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미래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나이가 드니까 다리가 아픈데 자리가 안 나네. 노약자석도 꽉 찼구.”

“지하철 공짜로 타면서 염치 없이 앉아 가길 바라면 쓰나. 요새 젊은 애들도 힘든데.”

“젊을 때는 모르는데, 이게 늙으면 무릎도 쑤시구 다리에 힘두 읎어, 아무래두.”

“옛날에는 멀리서 어른이 보이면 벌떡 일어나서 자리양보 했는데, 요새는 가정교육이 안 되어 먹어서. 맞벌이들 하느라 바빠서 애들 얼굴 볼 시간도 없는데 그런 걸 언제 가르쳐.”

아까부터 눈 감고 자는 척 하고 있는데 본격적으로 헤드뱅잉이라도 하면서 더 격렬하게 자는 척 해야 하나. 레이스, 조화, 리본, 큐빅에 깃털까지 달린 휘황찬란한 패시네이터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것만 봐도 내가 보통이 아니란 직감이 딱 올 텐데, 노안에는 그냥 좀 화려한 올림머리로 보이는 걸까. 왜 맞은편 덩치 큰 아저씨 앞으로 안 가고 내 앞에서 승객들 다 들으란 듯이 큰소리로 대화를 하실까. 청력이 약해서 자기도 모르게 말소리가 커지는 걸까 나 망신 주려고 일부러 목소리 높이는 걸까. 이럴 거면 차라리 대놓고 자리 좀 양보해 달라고 부탁을 하시든가. 내 옆자리 승객도 절대 눈 마주치지 않으려고 에어팟을 귀에 꽂고 고개 푹 숙이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다.

내가 원래 이렇게까지 ‘가정교육 안 되어 먹은’ 사람은 아닌데 오늘은 예외다. 너무 오랜만에 하이힐을 신고 나왔더니 발이 다 까지고 발목이 아파서 서 있을 수가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문에서 제일 가까운 신발가게에서 이 하이힐을 샀다. 가느다란 힐로 몸 전체를 지탱하는 위태로움이 ‘어른의 느낌’이었다. ‘대리석 바닥을 또각거리며 걷는 당당한 여성 리더’의 비주얼을 상상했으나…반창고 덕지덕지 붙인 발을 좁은 구두 속에서 꼼지락 대며 어떻게든 덜 아프게 걸으려고 동동대느라 뇌가 발까지 내려갈 것 같았다. 그 후로 신발장 속에 처박아 두고 잊고 살다가 패시네이터에 운동화를 신었더니 영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특별히 꺼내 신었는데…내가 꿋꿋이 자는 척을 하니까 이제는 내 발끝을 툭툭 건드린다. 아 일어난다고요! 일어나면 되잖아요!

뭐야, 등산복 갖춰 입으시고 어디 놀러 가시나 본데, 굳이 ‘요새 힘든 젊은 애들’ 자리 뺏으셔야 했나? 자리 맡겨 놨나. 고맙다는 인사치레도 없다. 그 와중에 서로 앉으라고 양보 하면서 옆자리 에어팟에게 눈치를 준다. 일어나자마자 하이힐 위에서 무게중심이 안 잡혀서 휘청거리다가 아픈 발을 디디고 욕, 아니 비명을 작게 지르면서 비틀댔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앉아서 갔습니다’라는 해피엔딩일 줄 알았던 어르신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휴, 몸이 안 좋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하기 애매하니까 말을 안 했지. 나도 뒤끝 있게 고맙다는 말 없이 고개만 까딱하고 앉았다. 우리 할머니는 이런 분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할머니는 불륜 잡는 탐정이던 할아버지의 의뢰인과 바람이 나서 황혼이혼과 황혼재혼을 했다가 최근에 사별했다. 재혼 후 아들인 우리 아빠와 연락을 끊었고, 몇 년 후 우리 엄마가 되는 여자친구와 한창 연애 중이던 이십 대의 아빠는 별 타격을 받지 않은 줄 알았으나…결혼식에 모친을 부르지 않는 뒤끝을 보여 주었다. 엄마의 엄마아빠는 ‘순진한 우리 딸 꼬셔서 탐정으로 만들어 버린, 음침하게 남의 불륜이나 잡고 다니는 탐정 사위’를 격하게 반대하느라 결혼식에 오지 않았다. 엄마는 하얀 원피스에 웨딩베일과 부케 없이 번쩍이는 미러볼을 들고, 아빠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백구두를 신고 각자의 친구들만 초대해서 마음대로 스몰 웨딩을 해 버렸다. 할아버지는 아들 결혼식에서 불륜 탐정 명함을 돌리며 영업을 하셨고.

결혼 후에도 엄마 쪽 친척들은 아빠를 결혼사기꾼 보듯이 봤다. 그러다 보니 나와 오빠도 외가가 어색했다. 아빠는 뒤끝이 ‘싸다가 중간에 끊고 나온 잔변감’ 만큼 길어서 할머니에게 우리 남매의 사진 한 장 보내지 않았다. 내 인생에 없던 할머니를 이제서야 만나는 건 다 지금 머리에 쓰고 있는 패시네이터 때문이다.

“늙으면 외로운 게 제일 사무치니까, 자주 찾아 가서 얼굴도 보여드리고 같이 맛난 것도 사 먹고 수다도 좀 떨어드리고 그래. 너 그런 거 잘 하잖냐.”

“외로우면 SNS 하시면 되는데 굳이 직접 얼굴 봐야 한다는 거 보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어르신 다 되셨네.”

“’어르신’이라고 하지 마라. 늙은이 같잖냐. ‘시니어’라 그래. 있어 보이게.”

“시니어 할아버지, 아들 며느리 손자 다 두고 왜 나한테만 그런 거 시켜요?“

“네가 외모고 성격이고 나랑 제일 닮았으니까 그러지. 내가 너 키울 때 똥기저귀 갈아주고 손에 물 마를 새 없이 날마다 온갖 채소랑 고기 다져가며 이유식 만들어 먹이고, 잠 들 때까지 안고 다니느라 손목이 다 나갔는데 그거 하나 못 해 준다고오 아이고 내가 서러워서 어디 살겠냐아. 이게 다 오냐오냐 하면서 손주 녀석 잘못 키운 내 탓이다아-.”

“또 이러신다. 뚝! 눈물도 안 나는데 우는 척 하는 거 다 알아요. 랩을 할 거면 나한테 말고 ‘쇼미 더 머니’에 나가서 하시라니까.”

“…요새 뭐 필요한 건 없냐?”

“좀 예쁘고 특이한 모자요. 평범하고 무난한 건 많으니까.”

“네가 그 동안 모자 사 모은 거 다 팔면 집 한 채는 사겠다!”

“물정 모르는 소리 하신다. 요새 집값이 얼마나 비싼 줄 알아요? 모자가 아니라 나를 팔아도 집은 못 사.”

“하여튼 할애비가 말하는 데 한 마디를 안 지려구. 확실하게 사서 보낼 테니까 제발 잘 해라. 네 할머니가 너한테 정 들고 익숙해져야 내가 귀국하고 나서 다시 잘 해 볼 수 있지.”

우리 할머니는 영국 왕실 결혼식에 쓰고 가도 될 패시네이터를 ‘확실하게’ 사 주는 우리 할아버지 같은 분은 아니겠지.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전씨 집안 여자’ 같지 않은 ‘전형적인 현모양처’인 줄 알았는데 결혼 생활 이십 몇 년 만에 이혼 서류 들이댄 걸 보니 전씨 집안 여자 같기도 하고…그 동안 어떤 여자랑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고.

“대체 ‘전씨 집안 여자’가 뭐예요? 엄마는 전씨 집안 여자 같고 나는 아니라며. 기준이 뭔데? 나도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잖아.”

“넌 순서가 틀렸잖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지. 일단 아무 말이나 해 놓고 수습하고 후회하면 어쩌냐! 넌 니네 엄마 안 닮고 대체 누구 닮아서 그러냐.”

“할아버지 닮았다며.”

엄마는 내가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걸 말리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도 않았다.

“내가 못살아. 왜 본인 생각만 하신대니. 버스하고 여자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라는 말도 모르신대?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같이 유럽여행 가자고 하셨는데 할머니가 거절하셨다며. 그럼 쿨하게 받아들이셔야지 왜 손녀까지 들이대면서 질척거리시는 거야, 대체.”

“할아버지 말로는 떠나간 버스는 택시 타고 따라가서 잡으면 된다는데?”

“아버님은 택시가 아니라 자전거라서 못 잡아. 뭘 믿고 그렇게 대책 없이 집 팔아서 해외여행 가셨나 했더니 전부인이 새남편한테 유산으로 받은 집에 들어가서 빌붙어 사시려고 그러는 거 아냐?”

“엄마 입장에선 할아버지 모시고 한집에 사는 것 보다는 낫지 않아?”

“할머니 전업 주부 셨다며. 기술은 없고 나이만 많으셔서 돈 벌 구석이 없으실 거 아냐. 니네 아빠 말로는 사별한 후로 새벽이랑 늦은 밤마다 동네 돌면서 박스 줍는 것 같은데 한 두 개밖에 못 줍는다고 그러더라. 아버님이랑 재결합 하시면 우리 집에서 매달 생활비 좀 드려야 할 텐데, 그럼 우리 집 형편이 좀 빠듯할 거 같아서 그러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요새 잘 버시잖아. 젊은이들이 뭘 상담해 와도 국가에서 막 퍼 줘서 젊은 애들이 잘 살아야 결혼도 하고 불륜도 해서 불륜 탐정이 벌어 먹고 살 수 있다고 대답해 주는 ‘불륜할배’로 유튜브 하셔서. 나보다 더 잘 버는데?”

“아버님은 자기가 잘못해서 이혼 당한 게 뭐 자랑이라고 맨날 유튜브에서 말씀하신대니? 내가 니네 할머니래도 남아있는 정마저 다 떨어지겠다. 아니다, 니네 할머니도 할아버지랑 비슷한 분이니까 결혼을 했겠지. 할머니네 집은 주택연금 넣어서 상속도 못하신다니까 이제 와서 시어머니 노릇은 안 하시겠지, 설마. 아니 그러게 아버님도 집 팔지 말고 주택연금이라도 넣으셨어야지! 왜 그렇게 주책도 대책도 없이 사신대니, 진짜!”

할아버지가 패시네이터를 사면서 ‘요런 모자를 고를 줄은 상상도 못했겠지’ 하며 킬킬대는 모습이 ‘안 봐도 유튜브’ 였지만 나는 이 패시네이터를 쓰고 대중교통으로 가서 할머니랑 인증샷을 찍어서 할아버지한테 보내드릴 거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처럼 유머 감각과 친화력이 있고, 전형적인 할머니처럼 자애롭고 인자하고, 지하철의 노인들과는 다르게 젊은이들의 고충도 이해해 줄 거다. 나랑 얼굴을 맞대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아버지를 기함하게 할 지 키득댈 거다. 우리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현모양처도 엄마가 우려하는 불쌍한 독거노인도 아닐 거다.

“너 나중에 할아버지도 모자라서 할머니 병수발 들고 싶지 않으면, 할머니가 널 보고 ‘이 영감 하고는 다시는 엮이지 말아야 겠다’고 학을 떼게 해 드려. 네가 우리 가족 중에 할아버지랑 제일 닮았잖아.”

“그건 좀 먼 미래 아냐? 왜 벌써부터 그런 걸 걱정해?”

“할아버지가 언제까지 정정하실 거 같애? 어르신들은 건강한 것 같다가도 한 순간에 훅 가셔. 할아버지야 탐정 일할 때 인맥 쌓은 것도 넘겨 주시고 김장도 담가 주시고 손주들도 키워 주셨으니까 우리 가족이 부양해야겠지만, 여태 왕래도 없던 할머니까지 돌봐드려야겠어?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마. 너도 이제 물정 모르는 순수한 어린애가 아니니까 현실적으로 생각 해야 돼. 노인 한 분 모시는데 한 사람만 갈아 넣어서 되는 줄 알아? 너랑 네 오빠도 동원되어야 한다고.”

“아빠랑 오빠는 뭐래?”

“우리 아들은 연애하느라 생각이란 거 자체가 없고, 니네 아빠한테는 어머님 모실 거면 혼자 그 집 들락날락하면서 보살펴 드리라고 했어. 나는 이제 와서 며느리 노동할 생각 없다고.”

그럼 나는 할아버지와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늘 그래왔듯이 일단 할머니를 만나서 얘기해보고 그 다음에 생각해 볼까.

할머니가 혼자 산다는 아파트 현관에는 웬 여자구두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가 면접용 까만 색 구두를 신고 다닐 리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