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음(偶吟)

  • 장르: 판타지, 로맨스 | 태그: #서왕 #혁명가들 #까마귀 #궁궐 #연시
  • 평점×79 | 분량: 94매
  • 소개: 왕의 총애하는 후궁의 딸로 태어나 왕위를 이어받을 왕자로 길러진 ‘나’는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을 죽여야 하는 왕 노릇에 회의를 느낀다. 어느 날 사형장에... 더보기

우음(偶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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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과 함께 태어났다. 나를 잉태할 때 어머니는 꿈을 꾸었다. 커다란 검은 새가 어머니의 흑운 같은 오발(烏髮)에 내려앉았다가 진주뒤꽂이와 백옥비녀로 장식한 머리채에 발이 걸려 날아가지 못 하고 날개를 퍼덕이며 크게 울었다. 태몽을 전해 들은 부왕은 거북의 등딱지를 구워 조상신의 뜻을 물었다.

 

“최빈의 몸에서 아들을 얻겠는가.”

 

조상신이 신관의 입을 빌어 말했다.

 

“왕의 자식이 나라를 망칠 것이다.”

 

부왕은 조상신의 제물이 될 신녀와 동침했으나 죽어서 신께 바쳐진 신녀는 처녀였다. 누군가 신녀를 빼돌렸던 것이다. 부왕은 책임을 물어 신관을 참수하고 잘린 머리를 제단에 올렸다. 새로운 신관이 거북을 구웠다.

 

“최빈의 아이는 왕자가 될 것이다.”

 

어머니는 지독한 난산 끝에 탯줄이 목에 감긴 아이를 낳았다. 자년(子年) 자시(子時), 쥐의 해 쥐의 시간이었다. 나를 받은 어의와 의녀는 교살당했다. 내 출생을 목도한 죄였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

 

 

 

나를 낳고 아팠던 어머니 대신 유모가 나를 먹이고 씻기고 입혔다. 유모는 글을 모르는 벙어리였다. 내 주위엔 침묵과 고요와 적막 뿐이었다. 그게 싫었던지 유모는 저녁마다 후원에 고깃덩이를 던져 까마귀떼를 불렀다. 까마귀 무리에는 왕이 없었다. 노을진 하늘을 먹구름처럼 덮는 무질서한 오합(烏合)이 마음에 들었다. 유모는 감나무 가지에 앉는 까마귀로 점을 쳤다. 까마귀가 높은 가지에 앉으면 귀족이, 중간 가지에 앉으면 평민이, 낮은 가지에 앉으면 천민이 죽는댔다. 까마귀떼는 가지를 가리지 않고 빼곡하게 앉았고 유모는 바닥에 고기를 던져 까마귀를 나무에서 내려오게 했다. 고기에는 가끔 손톱이나 머리카락이 붙어 있었으나 아무도 어디서 들여온 무슨 고기인지 묻지 않았다.

 

 

 

내가 까마귀와 놀고 싶다고 칭얼대자 유모는 내 방에 황금새장을 걸어 주었다. 눈을 감고 검은 새들의 울음을 들었다. 새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울었다. 나는 울지 않는 새를 골랐다. 유모가 새의 속깃털을 잘랐다. 날개가 있어도 날아가지 못 하도록.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는 유모가 지어준 장식 없는 흰 비단옷을 입고 관(冠)을 쓰지 않은 머리에 관(棺)대신 까마귀를 얹고 새벽마다 왕비께 문안을 올렸다. 어머니를 닮아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허리가 버들처럼 가는 나에게는 유모가 지어 준 폭 넓은 옷자락이 어울리지 않았다. 높은 관을 쓰고 수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이복형제들보다 체구가 커 보이기는커녕 강보에 싸인 아기 같아 보일 뿐이었다. 자식이 없는 왕비는 왕자들이 오연하다 하여 새벽마다 찬이슬 맺힌 정원 박석 위에 나와 이복형제들을 도열시켜 문안을 받았다. 내가 왕위에 뜻이 없음을 보이고자 관을 쓰지 않고 흰 옷을 입어도 왕비는 늘 마지막에서야 마지못해 내 문안을 받았다. 새파란 새벽바람을 맞으며 입술을 물고 왕비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중궁전의 서 환관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늘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조아리고 종종거리며 두리번거리는 꼴이 쥐 같아서 보기 싫은 자였다.

 

“한갓 미물도 왕이 되실 분을 알아보고 복종하는 것이옵니까. 날개 있는 새가 날아가지 않고 머문다니 신묘한 일 아니옵니까.”

 

“서 환관.”

 

“네.”

 

내게 존칭을 붙이지 않는 저의가 흉악했다.

 

“혀 밑에 독을 감춘 채 입술에 꿀을 바르고 말하지 마라. 깃을 잘랐으니 날지 못 하고 나를 만만히 보니 내 머리꼭대기에 앉아있는 것이다. 미물도 아는 걸 네가 모를 리 없지 않으냐.”

 

서 환관에게는 시취가 배어 있었다. 머리 위의 까마귀가 서 환관 쪽으로 날개를 내리고 꼬리깃을 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내 후원의 새떼는 종종 죽음의 냄새를 좇아 서 환관을 따라 다녔다. 서 환관은 내게 궁궐 밖 사형장에 사는 아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와 한날 한시에 태어난 미친 여자의 아들. 내가 아들일지 알기 위해 부왕과 동침한 후 죽지 않고 살아서 출궁한 신녀의 아들. 내 아비가 죽인 자의 시체를 팔아 먹고 사는 나의 이복형제. 망국의 책임을 나눌 운명.

 

“그 아이를 만나보고 싶구나.”

 

“언젠가는 만나실 것이옵니다.”

 

“무슨 뜻이냐.”

 

서 환관은 검붉은 잇몸을 드러내며 소리 없이 웃을 뿐 답이 없었다.

 

“서 환관.”

 

“예.”

 

“내가 너의 역심을 안다.”

 

“무슨 뜻이시옵니까.”

 

“첫째, 조상신을 속인 신녀를 고하지 않았으며, 둘째, 여염의 아이를 감히 전하의 핏줄이라 칭했다.”

 

“첫째, 왕자의 어미를 보호하였으며, 둘째, 그 분이 전하의 아들이심을 증명할 수 있사옵니다.”

 

“궁 밖에서 태어난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 궁에서 왕과 왕자들을 제외한 사내들을 모두 거세하는 이유를 잘 알지 않느냐.”

 

“마마를 통해 밝힐 것이옵니다.”

 

“서 환관, 나는 내 앞날을 모른다. 왕이 되지 못 한 왕자들의 운명은 조상신이 아니라 새로운 왕에게 달려 있으니까. 그런데 이것만은 약조하지. 내가 널 죽일 거다.”

 

“그러시진 못 하실 것이옵니다.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은 그 비밀을 지키느라 너무 많은 힘을 들이기에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법이옵니다.”

 

“나에게 비밀이랄 게 있겠느냐.”

 

“마음이 있는 곳에 비밀도 있사옵니다.”

 

 

 

유모는 왜 내게 비밀을 알려 줬을까. 죽기 위해 비밀을 털어놓은 걸까 죽음을 예견하고 죽기 전에 진실을 알린 걸까. 말을 잃은 유모는 글자를 두려워했었다. 내가 글씨 쓰는 모습만 봐도 눈을 질끈 감고 도망갔다.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의 새들에게 소리 없이 호소하고 통곡하는 유모에게 내가, 그림을 가르쳤다. 궁의 화공에게 그림을 배운 나에 비하면 유모의 그림은 어린애 낙서 같았지만 나는 다 이해했다.

 

유모는 원래 주인의 글시중을 드는 계집종이었다. 그러다가 주인의 눈에 들어 아들을 낳고 비첩이 되었다. 유모의 주인이 충신이었는지 간신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는 글을 썼고 그의 비첩은 여느 때처럼 종이를 펴고 먹을 갈았다. 그 글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나도 그의 비첩도 모른다. 그 글이 역모의 증좌가 되었다. 그 글이 삼대를 멸했다. 여인들은 관비가 되고 사내들은 갓난아기라도 모조리 형장으로 끌려갔다. 계집종이 비첩이 되지 않았다면, 귀족의 얼자가 아니라 아비를 모르는 사생아였다면 살았을 아기도 그 날 죽었다. 어미는 아이를 잃고 말을 잃었다. 아직 젖이 마르지 않은 어미는 왕의 후궁이 낳은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왕의 아이가 자라서 글자 대신 말 대신 그림을 그리게 한 날, 죽은 아기의 어미는 궁 밖으로 끌려나가 손이 잘린 채 죽었다. 아기가 죽었던 그 곳이었다. 내 어머니는 내 비밀을 누설할 수도 있는 자를 원치 않았다.

 

“서 환관, 사형장에서 내 유모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다오.”

 

“장례비용은 무엇으로 주시겠사옵니까?”

 

“서 환관이 내게 지을 죄의 값을 미리 치르는 걸로 하지.”

 

서 환관은 그날 저녁 붉은 오낭을 가져왔다. 다섯 개의 주머니 안에 유모의 머리카락과 양손의 손톱, 양 발의 발톱이 각각 들어있었다. 유해는 까마귀가 날아드는 감나무 아래 묻혔다. 그날 밤을 새워 유모가 그렸던 그림을 글로 옮기고 주머니를 뜯어 책을 장정했다. 내가 지은 죄로 죽은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붉은 비단으로 감싼 책도 쌓일 것이다.

 

 

 

유모가 죽은 후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제일 검을 잘 다룬다는 무인이 내 스승이었다. 지금까지 내 스승들이 그랬듯이 머지않아 사형당할 운명이었다. 내 스승들의 죄목은 모두 하나였다. 역모. 내 어머니는 늙은 왕이 총애하는 후궁. 다른 후궁들은 어떻게든 내 주변을 모해하고 내 사람들을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려 했다. 스승은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나를 가르치라는 왕의 명령에 충성했다.

 

“스승님, 저는 장검을 배우지 않겠습니다. 전쟁에 나가 선봉에 서서 장검을 휘두르는 건 왕의 일입니다. 단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디를 찌르고 베야 고통 없이 빨리 죽을 수 있는지도.”

 

“그런 건 왜 배우시려는 것이옵니까. 암살이라도 하시려는 것이옵니까.”

 

“제가 자결해야 할 일이 생길까 봐 그렇습니다.”

 

스승은 내게 가르쳐줬던 대로 심장에 단도를 꽂아 자결했다. 대장군으로서 국경에 성벽을 쌓아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왕께 읍소했으나 정적들은 그가 국가를 불안케 하여 왕의 선정을 가린다고 모해했다. 그를 벌해달라며 보란 듯 머리를 바닥에 찧어댔다. 그들의 이마에는 피 한 방울도 맺히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의 죄를 물어 시신을 여섯 조각으로 찢어 사형장에 버렸다. 왕자들의 외척들이 기녀를 끼고 술잔을 돌리며 내 스승을 제거했다고 자축하는 동안 나는 스승의 꿈을 써서 붉은 비단으로 장정했다.

 

유모도 죽고 스승도 죽은 내 곁에서 죽지 않는 목숨은 까마귀 뿐이었다. 무리에 왕이란 게 없으니 왕이 되려는 새도 왕의 곁에서 권력을 탐하는 새도 왕의 아들을 질시하는 새도 없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감나무를 보곤 했다. 유모가 죽던 날 낮은 가지에 까마귀가 앉았던가 스승이 죽던 날 높은 가지에 까마귀가 앉았던가. 부왕은 가끔 내 처소에 들러 까마귀를 보곤 했다.

 

“까마귀를 다른 말로 효조(孝鳥)라고 부르기도 한다. 알고 있느냐.”

 

“예, 아바마마.”

 

“어미가 60일 동안 새끼를 먹이면 새끼가 자라 60일 동안 어미를 먹이는, 효심이 지극한 새라서 그렇다.”

 

잘못 아셨다. 까마귀는 불효조였다. 다른 새들은 둥지를 벗어나면 어미로부터 벗어나 날아가 버리지만 까마귀는 다 커서 둥지에서 나간 후에도 어미에게 먹이를 받아 먹었다. 어미나 새끼나 덩치도 비슷하고 까매서 분별할 수 없으니 어리석은 사람들이 새끼가 어미에게 반포지효를 행한다고 잘못 본 것이다.

 

“장차 왕이 되어 어미를 지켜야 할 네가 왕위에 뜻이 없으니 걱정이 많구나.”

 

벽을 검게 칠하고 붉은 비단책을 쌓아 올린 내실에서 늙은 부왕은 내 손을 잡고 한숨을 쉬었다. 저녁이 되었는데도 먹이를 주지 않았더니 까마귀 소리가 시끄러웠다.

 

“정녕 소자와 소자의 어미를 걱정하신다면 폐서인이 되어 출궁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 소자가 어미를 봉양하며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출궁한다고 아무도 널 찾지 않을 것 같으냐.”

 

“왕이 된다고 어미를 지킬 수 있겠사옵니까. 아바마마께서는 왕이신데도 후궁과 왕자들을 지키지 못 하시잖사옵니까. 소자가 어미를 살리기 위해 왕위에 오르면 왕권을 지키기 위해 아바마마의 다른 아들들을 모두 죽여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내 어머니가 입궁하기 전 총애하셨던 후궁의 아들에게도 아바마마는 똑같이 말씀하셨을까.

 

“지킨다는 게 무엇이옵니까.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옵서 소자를 지키기 위해 어의와 의녀들과 유모를 죽이셨사옵니다. 소자가 왕이 되면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신하들과 백성들을 죽여야 하옵니까. 왕이 하는 일이란 게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거라면 백정과 왕이 다를 게 무엇이옵니까.”

 

“백정은 백정의 운명을, 왕은 왕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게 다르다.”

 

“소자는 왕으로 태어나지 않았사옵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있는 것이옵니까.”

 

그날 밤, 어머니가 은밀하게 알려줬던 일이 처음 내 몸에 일어났다. 아무도 모르게 흰 옷에 묻은 피를 지웠다. 왜인지 모를 수치스러움에 울고 싶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불면증이 있었다. 가슴에 단도를 품지 않으면 까닭 모를 두려움에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잠에는 어둠에 묻혀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황금새장 속에 존재하는 검은 새를 생각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으면 어머니의 처소로 갔다. 어린애처럼 어머니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부왕과 지밀에 있었다.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궁녀로 입궁하여 후궁이 된 어머니에게는 부왕의 총애만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다. 어머니는 매일 백단향수에 목욕을 하고 사향을 패용하고 꽃차를 머금어 입에서 향이 나게 했다. 부왕이 처소에 들르면 늘 하얗고 갸름한 버선발로 달려나가 백옥 같은 이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며 맞이했다. 어머니가 지밀에 있는 동안 어머니의 내실에서 어머니의 옷을 입고 백옥이 장식된 흰 비단 허리띠로 잘록하게 허리를 조이고 어머니처럼 머리를 틀어 올려 진주잠을 꽂고 백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에 연지를 발랐다. 나는 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하나뿐인 아이. 거울 속의 나는 어머니와 닮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지친 기색으로 돌아온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러시면 우리 모자는 살 수가 없습니다.”

 

“어마마마,”

 

내 목소리가 어색했다. 늘 나직하게 낮은 목소리로만 말해야 했다. 내 진짜 목소리는 어떨까.

 

“어마마마, 욕심을 버리세요. 어마마마를 지켜 드릴게요. 우리 궁을 떠나서 살아요.”

 

“이 어미를 죽이고 나가세요.”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푸는 어머니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어릴 적 봤던 모습보다 수척하고 파리했다. 꽃은 시들고 사람은 늙는다. 어머니는 황혼이 오기 전 낮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었다. 내 옷을 갈아 입히고 화장을 지워주면서 어머니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 어미가 사는 이유는 오직 마마 뿐이옵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왕이 될 재목이라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어미가 총애받으니 왕이 되는 거라면.”

 

“누가 왕이 되건 어차피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왕 같은 건 없어도 되지 않사옵니까.”

 

왕비의 가문은 대대로 왕의 외척이 되어 왕을 조종했다. 그런 꼭두각시 왕들이 죽어서 조상신이 된다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새는 자기네들 뜻대로 소리내는데 사람이 멋대로 새가 운다고 하는 것처럼 아무 뜻 없이 갈라지는 귀갑에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을 붙일 뿐이다. 그걸 조상신의 뜻이라고들 한다.

 

“쥐의 운명을 타고난 자가 왕이 될 것이다.”

 

그 날은 아침부터 까마귀가 요란스레 울었다. 내가 후원에 고깃덩이를 던져도 굳이 어머니의 처소 쪽을 보며 불길하게 까악거렸다. 아침에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는 흉사가 있을 징조였고, 안채 쪽을 보고 울면 집안 여인들 간에 다툼이 있을 거랬다. 어머니가 유모를 죽이던 날도 이랬던가. 궁 안에서 자년자시에 태어난 왕자는 나 밖에 없었다. 불길한 날 나온 불길한 예언. 궁 밖의 그 아이도 자년 자시, 나와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

 

“어마마마, 오늘은 날이 흉합니다. 절대로,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래야 우리 모자가 살 수 있습니다.”

 

“세자 책봉을 미루란 말이옵니까. 조상신께서 저리 확실하게 말씀하셨는데 왜…”

 

“신관이 말했겠지요. 인간의 뜻이었습니다. 어마마마, 욕심을 버리세요. 소자는, 왕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궁 안에서 인형으로 사느니 궁 밖에서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으로요.”

 

어머니께 자년 자시에 태어난 아이가 또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유모를 죽였듯 그 아이를 죽일까 봐. 서 환관이 그 아이를 왕으로 앉히려는 흉계에 어머니가 농락당할까 봐 아무것도 하지 마시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그날 밤, 그 아이가 서 환관에게 이끌려 궁의 뒷문으로 들어오던 밤, 서 환관이 그 아이의 미친 어미를 산 채로 낡은 집과 함께 불태웠던 밤, 내 스승을 죽인 자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고 대장군의 자리를 차지한 외숙이 불탄 집에 갔던 밤, 그 아이가 어미가 죽는 동안 왕비에게 희롱당하던 밤, 서 환관이 보낸 군사들이 내 외숙을 왕이 될 자의 어미를 죽인 대역죄로 체포했던 밤, 내가 잠들지 못 하고 어머니의 흰 비단 허리띠를 둥글게 묶어 천장에 매달던 밤, 궁녀가 날 유혹했다. 오랫동안 내 글시중을 들던 궁녀였다.

 

궁녀는 내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댔다. 차가운 단도를 품어야 겨우 잠이 드는 내 이불 속을 파고 들었다. 어두운 이불 속에서 궁녀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처음 본 짐승을 길들이듯 팔을 뻗어 손끝으로만 궁녀의 둥근 가슴을 만졌다. 궁녀가 입 안에 연시를 넣어 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 심장처럼 말캉한 연시를 물었다. 달큰한 붉은 빛이 입 안에 달처럼 차올랐다. 질끈 눈을 감았다.

 

“마마, 무서운 이야기들만 쓰시니 못 주무시는 것이옵니다. 연시(戀詩)같은 걸 써 보시옵소서.”

 

“누구를 위해 써야 하느냐.”

 

“소녀를 위해 써 주시옵소서.”

 

“나를 연모하느냐.”

 

“네.”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외롭고 괴로워 꿈에서도 두려워하시고 근심하시는 것은 아옵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네게 줄 게 없다.”

 

“소녀는, 후궁이 될 수 없다면 지밀의 궁인이 되어서라도 마마께서 편히 주무시는 걸 도와 드리고 싶사옵니다.”

 

“죽으면 편히 잘 수 있겠지. 너의 연심을 내가 알겠다. 이만 가 보거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역심이든 욕심이든 연심이든 마음이 있으면 비밀도 있다. 연심을 품은 궁녀가 총총걸음으로 나갔다. 나는, 계속 비밀을 품고 남들처럼 살 수 있을까. 내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품으면 내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아 어머니의 궁에서 어머니를 기다렸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서 환관이 데려 온 미친 여자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아이가 정말 부왕과 동침한 신녀의 아들인지 자년 자시에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서 환관은 그 아이의 존재를 낮에는 새의 부리로 밤에는 쥐의 주둥이로 알렸다. 어머니는 외숙을 보냈다. 외숙이 도착하기 전 그 아이의 집은 이미 불타고 있었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왕자의 외숙이 진짜 세자를 죽이려 방화했다. 그가 그곳에 굳이 가서 불을 놓은 이유는 그 아이가 조카 대신 세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논리는 없었다. 겁박당한 왕, 잔인한 고문, 위증과 밀고. 외숙은 역적이 되었다. 부왕은 총빈이 연좌제에 얽히기 전 입맞추며 입에서 입으로 독약을 먹여 절명케 했다. 나는 내 처소로 돌아와 쌓인 책 위에 올라섰다. 어머니의 흰 비단 허리띠 안에 머리를 넣었다. 어머니는 내게 비밀을 주었고 나를 외롭게 했다. 내 주변에 아무도 남지 않게 했고 끝내 어머니마저 나를 떠났다. 그래도 어머니를 사랑했다. 단지 내 어머니라서. 어머니가 나를 나라서 사랑해 주었다면. 목을 매려던 순간 부왕이 문을 열었다. 나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 하는가.

 

“어찌하여 늙은 아비의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

 

“죄송합니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 하였습니다.”

 

“그런 마음 품지 마라. 네 어미와 약조했다. 너를 살리겠다고. 궁 밖으로 나가라. 너 혼자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거다.”

 

부왕은 내게 독약을 주었다. 어머니를 죽인 독이었다. 혹시라도, 삶보다 죽음이 더 편해질 순간이 오면 쓰라고 했다. 그건 부왕 자신에게도 해당되었다. 왕위를 물려준 상왕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자결이든 암살이든 죽어야 했다. 내가 살아서 궁 밖으로 나간다면 붉은 비단으로 장정한 책에 죽은 부모의 이야기도 써야 하리라.

 

궁녀가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어미의 상 중이라 만남을 거절했더니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고 세자가 들어왔다. 너였구나. 나와 한날한시에 태어난 아이. 그의 얼굴에는 부왕의 이목구비가 없었다. 너도 어미를 닮았구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프겠구나, 너도.”

 

어머니의 억울함을 항변하던 내게 그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처럼. 다정하게 ‘너’라고 했다. 너의 손을 잡고 널 보듬어 안고 위로 받고 애도하고 싶었다. 너와 나는 어미를 잃은 아이들이었다. 마음과 달리 말하느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