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이 돌아왔다 – 1 (제5회 ZA 문학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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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n of Steel

나는 슈퍼맨이다. 강철의 사나이이며 클립톤 행성의 마지막 생존자고, 내일의 사나이다. 나에게는 세상의 질서와 정의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나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선량한 시민들을 상대로 돈과 순결을 뺏으려고 하는 놈들을 응징한다. 가끔 크립톤 행성인으로써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조금’ 심하게 부상을 입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악당들이 감내해야 할 마땅한 대가라고 본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게는 숙적이 있었다.

렉스 루터.

CEO, 과학자, 전직 미국 대통령. 그는 자신의 막대한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매수한 후 경찰을 통해 나를 납치하였다. 범죄자라면 모를까 같은 편인 정의의 사도들에게 나는 차마 내 힘을 쓸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포박당한 채 렉스 루터의 본거지로 질질 끌려왔다.

렉스 루터는 한국에서 ‘정신병동’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교활한 책략이었다. 이 곳에 가둬놓으면 내가 어떤 말을 하던 아무도 믿지 않을 테니까. 거기다 놈은 철두철미하기까지 했다. 병원 깊숙한 곳 어딘가에 나의 유일한 약점, 크립토나이트를 대량으로 숨겨놓았던 것이다. 크립토나이트.

나의 고향 행성인 크립톤이 폭발할 때 행성의 중심에서 발생한 폭발로 인해 행성 내부의 광물들이 변화되어 태어난 광물 크립토니움(Kryptonium). 녹색 방사능을 내뿜는 이것은 나의 힘을 평범한 지구인과 똑같은 수준으로 약화시킨다. 이 크립토나이트로 내 힘을 억누른 후 놈은 이제 안전해졌다고 생각해졌는지 드디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대머리에, 하얀 가운을 입고 마치 의사처럼 위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놈의 약지에 크립토나이트가 끼워진 작은 녹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챘다는 걸 알면서도 렉스 루터는 뻔뻔하게 이렇게 내뱉었다.

“이건 결혼반지라네. 특이하지? 옥으로 만든 거야.”

그러고 내 눈 앞에 크립토나이트를 들이대기에 나는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놈을 때렸다. 놈은 피를 철철 흘리며 정신없이 빨간 버튼을 눌러댔고 그러자 놈의 부하들이 들어와 나를 옭아맸다. 반지. 크립토나이트로 만든 놈의 그 저주받을 반지만 아니었더라도 문제없이 다 때려눕혔을 텐데.

그러나 힘을 잃은 나는 속절없이 렉스 루터의 부하들 손에 붙들렸고 놈은 내가 아직 놈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한동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훨씬 잔인한 수단으로 나를 압박해 들어왔다. 나의 연인, 로이스 레인을 납치한 후 내 앞에 들이민 것이다.

로이스 레인. 나의 친구이자 연인.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는 유명 언론사인 데일리 플래닛의 사회부 기자다. 따라서 분명 미국에 있어야 할 그녀가 이 곳, 대한민국에 잇는 렉스 루터의 본거지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바로 내 눈 앞에.

“레인! 당신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요?”

그녀의 겁에 질린 사슴 같은 눈망울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주었다. 그녀가 렉스 루터의 손에 의해 어떤 수난을 당해왔는지 나는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당했을 고문이 그녀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로이스 레인이라는 것 마저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저는 로이스 레인이 아니고 이수영이예요. 당신은 슈퍼맨이 아니고 이름도 클락 켄트가 아녜요.”

나는 그녀를 제정신으로 돌리기 위해 나의 모든 정신적 힘을 동원했다. 내가 발생시킨 초전자파가 그녀의 망가진 뇌를 조금 복구시켰는지 긴 시간의 노력 끝에 그녀는 자신이 로이스 레인이라는 걸 인정했다.

“좋아요. 전 로이스 레인 이예요. 당신은 클락 켄트. 슈퍼맨. 자, 슈퍼맨. 당신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세요.”

나는 그녀에게 속속들이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지구에 왔는지, 어떻게 비열한 렉스 루터의 함정에 걸려들었는지.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고 가끔 기특하게도 내 말을 메모까지 했다. 그걸 보며 렉스 루터가 봉인한 자신의 정체성과 기억을 되찾으려는 것이리라.

너무도 애처로워 구속구만 없었다면 그녀를 꼭 끌어안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와 그녀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시간은 사악한 렉스 루터의 비밀 기지에서 보낸 시간 중에서 유일하게 값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저주받을 장소에는 루이스 레인 말고 또 하나의 어린 말동무가 있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이 곳에 갇혀 있었는데 그의 본명이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렉스 루터가 병원 안에 숨겨둔 크립토 나이트가 기억력한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만 본명이 뭐든 간에 뚱뚱하고 예쁜 보조개가 있는 청년 자신은 스스로가 걸 그룹 미스에이의 수지라고 굳게 믿었다.

TV에서 나오는 진짜 수지는 가짜고 자신이야말로 진짜라고 너무 굳게 믿어버린 이 젊은이는 어느 날, 친구들을 집에 감금한 후 자신과 그들의 불알을 한꺼번에 잘라버리려고 날뛰다가 이 병원에 갇히게 되었다. 실로 가엾은 정신병자였다. 그가 벽을 통해 내게 속삭였다.

“‘진짜’ 미스 에이가 뭔지 세상에 보여주려고 했어요.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요?”

나는 그 미친놈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진짜 수지는 네가 가짜라고 우겨대는 그 예쁜 소녀이며 너는 지금 머리가 몹시 아픈 상태라고. 그 뚱뚱이는 몹시 불만스러워했다. 그리고 밉살맞게도 이렇게 비웃었다.

“슈퍼맨이라니, 만화를 너무 본 거 아니야?”

그가 내 정체를 어떻게 눈치 챘는지는 모른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내 정신을 교란시키려고 렉스 루터가 내 옆방을 쓰는 ‘수지’에게 나에 관해 귀띔해 줬다는 것이겠지. 어쨌건 그 때만큼 내가 힘을 잃은 게 한스러웠던 때가 없었다. 내 원래 힘. 섬을 들어 우주로 날려버릴 수 있는 그 힘만 있었더라면 이런 시답잖은 감옥 따위 날려버리고 그 뚱땡이의 머리에 우주에서 가장 아픈 꿀밤을 먹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 놈이 얼마나 싸가지 없고 재수 바가지인 놈이건 간에 그는 로이스 레인을 제외하고 내가 몇 시간 이상 얘기를 나누는 유일한 상대였다. 나 자신에게 말상대가 필요해서 이기도 했지만 정신이 병든 사람을 고독 속에 내버려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어로로서의 골치 아픈 천성이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지났을까. 긴 시간 동안 진전된 것이라고는 ‘수지’와의 관계뿐이었다. 수 차례에 걸친 긴 대화 끝에 그와 나는 조용하면서도 극적인 타협을 이뤄냈는데 그 내용인즉슨 나는 그가 미스 에이의 수지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그는 내가 크립톤별에서 온 슈퍼맨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나는 그 뚱뚱한 놈의 진짜 정체가 수지라는 미친 소리 따위 단 한 움큼도 믿지 않았다.

‘자칭 수지’도 내 말을 믿는 척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놈 같으니라고. 하지만 우리 둘의 속내야 어땠건 협정은 타결되었고 우리는 그 지옥 속에서 우정 비슷한 것을 쌓아올렸다. 정신병자고 이상한 놈인데다 날 의심하고 있지만 언젠가 내가 힘을 되찾고 이 렉스 루터의 본거지를 때려 부수게 되는 날, 그도 함께 구해주겠다고 몰래 다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뤄낸 것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찢어죽일 렉스 루터는 여전히 건재했으며 연인 로이스 레인은 여전히 적에게 붙잡힌 채 내 정보를 캐내기 위한 첩보원으로 이용당하는 중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내 앞에 나타난 렉스 루터는 로이스 레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저 환자, 솔직히 가망이 없지 않아? 영 차도가 없잖아?”

그건 날 ‘제거하자’는 은어였다. 나는 레인에게 날 도와달라고 필사적으로 눈짓을 했고 레인은 그렇게 해주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지요.”

그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렉스 루터가 나를 꺼림칙한 눈으로 쳐다보자 이대로는 놈의 손에 꼼짝 못하고 죽고 말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날 구속하고 있던 줄을 끊고 그 놈을 제압하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놈은 생쥐처럼 날쌔게 내 일격을 피한 후 또 빨간 버튼을 눌렀다.

놈은 어느새 크립토나이트를 자기 부하들에게 주사해 그들의 덩치를 산만하게 바꾸어 놓았다. 렉스 루터의 부하들에게 잔뜩 짓눌린 채 나는 레인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크립토 나이트를 이런 식으로 막 쓰면 안 돼! 엄청난 재난이 닥칠 거라고!”

레인은 손으로 입을 가렸고 렉스 루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때 적게나마 차곡차곡 모아오던 크립토 행성인으로써의 힘을 일순간 써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 후 몇 주 동안 꼼짝 못하고 얌전히 침대에 묶여 있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힘을 잃고 무력해져가고 있었다.

마침내 구속구에서 풀려날 무렵에는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이제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날 완전히 제압했다고 확신한 렉스 루터는 자신의 계획에 시동을 걸었다.재난이 시작된 것이다.

시작은 국영방송의 짧은 단신으로부터였다. 시내에서 언어 능력을 상실한 채 ‘걸핏하면 사람을 깨물려고 드는’ 행려병자들이 출현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의 주의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부끄럽게도 처음 이 뉴스를 들었을 때는 이것이 렉스 루터의 음모라고는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의 악마적인 계획이 ‘행려병자’ 같이 볼품 없고 초라한 것으로 시작하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 챈 것은 병실 천장 한구석에 달려있는 TV 화면에서 군인들을 봤을 때였다. 가스마스크를 뒤집어쓴 젊은 병사들이 뭔가를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대는 장면과 척 보기에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국도를 따라 호송되는 모습이 방영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온통 화마에 휩싸인 도시라든가 인육을 먹는 사람들의 동영상 같은 자극적인 화면이 전파를 탔고 그와 때를 같이하여 무장한 경찰 기동대가 정신 병동 안으로 들어왔다.

기동대원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들은 ‘심각한 전염병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의사들을 데리러’ 이 병원에 왔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이 은밀하게 암시하는 바가 뭔지 알아차렸다. 렉스 루터가 자신이 만든 난장판을 피해 안전한 후방으로 이동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쥐새끼처럼 숨어 있다가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모든 질서가 상실될 때쯤 다시 나타나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젠장,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아무 도리 없이 병실 안에서 발만 동동 굴러야 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며 현 시간부로 모든 방송과 인터넷 서비스를 중지된다는 공고를 마지막으로 외부로부터의 모든 연락이 끊겼다. 그와 동시에 정신병동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병실 바깥에서 정체 모를 신음 소리와 함께 요란한 총소리,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나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격렬한 총성에 크게 고무되었는데 정신병동에 쳐들어온 것은 정부의 군대고 그들이 쳐들어 온 것은 마침내 렉스 루터의 진짜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 이 곳에 와서 나를 풀어줘.’

간절히 기도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날 구하러 정부군이 오지도 않았고, 날 죽이러 렉스 루터의 부하들이 오지도 않았다. 모든 시끄러운 소리가 그친 후로도 한참을 그러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병실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불러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마치 죽어서 무덤 속에 묻힌 듯 한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식사인 K-레이션 속 김치에 거뭇거뭇한 반점들이 생길 무렵 병실의 등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신없이 깜박이던 빛은 얼마 안 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전기가…… 끊겼어.’

혹시나 심정으로 단단하게 닫혀 있는 병실 문고리에 손을 댔다. 무거운 소리와 함께 날 몇 년간 구속하고 있던 두터운 철제문이 열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병실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돌아온 슈퍼맨을 맞이한 세상은 으스스할 정도로 조용했다.

2. First Floor

전기가 끊기자 좋은 일만 생긴 건 아니었다. 비단 병실 뿐 아니라 병원 안의 불이란 불이 전부 나가 버린 것이다. 힘을 쓸 수 없는 마당에 암흑천지라니, 곤란한 상황이었다. 기적을 빌며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X선 시야를 발동시켰다. 다행히 아직 힘의 잔량이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얼마 후 내 눈동자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만족스러울 정도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렉스 루터의 사악한 음모가 시작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벌떡 일어나 행동에 들어갔다.

감옥을 나가 복도에 섰다. 정신병동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운반용 침상들이 몇 개는 엎어진 채로 몇 개는 귀퉁이가 완전히 무너진 채로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종이와 정체 모를 액체가 바닥에서 뒤섞여 발걸음을 뗄 떼마다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듯 한 소리를 낸다.

어둡게 물든 벽은 내가 태어난 뉴욕 브롱크스 뒷골목처럼 이상한 문양들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 초시야가 발동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것들이 피에 젖은 손바닥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공포심을 애써 억제하며 초청각을 발동시켰다. 지구 전체의 소리를 듣고도 남을 힘을 지닌 귀가 청각 정보를 수집했고 결국 사방 100미터 이내에서 살아있는 것은 나 뿐이라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렉스 루터, 이 개자식! 레인은? 내 로이스 레인은 어떻게 된 거지?

“레인! 로이스 레인! 어디 있는 거요?”

레인을 찾아 필사적으로 뛰지만 대부분의 힘을 빼앗긴 채로는 기껏해야 개가 뛰어다니는 것 정도의 스피드 밖에 낼 수 없었다.

달리다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음을 눈치 챘다. 발바닥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이것은 가스가 끊어져 병원 전체의 난방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외부온도에 따라 실내가 영하권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몹시 심각한 상태다. 크립토 나이트의 영향으로 물리적 피해로부터 나를 보호해줄 슈퍼-아우라의 힘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힘은 서서히 돌아오겠지만 그 때까지 약해진 내 피부가 추위에 견뎌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햇볕을 쬐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 창문 근처에 몸을 쭈그리고 앉았다.

입에서 막 허연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발바닥이 잔디를 즉즉 짓밟는 소리, 그리고 윽윽 대는 묘한 신음 소리. 병원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초청력을 통해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해보고자 했지만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유리창 모서리 부근에 살짝 고개를 내밀어 바깥의 동정을 살피다 처음으로 그것을 목도하였다. 그것은 일단 예순은 넘어 보이는 늙은 남자로 청진기를 목에 걸고 있었다. 렉스 루터는 아니었다.

그것은 두개골이 박살난 채 주름진 뇌의 반구를 바깥으로 드러내 놓고 있었으며 거기서 흘러내린 검은색 피가 하얀 가운의 목 주위를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그것 주위에서는 수십 명이 넘어 보이는 인간 형상의 무리가 무리지어 비틀비틀 잔디밭을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의사도 있고, 병자도 있고, 경찰도 있고, 멀쩡한 보통 사람들도 있었지만 전부 어떤 형태로든 심하게 부상 입은 상태였다.

어떤 남자는 배가 갈라져 내장이 밖으로 끌려나와 있었고 어떤 여자는 먹다 버린 과자마냥 좌반신 대부분이 통째로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들의 피부는 물고기 배 같이 하얗고 눈동자는 하나같이 노란색이었다. 그런 몰골로 유유히 걸어 다니는 것을 보니 그들이 지구인이 아닌 어떤 것으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잔디가 밟히는 소리와 괴기한 신음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가운데. 쭈그리고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것들은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갑자기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크립토나이트 피폭.’

우리 행성의 힘이 담긴 그 광석은 지구인들의 힘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켜주지만 동시에 심각한 부작용을 동반한다. 비유하자면 그렇지, 운동선수들이 복용하는 스테로이드 같은 거라고 말하면 될까.

스테로이드가 운동 능력을 폭발적으로 강화시켜주는 반면 발기부전, 피부병, 공격성 증대는 물론 심혈관 압박으로 인한 심장마비까지 불러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크립토나이트 역시 그것이 부여해주는 힘에 대해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크립토 행성 출신 초인, 이를테면 나 같은 슈퍼맨이 아니라면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구인들에게 크립토나이트가 대량으로 노출되었던 일이 없어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으로 관측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 한 번이 아무래도 지금 일어난 것 같다.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은 렉스 루터가 욕심을 부려 크립토나이트를 대량 생산하려고 발악을 하다가 이런 사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결국 피해를 본 건 아무것도 모르는 죄 없는 시민들이 저렇게 변해버린 것이지. 렉스 루터! 이 개자식!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해졌다. 우선 렉스 루터를 찾는다. 그리고 그가 가진 크립토나이트를 파괴해 내 원래 힘을 되찾고 동시에 더 이상의 크립토나이트 누출 사고를 막는다. 그런 후 이 병원은 물론 세계를 돌면서 생존자들을 구하고 피폭자로 변해버린 사람들을 제압한다. 그 후, 로이스 레인을 데리고 크립톤 행성으로 떠나는 거다.

할 일이 명확해지자 힘이 솟구쳤다. 머릿속에서 흥겨운 가락이 울려 퍼졌다. 루룰룰루 한 번쯤은 생각 나 전화 하겠지 가끔씩은 내가 보고 싶겠지 바보 착각이었어 그걸 나만 몰랐어. 한참을 흥얼거리다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병원 어디선가, 진짜 노랫소리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If I were a boy 어렵지 않겠지

방귀를 뀌는 듯 한 음색이 층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다. 노랫소리가 커지는 것과 동시에 병원의 모든 불이 켜졌다. 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병원의 전력이 정상 복구된 것이다. 지구인 같았으면 어딘가에 나와 똑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신형 컴퓨터 수준의 연산과 정보 처리 능력을 대뇌 속에 보유하고 있는 슈퍼맨이다. 그래서 바깥의 피폭자들이 저 노랫소리를 듣고 병원 안으로 몰려올 경우 벌어질 일이 심각하게 염려되기 시작했다. 잔디밭에 있는 놈들만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지금 내 힘으로는 처리하기 버거울 것이다. 전력이 들어온 이상 어둠 속에 몸을 숨기는 계책도 쓸 수 없다.

살짝, 아주 살짝 눈동자 하나만 내밀고 바깥을 엿보았다. 그랬더니 역시나, 잔디밭 위를 돌아다니던 살아있는 시체들이 전부 병원 족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중 몇몇은 이미 현관 출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헤어지면 다 물거품처럼 다
사라지는 일처럼
If I’m over u 너처럼
Na na nana nah

멍청한 노랫소리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커지고 있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 목소리인데 긴장한 탓인지 누구의 것인지 구별이 가질 않는다. 렉스 루터인가, 아니면 그 부하? 놈이 나를 곤경으로 몰려고 저 피폭자들을 병원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렇게 되면 병원 안에 있는 놈도 위험해질 텐데! 설마 이미 이 병원을 떠난 건가? 아니면 저 피폭자들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건가?

순간 발자국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분명 뒤에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된 벽과 창문이 있을 텐데. 순간 유리를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폭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앞에서 나를 바라보며 창문을 깡깡 두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 사이 힘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이제 치타 정도의 스피드는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이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왼쪽 유리창이 와장창 깨지면서 팔과 머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크립토나이트에 피폭되기 이전에는 어여쁜 처자이자 어엿한 간호사였을 여인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눈을 노랗게 물들이고 아무거나 물어뜯고 싶어 날뛰는 짐승일 뿐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층계를 뛰어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그 여인은 어느새 창을 넘어 병원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깨진 유리조각이 배를 갈라놓아 십이지장이 바닥으로 길게 늘어졌고 거기서 흘러나온 끈적끈적한 검은 피가 허벅지와 정강이는 물론 예쁜 구두까지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크립토나이트의 영향이 아직 남아있는 걸까. 그것은 걷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빨랐다. 2층으로 연결되는 비상구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나는 여성 피폭자에게 붙들렸다.

차가운 손이 내 발을 붙드는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것이 광포하고 탐욕스런 얼굴로 내 왼쪽 복숭아 뼈를 향해 검붉은 이빨을 내리 찍으려는 게 보였다. 피폭자의 앞니가 박히기 몇 초전 나는 곡예처럼 몸을 뒤틀어 그녀의 일격이 빗나가게 했다. 그 후 다른 쪽 발로 그녀의 얼굴을 내리찍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그녀의 정수리를 마구 가격한다. 그녀의 얼굴이 바닥에 부딪치며 이가 부서지고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어떻게든 살아남고야 말겠다는 본능이 아니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참혹한 죄책감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무리 크립토나이트 피폭자라지만 여성을 구타하다니! 그것도 정의의 초인이자 이 세상 모든 선의 대변자인 내가 말이다. 내 힘은 여자의 대갈통이나 부수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란 말이다. 렉스 루터, 이 개자식아!

이별이 쉽겠지
If I’m over u 어렵지 않겠지
헤어지면 다 물거품처럼

그리고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너, 너도 포함되는 말이야! 찾아내면 싸대기를 호되게 후려쳐줄 테다. 얼굴이 거의 부서졌음이 확실한 여자 피폭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달려들 기세였다. 더 끔찍한 사실은 바로 밑 계단에서 피폭자들 네댓명이 더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의 정수리를 계속 발로 내리찍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혹시, 혹시 그 힘이 돌아왔다면 아직 희망은 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처럼 더럽고 추잡한 공격을 하지 않아도 저 피폭자들을 무찌를 수 있다. 우선 숨을 있는 힘껏 들이킨 후 잠시 시간을 들였다. 그리고 한꺼번에 밑에서 올라오는 피폭자들을 향해 뿜어냈다. 입김만으로 태양을 이동시키고, 재채기만으로 은하계를 파괴할 수 있는 내 슈퍼 브레스의 힘이 조금이라도 돌아왔다면, 깔끔하고 신사적으로 저 피폭자들을 정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아직 그 힘은 돌아오지 않았다. 피폭자들은 아무 해도 입지 않고 차곡차곡 계단을 올라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슈퍼 브레스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눈에서 발사하는 열시선도 마찬가지겠지. 깨끗하게 포기한 채 나는 최후의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여자 피폭자의 관자놀이를 내리찍었다. ‘꾸엑’하는 역겨운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나는 온힘을 다해 뒤로 날아올랐다.

다행히, 천만 다행히 비행 능력이 아주 조금은 돌아왔는지 나는 계단 3개 정도를 한꺼번에 뛰어 순식간에 비상구 앞에 착지했다. 단단한 바닥에 수십 차례 얼굴을 추돌시킨 여자 피폭자는 눈알 두 개가 모두 빠져나온 상태였다. 그러나 그 사이 가장 선두의 피폭자가 어느새 코 앞까지 도달해버렸으므로 나는 쏜살같이 이층으로 들어간 후 비상구의 문을 닫았다. 서서히 뒤로 물러서다가 엘리베이터에 등을 부닥치고 주저 앉았다.

여자의 얼굴을 때렸던 발목은 부풀어오른 채 통증을 전해온다. 주위에는 입구를 막을 수 있을만한 무거운 물건, 하다못해 소화기 하나 없는 상태다. 만약 저 피폭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나는 꼼짝없이 저놈들에게 잡혀 먹으리라. 한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앞의 ‘EXIT’ 글자를 주시했다.

드디어 놈들이 이곳까지 도달했는지 비상구문을 쾅쾅 치고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도 문고리를 잡아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오직 성난 목소리로 울부짖거나 문을 긁어댈 뿐이었다. 크립토나이트의 영향으로 불사의 지구력과 민첩성을 얻은 대신 지능은 퇴화하고 만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아픈 발목을 부여잡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다 사라지는 일처럼
If I’m over u 너처럼

노랫소리는 아직도 들려오고 있다. 초청각을 쓸 필요도 없이 지금 내가 있는 이 층에서 나고 있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다. 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이 누군지 모를 바보 천치 자식아!

3. Second Floor

이층에도 환하게 불이 들어온 상태라 그 전경이 똑똑히 내다보였다. 이 곳의 병실들은 꼭 감방처럼 쇠창살이 달린 철제문이 달려 있었다. 잠겨 있긴 했지만 평범한 두께의 평범한 문이 달려 있던 1층의 내 병실과는 그 삼엄함의 수준이 다르다. 여기에도 히어로들이 갇혀 있단 말인가. 렉스 루터가 나보다 더 경계하는 정의의 사자들이? 갑자기 흥미가 솟았다.

I need your help 어서 구해줘
너에게 빠져버린 내 맘을

호기심을 방해하듯 그 지긋지긋한 노랫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노래 부르는 바보가 이층 어디에 있는지는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앞에 피폭자들이 우르르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바보한테 문을 막아놓는 지혜는 있었는지 피폭자들은 두꺼운 철문 앞에 모여있을 뿐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시체와 피가 즐비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 문제의 그 장소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인 의료용 카트 뒤에 숨었다.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들은 대부분 경찰이나 군인들이었는데 나는 그들의 몸이 심하게 파 먹힌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크립토나이트의 피폭 부작용에는 식인 현상도 있단 말인가.

I need your love 내게로 와줘

가까이 다가서자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방 앞에 걸린 명판이 보였다.

‘방재실’

방재실 문은 다른 병실들과는 달리 평범한 출입문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피폭자들은 그걸 거칠게 두드리며 성난 목소리로 울부짖는다. 그러자 노랫소리도 지지 않겠다는 듯 덩달아 커져간다.

이렇게 있다간 숨도 못 쉬겠어
Help me

“이봐.”

엄청난 소음에 섞여 처음에는 알아듣질 못했다. 철을 콩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서야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 누구야?”

대각선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철창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거기 있는 거 사람 맞지? 노래 부르는 게 너야?”

“아니, 내가 아니오.”

제대로 된 대화가 가능한 걸로 봐서 피폭자는 절대 아니다. 밀폐된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걸 보면 이 남자도 히어로인 걸까? 히어로라서 크립토나이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걸까?

“나는 슈퍼맨이오. 당신은 누구요? 배트맨? 원더우먼?”

한 때 나와 같은 세계에서 활약했던 영웅들 중 아는 이름을 주워섬겨보았다.

“XX,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문 열어! 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야!”

슬프다. 이 안에 갇힌 게 초인인지, 아니면 그냥 평범한 정신병자인지 구분이 안 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 사람을 구해야 한다. 그게 히어로의 사명이니까. 나는 아픈 발목을 끌고 대각선으로 돌아가 그 사람 닫힌 병실 문을 당겨보았다. 꿈쩍도 안했다. 내 쪽은 전기가 끊기자마자 자동으로 열렸는데. 여기는 그것하고 다른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걸까.

“문이 열리지 않소. 혹시 그대의 슈퍼 파워는 전부 소진되어 버린 거요? 힘으로 이 문을 부술 수는 없소?”

“아까부터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이 정신병자야!”

문에 올렸던 손을 뗐다. 방금 이 말은 흘려들을 수 없다. 정신병자라니. 렉스 루터가 나를 세뇌시키기 위해 썼던 단어 아닌가? 이 남자가 렉스 루터의 부하일 가능성이 생겨버렸다.

“네 놈의 정체를 정확히 밝혀라. 렉스 루터가 고용한 자인가? 그 자가 슈퍼맨을 해치라고 보냈나?”

“이 병신아, 무슨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어! 난 대통령이야! 대한민국 1990대 대통령! 너 이 새끼! 넌 나가자마자 투옥이야. 사면 없는 투옥인 줄 알아! 광복절에도 나올 수 없게 만들 거야!”

병실 안에 갇힌 자가 미친 듯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히어로가 아니라 그냥 정신병자였구나. 그래도 구해주긴 할 거지만, 온 몸에 힘이 쫙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궁금증이 일었다. 렉스 루터가 왜 정신병자들을 자기 본거지에 모아둔 걸까?

“빨리 문 열라고오오!”

그 자는 마침내 큰 소리를 질렀다. 더 안 좋은 것은 그 소리에 공명하듯 다른 병실에서도 각자 울부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핵미사일의 제조공식은 E=mc…”

그 와중에도 방재실에서는 노랫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에게 빠져버린 내 맘을
I need your love 내게로 와줘

피폭자들이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큰일이다. 그 순간 척추가 굽은 소년이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내 소리를 들은 걸까 아니면 내 냄새를 맡은 걸까?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은 나를 눈치 챘다. 소년은 이상한 걸음걸이로 여자는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다리를 질질 끌고 있었으므로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히 내가 숨어있는 카트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고 피할 수 있는 시간은 많아봐야 몇 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들아!”

그 때, 맞은편 병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아들. 칼-엘”

몇 십년간 누구도 불러준 적이 없던 내 원래 이름을 듣고 순간 눈물이 날뻔 했다. 저 곳에 갇혀 있는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누구요? 당신 설마…… 크립톤 행성인 인거요?”

“벌써 나를 잊었느냐! 나다. 네 아비다. 크립톤 행성의 조-엘이다.”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크립톤 행성이 폭발할 때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설명은 나중에 하마. 지금은 내 말을 잘 들어라. 너는 이대로 쭉 저 끝까지 가거라. 거기 보면 계기판이 하나 있어. 거기에 ‘5’라는 숫자가 새겨진 버튼이 하나 있을 거다. 그걸 눌러라. 그러면 내 감방 문이 열릴 게다.”

“어느 쪽 끝이죠?”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계기판은 복도 양 쪽 끝에 다 달려 있으니.”

“하지만 아버지…… 지금 저는 크립토나이트의 영향 때문에 힘을 쓸 수가 없어요. 렉스 루터라는 악당이 저한테서 힘을 빼앗았어요.”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 피폭자를 바라보았다. 카트가 내 몸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최후의 순간 먹잇감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지금 피폭자 한 명이 제 앞을 서성거리고 있어요!”

“이런 등신! 옆에 뒈져 있는 경찰 놈 총을 빼앗아! 그걸 쓰라고!”

아버지의 것으로 들리지 않는 천한 음성이 들렸다. 이럴 수가. 렉스 루터가 아버지의 뇌에도 뭔가 손을 쓴 건가? 큰 소리를 듣고 소년 피폭자가 아버지의 감방 앞으로 지그재그로 걸어갔다. 아버지는 한동안 자신의 언사를 몹시 후회하는 듯 한 분위기였다.

“미안하구나. 여기 너무 오래 갇혀서 고문 받다 보니……”

이해한다.

“하지만 칼-엘. 아들아. 지금 믿을 수 있는 건 너 밖에 없구나. 옆에 누워 있는 시체한테서 총을 빼거라. 그리고 그걸로 좀비들을 해치워. 할 수 있지?”

“좀비요? 그게 뭐죠?”

“괴물들 말이다! 지금 어정어정 걸어 다니고 있는 저 시체들!”

나는 그제야 아버지 말이 뭔지 알아들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이 확실히 내 아버지 조-엘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총이라! 산더미 같은 군인과 경찰들 시신을 보면서도 왜 그 생각을 못했던 걸까. 슈퍼맨인 나보다 머리가 좋으려면 같은 크립톤 인이자 행성 최고의 과학자였던 내 아버지밖에 없겠지.

나는 관자놀이에 구멍이 난 채 피바다 속에 누워 있던 경찰 한 명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나는 서투른 솜씨로 안간힘을 다해 총을 장전했다. 방아쇠를 당기자 땀이 눈 속으로 흘러들었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지만 총이란 건 정말 히어로한테 어울리지 않는 무기다.

총알은 소년의 이마에 정중앙에 박혔다. 소년은 뻣뻣하게 굳은 채 앞으로 푹 쓰러졌다.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지고 말았는데. 총소리 때문에 이 층에 있는 피폭자 전원이 날 발견해버린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노래 부르는 놈도 구하고, 여기 갇혀 있는 다른 히어로들도 구하고, 무엇보다 아버지를 구해야 하는데! 일단 아버지가 시킨 대로 복도 끝으로 향한다.

아버지 말씀대로 계기판 비슷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바로 앞의 병실 문이 삐걱 열리며 피폭자 한 명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에 제대로 대처할 시간을 벌 수 없었다. 권총을 쥐고 있었지만 미처 장전할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총의 손잡이 부분을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해 피폭자의 관자놀이를 내려쳤다.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왼쪽 관자놀이가 부서진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병실로부터 뛰쳐나온 걸 보면 분명 여기 갇혀있던 히어로 중 한 명이었으리라. 나는 나와 같은 사명을 등에 이고 외로이 악에 맞서 싸우던 친구를 무참하게 으깨어버린 것이다. 제기랄!

광포해진 나는 더 이상 이것저것 가리려 하지 않았다.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방아쇠를 잡아당긴 후 총을 휘갈기기 시작했다. 그 때 피폭자들과 나 사이의 거리는 겨우 몇 미터밖에 안 되어 아무리 정신없이 쏴 갈기는 상태라도 충분히 맞힐 수 있는 거리였다.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피폭자들의 머리가 날아갔다. 두개골을 관통당한 피폭자들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으나 팔이나 다리, 사타구니 같이 머리 외의 부위에 총을 맞은 피폭자들은 여전히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체내에 들어간 크립토 나이트는 신경계통이 자리 잡은 대뇌에 응집되는 것 같다. 초시야와 컴퓨터 같은 대뇌를 이용해 총알의 궤도와 피폭자들의 움직임을 예측한 후 그들의 머리를 향해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역시 아직 능력이 백퍼센트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적지 않은 탄환이 목표물에서 엇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피폭자들을 쓰러뜨렸고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 계기판에서 ‘5’라는 숫자가 새겨진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누른 순간 덜컹 하는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수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재실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문은 활짝 열린 채이다. 맙소사. 노래 부르던 멍청이가 바로 ‘수지’였단 말인가. 피폭자 중 몇 명이 뒤를 돌아보는 게 보인다.

“멍청한 녀석! 도망가! 어서!”

‘수지’는 겁먹은 얼굴로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뒤로 꽈당 넘어져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피폭자들이 저 놈보다 민첩할 것 같다. 그런 내 느낌을 뒷받침하듯 후미에 서 있던 피폭자들은 빠른 속도로 ‘수지’와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그 때 또다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갇혀있던 감방에서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 남자는 도저히 피폭자라고는 볼 수 없는 날랜 몸놀림을 보여주며 반대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수지’를 쫓던 피폭자 중 몇 명이 무리에서 갈라져 남자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 개 같은 것들!”

아버지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수지’ 바로 곁에 멈춰선 채 바닥에 쓰러져있는 경찰의 허리춤에서 총을 뽑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총에 의지하려고 하다니, 아버지도 나처럼 힘을 거의 다 빼앗긴 걸까. 하지만 정의로운 크립톤인이라면 상황에 관계없이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옆에 누워 있는 뚱땡이를 좀 구해주세요!”

그러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아버지는 ‘수지’를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경찰 시체에서 총을 뽑아내는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지 아버지는 갑자기 일어나 홀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나는 아버지와 ‘수지’를 향해 다가서던 피폭자 중 몇 명의 뒤통수를 쏘아 쓰러뜨렸다.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수지’는 바닥에 누운 채 육수 같은 땀을 뻘뻘 흘리며 두툼한 목덜미를 나와 아버지 쪽으로 연방 돌려대고만 있었다. 바보 녀석 같으니!

“뭐해! 얼른 이 쪽으로 와!”

아버지는 뭔가 할 일이 있으신가 보니 저 녀석은 내가 챙겨야겠지.

“조…… 좀비가 길을 가로막고 있잖아요.”

멍청한 겁쟁이 같으니라고! 챙겨주는데도 한도가 있다. 슈퍼맨인 내가 저열하게 총기까지 써가며 널 구하려고 하는데, 그 정도도 스스로 알아서 못한단 말이야! 못난 ‘수지’ 년, 아니 놈 때문에 참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빠질 찰나, 철컹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며 이층에 있는 모든 병실의 문이 열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을 찾다가 맞은편 끝에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벽에 한 쪽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계기판은 복도 양쪽 끝에 모두 있다고 하셨었지. 병실 문을 연 게 아버지인 걸까?

“주 예수를 믿으라! 강림의 날이 가까워져 왔으니!”

“비서실장을 불러! 저 놈들을 청주 교도소에 처넣으라고 해!”

“여보? 여보? 여기가 어디야?”

흰색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병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 렉스 루터가 가둬놨던 히어로들인가! 그렇군! 아버지는 저들을 풀어주시려고 한 거야? 하지만 저들도 힘을 다 빼앗겼을 텐데.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 얌전히 갇혀 있었을 이유가 없으니까. 아무리 히어로들이라도 힘이 없는 상태에서 피폭자들과 맞붙는 건 위험하다.

“어서 도망치시오! 어서!”

날 본 히어로 중 한 명이 발악하기 시작했다.

“저 놈 말 믿지 마! 저 놈은 국가 반역자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이 층에 들어오자마자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던,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이라고 믿던 그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풀려나온 사람 중에는 히어로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그 자가 시끄럽게 날뛰자 다른 사람들도 행동도 마구잡이가 되었고 피폭자들은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제일 처음 희생양이 된 건 ‘자칭’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피폭자들에게 덮쳐진 채로 볼살을 물어뜯기고 눈알을 뽑아 먹혔다. 피폭자들은 그 광경을 보며 절규하는 사람들도 공격했다. 발버둥치는 팔다리를 붙든 채 살을 물어뜯기 위해 애썼다. 그들의 이빨이 옷을 찢고 살 안으로 파고들 때 사람들은 공포의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좀비들의 입이 그들의 아래턱과 윗 턱을 깨물어 부숴버리는 순간까지 그치질 않았다. 인간의 뼈와 살을 물어 삼키는 소름 끼치는 소리, 그리고 피비린내가 사방을 메워가기 시작한다. 피폭자들에게 물어뜯긴 사람들 중 몇 명은 피폭자들과 똑같이 어정대는 걸음걸이로 걸으며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했다.

“빌어먹을! 힘만 다 돌아왔어도…”

아니, 원래 힘의 십분지 오만 있어도 피폭자들을 전부 쓰러뜨리고 히어로 친구들과 환자들을 전부 구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의 나는 꼴사납게도 괴성을 지르며 손에 들린 이 비열한 금속성 무기의 방아쇠를 연신 당겨대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아버지라면….크립톤 행성, 아니 은하계에서도 손꼽히는 두뇌를 가진 아버지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아버지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어떻게 하죠?”

아버지는 여전히 맞은편에 가만히 서 계셨다. 뭘 하시는 거지? 초시야를 발동했다. 아버지는 사람들이 잡아먹히는 광경을 멈춰 서서 지켜보고 계셨다. 자기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쇼크를 받으신 건가? 그럴 때가 아닌데!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저를, 저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잠시 후, 아버지는 씩 웃으셨다. 믿을 수 없게도, 이 지옥도를 눈앞에 두고 너무나 기분 좋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셨다. 맙소사, 지금 내가 뭘 본거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둔중한 몸뚱이 하나가 내 몸을 향해 달려들었다.

지구인보다 100배 우수한 반사 신경이 아니었더라면 피폭자 중 하나로 착각하고 살집 많은 그 몸을 벌집으로 만들어줬으리라. 하지만 그건 피폭자가 아니라 ‘수지’였다. 피폭자들이 병자들에게 달려드는 통에 만들어진 틈새 사이로 도망온 것 같았다.

“오빠, 어서 여기서 도망가요.”

그 녀석은 백 킬로는 넘을 것 같은 몸뚱어리로 나를 바로 옆에 있는 층계 방향으로 질질 끌고 간다.

“무슨 헛소리냐! 사람들을 구해야!‘

“이미 사람은 없어요! 시체 아니면 좀비뿐이라고요!”

또다.

아버지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왜 다들 피폭자들을 ‘좀비’라고 부르는 거지?

4. Third Floor

삼층 비상구 문을 열자마자 나는 피폭자와 딱 맞닥뜨렸다. 피폭자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정말 엄청난 냄새가 났고 머리에 난 구멍에서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와 발목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부는 노란 크레파스 같았고 얼굴에 핏줄이 거미줄처럼 도드라졌는데, 그 중심에 눈동자가 사라진 눈자위가 대왕 거미처럼 달려 있어 소름이 끼쳤다. 그 피폭자는 잠시 서서 킁킁거리더니 좀 전보다 성급한 걸음걸이가 된 채 앞으로 아장아장 부지런히 걸어 나갔다.

그것이 걸어 나간 방향에는 피폭자들 무리가 네 다섯 정도 모여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층의 피폭자들에 비해 그 숫자가 현격히 떨어진다.

“오빠, 여긴 좀비가 별로 없네요…….”

내 겨드랑이 사이에 목을 끼운 채 내 몸을 떠받치고 있는 ‘수지’가 끙끙거리며 말한다. 본인 입으로 청순미와 성숙미를 모두 갖췄다고 주장하는 몸에서 역겨운 땀 냄새가 풀풀 풍긴다.

“좀비라니, 그게 도대체 뭐지?”

‘수지’는 입을 딱 벌렸다.

“이 마당에 어떻게 그런 걸 모를 수 있죠?”

‘수지’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전 세계에서 감염된 시체들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바이러스가 인간 몸에 들어가면 고열과 출혈을 동반한 통증을 일으키고 몇 시간 만에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 후 일정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죽은 자들이 다시 일어선다. 그것이 바로 좀비다.

좀비들은 인간을 식량으로 삼으며 걷다 살아 있는 것들을 보면 모조리 공격한다. 인지 기능도 없고 어떤 형태의 커뮤니케이션도 불가능하다. 좀비들의 목적은 인간을 공격해 멸종시키는 것이며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들의 두개골을 부숴버리는 것이다.

시체들이 살아나 땅 위를 걷고 우리를 죽이고 있다, 라.

나는 렉스 루터의 교묘한 언론 호도 방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크립토나이트 피폭을 그렇게 설명했군.

“그래서 너도 세뇌당한건가. 렉스 루터에게…”

“네? 세뇌요?”

나는 ‘수지’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우리 행성에서 나온 광석 크립토나이트와 그 효력,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렉스 루터의 계획에 대해……

“휴우. 난 또 뭐라고. 그 같잖은 슈퍼맨 스토리였구나.”

“뭐라고?”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