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강탈자

  • 장르: SF, 호러 | 태그: #정신강탈자 #정신공격 #강탈자 #침입 #머릿속 #대결 #이미지트레이닝
  • 평점×66 | 분량: 89매
  • 소개: 한 남자의 머릿속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머릿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 머릿속 침입자는 남자의 정신을 강탈하려고 문을 열고 뛰쳐나온다. 막아야 한다! 더보기

정신강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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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퇴근을 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쾅! 쾅! 쾅! 누군가 철문을 다급히 두드리는 소리였다. 육중한 쇳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머릿속이 흔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지만,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아 이상했다. 근처 상가와 아파트에는 철문이 없었다. 혹시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일까 주차된 차를 기웃거렸다. 아니었다. 차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에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왔다. 양말을 벗고 TV 리모컨을 집어 드는데 다시 철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쾅! 쾅! 불쾌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눈앞으로 철문이 떨어져 나올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얼마나 급하기에 이러는 걸까? 문에 뭔가가 닿는 소리로 짐작해 보건대, 발로 차는 것도 아니고 지팡이나 망치 같은 걸 휘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맨손이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열어달라고 철문을 두드린다. 하지만 우리 집에 철문 같은 건 없다. 집에서 나와 주변을 샅샅이 뒤져봐도 비슷한 건 발견할 수 없었다. 분명히 철문을 두드리는 소린데 어디에도 철문은 없다. 내가 미친 걸까?

 

그 이후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철문을 두드릴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녹음해봐도 들리는 건 내 숨소리뿐이었다. 골치가 아팠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일까? 의문은 점차 하나의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나에게만 들리는 소리다. 머릿속 환청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설명되지 않는 게 있었다. 진동과 함께 느껴지는 철문의 실재감과 그 너머의 인기척이 그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머릿속에서 두꺼운 철문이 만져지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땀 냄새와 채취를 동반했다. 마치 실제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이비인후과에 방문해 진찰을 받았다. 돌아온 답변은 귀에는 아무 이상 없다는 진단이었다. 신경외과와 신경내과도 다녀왔다. 결론은 ‘알 수 없음’이었다. 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것 같다고, 차근차근 병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자며 의사가 신경 정신과를 추천해 주었다. 요즘처럼 마음이 편한 적도 없었는데 웬 스트레스? 내가 좋아하는 인터넷 웹서핑도 실컷 하고 책이나 영화도 마음껏 봤었다. 꿈속에서조차 낮에 보고 듣던 것들이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일단 신경 정신과에 가보긴 하겠지만, 의사의 말이 탐탁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하루빨리 이 소리를 없애야 한다.

 

한동안 열어달라고 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병원에 다녀오고 난 후부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철문에 머리를 들이받는 거로 바뀌었다. 열어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걸까. 문 앞에서 고함을 치며 발버둥 친다. 문을 긁고 때리는 소리에 철퍽거리며 끈적한 게 달라붙었다. 비린내가 훅 끼친다. 피다. 이제껏 맨손으로 철문을 두드리느라 손가락뼈 마디마디가 부서지고 피부가 너덜너덜하게 찢겼다. 피 묻은 손자국이 문에 찍힌 게 보인다. 그 앞에서 이를 악물고 흐느끼는 모습이 애처롭다. 이상한 일이지만 머릿속에서 그렇게 보였다. 들리는 것뿐만 아니라 시각과 후각, 촉각까지 느껴진다. 열어줘야 하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문을 열어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을 수도 없었다. 신경이 쓰여 미칠 지경이었다. 툭, 툭, 툭,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문을 두드린다. 손바닥 살갗이 쩍 하고 철문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 얼마나 아프길래 저리 힘겨워하는 걸까? 눈물을 뚝뚝 흘린다. 불쌍하다. 이 정도면 열어줘야 하지 않을까?

 

우지끈!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직감으로 알았다. 철문에 걸린 빗장이 박살 났다는 것을. 끼이이익.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문이 조금씩 열린다. 안에 있는 게 누군지도 모르고 무슨 목적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조심해야 한다.

 

열린 문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휘몰아쳐 얼굴에 닿았다. 위험하다! 문 뒤에 선 이의 의도가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단번에 놈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놈의 목적은 내 정신을 차지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 나오기 전에 빨리 닫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대체 어떻게 닫지? 문이 불쾌한 마찰음을 일으키며 틈을 더 벌린다. 놈이 히죽 웃으며 멀쩡한 손으로 철문을 민다. 아무리 닫히라고 중얼거려도 소용없다. 머릿속에서 열리는 문을 무슨 수로 닫는단 말인가? 확실한 건 내가 열어줬다는 거다. 놈이 품은 생각으로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느꼈다.

 

활짝 열린 문으로 놈이 걸어 나온다. 문을 두드릴 때와는 다르게 경쾌하고 단호한 발걸음이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지어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정체가 불분명하다. 모습이 흐릿하다. 단지 내 머릿속 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과 놈의 의도와 생각을 읽듯이 알 수 있을 뿐이다. 놈은 내 정신의 일부를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됐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건 놈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같은 상태다. 절대 내 정신을 내줄 수 없다. 무슨 수를 쓰든 쫓아내야 한다.

 

놈이 또박또박 발소리를 내며 걸어온다. 문이 열린 건 곧 놈에게 자유를 준 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저절로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누군가 바쁘게 걷는다. 눈앞의 놈은 아니다. 발걸음이 무척이나 다급하다. 뭔가 큰일이 난 것처럼 뛰다시피 걷는다. 구둣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끼익하며 녹슨 철문이 열린다. 놈이 빠져나온 그 철문인가? 오래전에 봤던 영화의 한 장면이 제멋대로 떠오른다. ‘쇼생크 탈출’이다. 놈의 짓이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놈이 내 머릿속을 뒤져 기억을 보낸다. 감옥을 탈출한 주인공이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자유를 만끽한다. 이어서 주인공의 고발로 온갖 비리를 저지른 교도소장에게 경찰이 들이닥친다. 다시 누군가 걷는 게 보인다. 아니 철문으로 질질 끌려간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양옆에 경찰 두 명이 들러붙었다. 끌려가는 이는 누굴까? 얼굴이 무언가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내 머릿속에는 놈과 나밖에 없다. 놈이 아니라면, 설마 내가?

 

머릿속에서 내가 놈이 갇혀 있던 철문으로 걸어간다. 보이고 느껴진다. 나를 흉내 낸 이미지 같은 게 아니다. 분명히 나였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멈추지 않는다. 마치 내 모습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것 같다. 갑자기 왜 이러지? 활짝 열린 문 안은 시커먼 어둠뿐이다. 그곳으로 성큼성큼 걷는다. 들어가면 안 된다. 갇히면 놈이 열어줄 때까지 나오지 못한다. 놈은 절대 열어줄 생각이 없다. 그 후에는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놈이 내 정신을 전부 차지한다!

 

어느새 철문 앞에 다다른다. 닫혀라! 닫혀라! 아무리 외쳐도 문은 닫히지 않는다.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기 위해 달리는 시늉을 해봐도 소용없다. 내 바람은 또 다른 나에게 닿지 않는다. 단절됐다. 내가 문 안으로 한쪽 발을 내디딘다. 놈이 기뻐 날뛴다. 지금이라도 멈춰야 한다! 어쩌지? 다급한 나머지 문이 닫히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이어서 철문이 산산이 조각나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철문이 쾅! 닫힌다. 들어가다 말고 닫힌 문에 부딪혔다. 뒤로 물러서자 철문에 금이 가더니 문이 박살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 후 눈 녹듯 사라진다. 철문은 이제 내 머릿속에 없다.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알아챘다. 놈이 나에게 생각을 보낼 수 있는 만큼 나도 맞받아칠 수 있다는 걸. 그럼 감옥으로 걸어가는 행동을 왜 제어할 수 없었던 걸까?

 

철문이 사라진 건 다행이지만, 그건 당장 놈을 가둘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 무한한 공간에 놈과 나 둘뿐이다. 긴장감으로 숨이 막혔다. 놈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대로 내 정신을 빼앗길 수 없다. 놈이 내 머릿속을 활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두껍고 질긴 밧줄을 떠올렸다. 그걸 놈의 팔다리에 묶었다. 머릿속에서 놈의 두 손목과 발목에 밧줄이 감긴다. 놈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움츠린 채 넘어진다. 팔과 다리가 꽁꽁 묶여 지면을 짚고 일어날 수 없다. 밧줄을 풀려고 온몸을 꾸물거리는 게 마치 거대한 애벌레 같다. 우습다. 애벌레는 뭘 먹고 살까? 나뭇잎을 갉아 먹으며 산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놈이 묶인 팔을 얼굴 쪽으로 가져간다. 입을 벌리더니 손목을 칭칭 감은 밧줄을 물어뜯는다. 금세 밧줄이 너덜너덜해지며 툭 끊어진다. 믿을 수가 없다. 저 두꺼운 밧줄을 어떻게 이빨로 잘라낸 거지? 생각이 선명치 않아 허점이 있었나? 아니면 줄이 약했을까? 놈은 상체를 일으켜 자유로워진 손으로 발목에 묶인 밧줄을 풀었다. 가만히 놔둬서는 안 된다!

 

흉악범들에게 사용하는 굵은 쇠사슬로 다시 놈의 발목을 묶는 상상을 했다. 어느새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을 본 놈이 끙끙대며 몸부림친다.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비명을 지른다. 쇠사슬은 멀쩡하다. 이번에는 이로도 잘라낼 수 없는지 발목을 움켜쥐며 아파한다. 위잉- 하는 굉음이 머릿속을 울린다. 놈이 보내는 게 분명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보다 더 크고 요란하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음이다. 울퉁불퉁한 곡선이 보인다. 천장에 달린 줄을 잡아당기자 깜빡거리며 전등이 켜진다. 밑동을 잘린 나무가 쓰러진다. 뭔가가 떠오른다. 바로 전기톱이다.

 

전기톱을 떠올리자마자 어느새 놈의 손에 전기톱이 들렸다. 놈이 낄낄거리며 전기톱의 시동을 켠다. 조심스럽게 발목에 묶인 쇠사슬로 울퉁불퉁한 날을 갖다 댄다. 불꽃이 튀며 쇠사슬이 끊긴다. 놈이 전기톱을 들고 벌떡 일어선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전기톱으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놈은 전기톱을 높이 들어 휘두르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전기톱을 내던진다. 왜일까? 확실한 건 놈은 혼자서 무언가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의 기억을 더듬어 보낼 수 있지만, 그게 다다. 이제야 깨달았다. 놈이 원하는 걸 연상해야 나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그래야 애벌레가 되든지 전기톱을 만든다. 일종의 내 허락이 필요한 셈이다. 그건 머릿속에서 내가 놈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아직은 내 정신이니까. 놈이 보내는 생각과 기억들에 반응하면 안 된다.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어찌 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머릿속에 이질적인 감각이 흘러들었다. 놈이다. 수작을 부릴 때마다 항상 느껴진다. 마치 한 단어를 오랫동안 볼 때 느끼는 그런 낯선 기분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생생한 고통으로 안쓰러운 마음이 들게 해 문을 연 것도 놈이었고, ‘쇼생크 탈출’을 통해 내가 죄수라는 걸 연상시킨 것도 놈이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린다. 병원 응급실이다. 침대에 누운 환자들이 저마다 극심한 고통으로 비명을 지른다. 누워있던 환자가 일어나 웩! 하고 구토를 한다. 침대 가장자리에 반쯤 걸친 토사물이 밑으로 줄줄 흐른다. 술을 진탕 마셔 구역질이 나올 때의 그 더러운 기분이 떠오른다. 사방에서 고통에 눈이 뒤집혀 욕하고 호통치는 소리, 차라리 죽여 달라는 울부짖음이 휘몰아친다. 얼마나 아플까?

 

아니다. 놈의 농간이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받아들이면 절대로 안 된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산소 호흡기를 단 아이가 보인다. 황산 테러를 당해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두 눈을 잃었다. 최고의 고통이 불에 타는 거라고 했던가. 불쌍하고 슬프다. 안쓰러운 마음 한편으로 하나의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부할 수 없었다. 만약에, 혹시 만약에 내가 저렇게 되면 어쩌지? 온몸에 수백 개의 바늘이 꽂히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피부가 쥐어뜯기며 녹아내린다. 뜨거운 열기가 몸 안에서 솟아난다. 따끔거리는 수백 개의 통증이 점점 커져 하나로 합쳐진다. 얼른 소매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상의를 들춰봤다. 몸에는 아무 이상 없다.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그런데도 자꾸 아프다는 생각이 든다. 믿으면 안 된다. 믿으면 그게 곧 현실이다. 살 타는 냄새와 온몸에 붕대를 감고 침대에 누운 내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칼로 온몸을 긁어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그저 생각에 불과하다. 그뿐이다. 하지만, 아프다는 생각 자체를 견디기 힘들다. 놈이 포기하면 편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전해 온다. 앞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결국, 놈이 원하던 게 바로 이거였다. 안 된다. 절대로. 닥쳐! 이곳의 주인은 나라고!

 

살갗이 타는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닫는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통증을 가라앉혀야 한다. TV에서 본 우유 광고를 떠올렸다. 넘실거리는 하얀 우유의 물결, 그게 온몸을 구석구석 감싼다면? 내 몸이 커다란 유리컵 안에서 부드럽게 출렁이는 우유 속으로 잠긴다. 발끝에서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우유 속으로 가라앉자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실제로 화상과 우유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단지, 우유의 그 부드러운 질감과 투명한 하얀색이 화상의 고통을 사라지게 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자마자 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의 입술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놈의 짓이다. 이번에는 대체 뭘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곧바로 불그스름한 사과, 빨강 신호등, 붉은 스포츠카, 새빨간 막대사탕이 머릿속을 휘젓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놈이 보내는 기억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빨간색이라는 것. 아차! 온몸을 어루만지던 하얀 우유에 빨간 점이 여기저기 생기더니 그게 마치 붉은 잉크처럼 사방으로 번진다. 순간, 오싹해 소름이 돋았다. 우유 속에 피를 흘리는 뭔가가 있다?

 

면도칼이 박히는듯한 저릿한 통증이 엄지발가락에서 시작해 다리를 타고 몸 전체를 휩쓸었다. 으악! 우유 속에서 몸을 뒤틀며 허우적거렸다. 숨이 막혔다. 나도 모르게 공포가 치솟았다. 그건 보이지 않는 괴물에 대한 공포였고, 인간이 태초부터 품었던 물에 대한 공포였다. 마치 누군가가 끌어당기듯 온몸이 우유 속으로 잠겼다. 발이 닿지 않는다. 이리저리 휘젓는 다리 사이로 미끈한 무언가가 꿈틀대며 지나친다. 이대로 괴물에게 온몸이 물어뜯기거나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는 유리컵을 더듬다가 어두운 하늘에서 벼락이 치는 모습을 상상했다. 빛줄기가 여러 갈래로 퍼져 사방으로 이리저리 내뻗었다. 쾅! 하는 소리가 난다. 우유가 담긴 커다란 유리컵에 금이 쩍하고 가더니 산산이 부서졌다. 쏟아지는 우유에 휩쓸려 밖으로 빠져나왔다.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던 나는 바닥에 엎질러진 우유를 확인했다. 흐르는 우유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얼굴과 몸에 묻은 우유를 닦아내고 놈을 바라봤다. 화상으로 인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놈이 나를 보며 웃는다. 이런 식으로는 놈을 감당할 수 없다. 이건 전적으로 내가 불리한 싸움이었다. 놈은 부정적인 이미지만 보내면 그만이었다. 나도 모르게 최악을 상상하게끔 말이다.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건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놈을 직접 상대하면 안 된다. 반격할 여지만 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놈을 치우는 게 우선이었다. 그게 어렵다면 아예 멀리 보내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놈을 날려 버리자. 같이 붙어 있지 않으면 된다. 어디가 좋을까?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이다. 그곳은 현지인도 길을 잃으면 헤매다 죽게 된다는 위험한 장소였다. 놈을 단숨에 아마존의 울창한 숲으로 쫓아냈다. 위로는 얽히고설킨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밑으로는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이 시야를 방해했다.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나갈 길은 없다. 여기라면 못 돌아올 테지.

 

긴 한숨을 내쉬자마자 놈이 다시 돌아왔다. 어떻게? 지구 밖으로 얼른 뛰쳐나왔다. 태양계를 넘어서 머나먼 우주 한가운데로 날아와 놈을 떨어뜨렸다. 이제는 못 찾아올 거다. 광활한 우주에서 실컷 헤매 보시지. 어느새 내 앞에 선 놈이 나를 보며 웃는다. 왜일까? 이유는 뒤를 돌아보자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마존이나 우주 멀리 보낼 때 어쨌든 나도 그곳으로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그럼 방법은 간단했다. 놈은 내가 되돌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온 거다. 놈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정신을 빼앗길 때까지 언제까지나 놈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방법은 간단했다. 놈은 내가 되돌아온 길을 그대로 따라온 거다. 놈을 어떻게든 떨어뜨려 놓아야 하는데 이런 식이라면 정신을 빼앗길 때까지 언제까지나 놈과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내가 생각을 반복한 게 아니다. 놈의 생각이다. 갑자기 놈이 모습을 감췄다. 머릿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 놈의 의지는 바로 여기에 그대로 존재한다. 놈이 자신의 모습을 숨긴 후 끊임없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면 곧바로 그 생각을 따라 하는 식이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의도를 알아내려고 온갖 가능성을 떠올렸다. 많은 생각들 사이사이에 놈이 앵무새처럼 나와 같은 생각, 같은 감정을 품는다. 이게 계속되니 어떤 게 나의 생각이고 어떤 게 놈의 생각인지 헷갈린다. 놈이 내 머릿속에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놈의 존재가 사라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서로를 구분할 수가 없다. 그건 갈수록 놈의 생각을 내가 한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거고, 그게 심해지면 내가 놈이 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그게 놈이 숨어버린 진짜 이유였다. 즉,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놈과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그게 정신을 빼앗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생각보다 영악한 놈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무슨 수를 써야 놈을 쫓아낼 수 있을까?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놈이 계속 모습을 감춘 채로 나를 흉내 내면 언젠가는 놈과 동화될 것이다. 그게 시간의 무서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