 데서 알아보쇼.”

 

그사이 우리 선발투수가 1회초를 정리했다. 젠장, 제대로 보질 못했다.

 

“단 10구만에 삼진, 삼진, 유격수 땅볼이었어요. 역시 우리 에이스답죠?”

“그쪽 때문에 집중을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제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편하게 야구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고작 야구 편하게 보자고 사람을 죽입니까?”

“네. 야구는 그럴 가치가 있어요. 그리고 야구 보는 사람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자질이 있고요.”

“어이가 없군.”

“어때요? 그쪽은 남자니까 누군가를 죽이기에 힘이 부족하진 않을 거예요. 게다가 저는 연약한 몸을 가진 여자랍니다. 간단한 일이죠. 땅볼이 나왔을 때 병‘살’을 만드는 것처럼.”

 

여자가 ‘살’에 악센트를 주며 말했다. 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기요. 저는 그쪽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역시 죽일 수는 있다는 말이로군요?”

“그, 그건……”

“괜찮아요. 살인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보통 살해라는 건 자기부정으로 시작하죠. 그 자기부정이라 함은 착각이나 자위를 뜻하는 것이고, 지금 그쪽은 착각에 가깝군요.”

“그럼 제가 당신을 죽이고 싶은데 아니라고 착각하는 중이란 말입니까?”

“맞아요. 지금 당신 속에서 스멀스멀 기생하는 살인에 대한 욕구를 당신은 느끼질 못해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늘 본능을 안에 지니고 사는 것처럼.”

“좋아요. 그렇다고 칩시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있다고 해도 제가 당신을 죽일 일은 없어요. 저는 인간이니까요. 우리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을 죽여선 안 된다. 그런 규칙을 만들고 따르면서 살아왔어요. 본능이요? 이보세요. 우리 인간들이 어떻게 이만큼 발전했겠어요? 그 본능을 억누르고 앞서 말한 규칙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한 둘 입니까? 하지만 대다수가 평생 동안 살인이라는 행위를 저지르지 않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맙소사! 야구를 보는 사람이 미래를 단정 짓다니! 옳지 못한 태도입니다.”

“나 원 참. 미래를 단정 짓는 게 뭐가 어때서요? 그리고 그게 야구랑 무슨 상관이에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요기 베라의 명언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건 야구고요.”

“아니요. 그렇게 간단하게 지나갈 명언이 아니에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은 어디서든 적용되는 말입니다. 지금 여기서도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제가 당신을 죽일 때까지 짜증나게 굴겠다 이거로군요?”

“이제 살짝 짜증을 느끼시나 봅니다.”

 

여자가 히죽 웃었다. 나는 기가 찬 한숨을 내뱉고 그라운드를 응시했다.

 

샤크스의 공격이 시작됐다.

 

“솔직히 당신 짜증나긴 해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한들 제가 당신을 죽일 일은 없습니다.”

“이유가 뭐죠?”

 

여자의 물음에 나는 여자를 다시 바라봤다.

 

“이유요? 굳이 듣고 싶으십니까?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요! 제가 당신을 죽인다고 얻는 게 뭡니까? 은팔찌와 나라에서 주는 콩밥정도겠죠. 그걸 얻자고 살인을 해요? 제가 미쳤습니까?”

“그럼 당신은 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가요?”

“없어요. 뭔가를 얻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이런 미친 인간은 단호하게 상대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상하군요.”

“뭐가요?”

“남자라면 저를 통해서 얻고 싶은 게 없을 리가 없는데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고개를 두 번 젓고 다시 맥주를 머금었다.

 

“섹스요. 보통 남자라면 그런 욕구가 절로 생기지 않나요?”

 

순간 맥주를 뿜을 뻔했다. 이 여자, 도대체 뭐지? 나는 헛기침을 여러 번 뱉었다.

 

“혹시 발기부전이십니까?”

“뭐요? 거 되게 무례하시네! 아니거든요!”

 

정말로 발기부전은 아니었기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욕구가 생기질 않으세요?”

“그런 욕구 없습니다. 저는 야구를 보러 왔다고요.”

 

반은 거짓말이었으나, 나는 최대한 억울한 말투를 뱉었다.

 

“야구를 보러 왔으니, 야구에 대해 대화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미치겠군.”

 

그사이 샤크스의 1번 타자가 삼진을 당했다. 나는 한숨을 뱉었다.

 

“저기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1회말인데요.”

“제가 한숨 쉬는 이유의 5할은 당신 때문입니다.”

“정말 좋은 수치로군요. 마음에 들어요. 저를 만족시키셨으니 저도 즐겁게 해드리죠. 자, 인간이 설정할 수 있는 수치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바로 5할, 즉 50%입니다. 가장 아이러니한 거예요. 그게 야구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있죠. 예컨대 타자의 카운트가 쓰리 볼, 노 스트라이크라고 칩시다. 그럼 다음 공을 어떻게 할까요?”

“고작 저를 즐겁게 해준다는 게 다음 공을 어떻게 할지 정하는 겁니까? 거 유머 감각 좀 키우셔야겠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당신이라면 그런 절대적으로 유리한 카운트에서 다음 공을 어떻게 하겠어요?”

“그야 경기 상황에 따라 다르겠죠!”

“좋아요. 그럼 설정을 추가해드리죠. 자, 9회말 원아웃에 만루입니다. 점수는 1점차로 지고 있어요. 그리고 타석에 서 있는 당신은 쓰리 볼까지 끌고 갔습니다. 이제 다음 공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지를 들고 있을까요?”

“대부분은 다음 공을 기다리겠지만, 선택지를 따지자면 두 가지가 있겠죠. 기다리거나, 노려 치거나.”

“저런! 그쪽은 로망이 부족하시군요!”

“뭐라고요? 이보세요.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쓰리 볼이라면 당연히 다음 공은 그냥 기다리는 게 맞겠죠. 어차피 다음 공이 스트라이크여도 쓰리 볼, 원 스트라이크로 여전히 유리하니까요. 하지만 상대 투수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하니까 거의 가운데로 던질 테고, 그걸 노려서 치는 경우도 있잖아요.”

“아니요. 선택지는 한 가지 더 있습니다.”

“……?”

“참는 겁니다.”

 

여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참다니? 쓰리 볼에서 다음 공을 참는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 대부분은 느긋하게 기다린다. 그리고 가끔씩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치는 선수도 있다. 그런데 참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에요. 인내죠. 참을 인.”

“정말 이상한 사람이네. 그게 기다리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그래서 아이러니한 거예요! 어차피 다음 상황은 스트라이크 아니면 볼 두 가지인데, 우리는 세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인내라니!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쓸모없고 비열한 일종의 감각이죠. 그래서 야구가 해로운 거예요. 즉, 야구를 보는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괴팍한 거죠.”

“고작 야구 보는 인간들이 괴팍하다는 걸 얘기하려고 5할이니 뭐니 그딴 설정 놀이를 나불댄 겁니까?”

“생각해보세요. 야구만큼 인내를 요구하는 스포츠가 있습니까? 그것도 거의 3시간 내내 말이죠. 이거 아니면 저거. 딱 5할로만 사람의 생각을 가둬두는 거예요. 그 좁디 좁은 선택지를 거의 강제로 받아든 사람들은 점점 성격이 괴팍해지는 거죠.”

“이보세요. 그걸 인내라고 받아들이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참을성 없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지금 당신은 또 착각이라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참을성 있는 게 아니라, 언젠간 무너질 위태로운 인내를 쌓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무너질 때 벌어지는 현상은 괴팍함이죠. 욕설을 내뱉고, 심하게는 폭력을 휘두르고 하는 겁니다. 정말 암울하고, 그러나 황홀한 기분이겠죠.”

“정말 암울하군.”

“다시 야구 보는 인간들이 왜 괴팍한가에 대해서 제 생각을 추가로 말씀드리죠. 야구는 모든 상황에서 인내를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구 보는 사람들은 성격이 더러운 거예요. 가령 지금 우리 투수가 볼을 던지면 사람들은 ‘저 병신 왜 스트라이크를 못 던져?’라고 짜증을 내고,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저 등신 왜 위험하게 가운데 던져?’라고 짜증을 내죠. 타자가 범타로 물러나면 욕은 당연하게 튀어나오고, 설사 안타를 친다고 해도 왜 이제 와서 치냐는 둥, 지금 치면 뭐하냐는 둥 불만을 토로하는 게 바로 야구 보는 인간들이죠. 계속 된 인내라는 업보 때문인 겁니다.”

“별 헛소리를 다 듣겠군. 틀렸습니다. 저는 우리 투수가 잘하면 욕하지 않고 칭찬하며, 우리 타자가 잘하면 욕하지 않고 박수를 칩니다. 인내는 뭔 얼어 뒤질 인내입니까?”

“이제 보니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얼간이로군!”

“뭐, 뭐요?”

“당신은 지금 스스로 도취감에 빠져 허우적대는 겁니다. 예를 들어 드리죠. 당신은 10점차 경기를 보고 있습니다. 우리 팀이 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4번 타자, 그러니까 당신이 기꺼이 아끼는 등번호 39번의 저 선수가 앞서 세 번의 찬스를 놓치고, 이미 승부가 기울어버린 9회말 투아웃에 솔로 홈런을 친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저 자식 왜 이제 와서 치고 지랄이야!’ 이렇게 말할 확률이 대단히 높을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구가 해로운 거예요. 야구를 보는 사람들이 성질이 더러워지는 거고요.”

“이제 당신의 그 야구에 대한 쓸모없는 철학일랑 끝났겠죠? 그럼 저는 야구에 집중해도 되겠고요?”

“유감입니다. 저는 아직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어요.”

“당신을 죽여 달라는 거 말이죠?”

“네.”

“유감이군요. 그런 목적은 결코 달성하지 못하실 겁니다.”

 

야구는 어느새 2회로 접어들었다. 제길. 1회를 통째로 날려버린 기분이다.

 

“하지만 야구라는 게 참 재밌는 건, 결국 우리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스포츠이기 때문이에요.”

“혹시 헛소리가 취미십니까?”

“스트라이크가 세 번이면 아웃이라는 그 규칙. 물론 태초의 야구는 그렇지 않았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 현대에는 그런 규칙이 자리 잡은 거예요. 스트라이크가 세 번이면 아웃.”

“아! 거 참! 야구 좀 봅시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정말 등신 같은 말이죠. 아마도 인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조가 만들어낸 말이겠지만, 우리 같이 야구를 사랑하는 인간들에게는 결단코 배제해야할 말입니다.”

“이런 중요한 경기에 하필 이따위 3류 철학자가 내 옆에 앉다니 원!”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야구로 봐도 그 말은 정말 틀린 말이에요. 스트라이크가 세 번이면 아웃이거늘! 진정으로 후손들을 위해서라면 이런 말로 바꿔야 합니다. ‘살인 한 번이면 인내를 면한다.’”

 

그때 샤크스의 4번 타자이자 등번호 39번 베테랑이 헛스윙을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sp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