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부터인지 낯선 소리가 끝도 없이 ‘나’의 귓속을 맴돌기 시작한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없는 의문의 소리. 모든 것은 그 소리에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그 소리를 내는 존재가 다름 아닌 ‘나’의 타자화된 주체로 추측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른 그 누구도 ‘남자’의 울부짖음과 발광적 행동을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오로지 ‘나’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에 소리를 둘러싼 문제는 곧 ‘나’의 믿음과 직결되는 투쟁이 된다. 남자를 믿지 않으려는 투쟁, 나를 믿으려는 투쟁. 그리고 남자의 존재로부터 내 생각을 지키려는 투쟁.
‘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공감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불규칙한 상상의 파편들이 거침없이 튀어 오르고, 서로에게 생각을 들키지 않으려는 싸움이 온통 뒤죽박죽 섞여 있다. ‘나’는 ‘남자’에게 생각을 뺏기지 않으려 애쓰지만, 변수는 끝도 없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남자’는 ‘나’에게 여러 생각과 감각들을 보내며 온전히 생각에 집중할 수 없도록 정신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남자’는 누구일까?
이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정신과 시간을 두고 싸우는 존재들의 설정에 있다. 타자화된 나의 존재를 리얼하게 실체화하고, ‘나’의 정신을 잠식하려는 ‘남자’의 갖은 시도들을 다채로운 상황으로 펼쳐놓는다. ‘남자’의 존재는 어떤 질환이나 병이라기 보단, 마치 틈만 나면 찾아오는 불청객에 가까워보인다.
‘시간이 없다’거나 ‘정신이 없다’는 말을 낯설지 않게 입에 올리는 분들이라면, 이 격렬한 생각의 투쟁기를 읽어보시라 적극 권하고 싶다. 나도 모르는 사이 생각을 잃고 시간에 쫓길 때, 사실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은 이렇게나 치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이며, 진짜 나 자신은 어떻게 찾아야하는가? 아마 당신도 지금, 정신강탈자와 끝없는 싸움의 연장에 있는지도 모른다. 극한적인 일상을 다채롭게 묘사하는 데 막힘이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