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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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와 맞닥뜨린 건 아파트 단지에 설치된 방음벽 근처에서였다. 등굣길. 막 코너를 돌았을 때 하얀색 플라스틱 안대를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고운눈 안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방향을 알려주려고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그가 채율의 입을 틀어막았다. 능소화 넝쿨 뒤로 끌려 들어갔다.

‘무는 남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요즘 한창 출몰한다던 변태였다. 바바리 맨은 못 볼 곳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지만 무는 남자는 소녀들의 팔목을 깨물었다. 변장술이 뛰어나서 아직 누구도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다.

송곳니가 오른쪽 팔목을 아프게 파고들어 왔다.

채율은 몸부림을 쳤다. 남자가 입은 알로하셔츠 깃을 휘어잡았다. 우두둑 버튼이 떨어졌다. 셔츠 깃 사이로 뱀처럼 뒤엉킨 검은 색 곡선이 보였다.

‘트라이벌 타투…….’

여고생의 살결을 쪽쪽 빨며 탐닉한 후에야 변태는 떨어졌다. 막대 사탕을 꺼내 입에 물려주기까지 했다. 소문대로 체리맛이었다. 목캔디처럼 맵고 알싸했다. 폭력적인 단맛의 울타리를 넘어 남자는 사라졌다.

채율은 치한이 증발한 쪽을 향해 사탕을 집어 던졌다. 가로등을 맞고 튀어나온 사탕은 정확하게 반으로 쪼개져 땅에 떨어졌다.

단지 밖으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차 안에서 대충 지혈을 하고 손수건으로 묶었다.

오늘은 서류상으로 전교생 95퍼센트가 희망한 하계 보충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학년을 가리지 않고 똑같은 교복을 입은 개미들이 줄줄이 경사진 진입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복장단속을 하던 선도부원이 있는 곳에서 택시를 세웠다. ‘선암여고’라 씌어진 명판이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다정스런 모교의 이름이겠지만 채율에게는 숨기고픈 전과에 불과했다. 국조 단군상과 교훈석을 사이를 가로질러 학교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다리도 휘청휘청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서 하소연을 하고 싶다. 하지만 통화가 되는 사람이 없었다.

아빠는 회사에 있고, 엄마와 오빠는 지난 달 잠깐 한국에 들어 왔다가 다시 출국해 버렸다. 중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학적부 관리를 위해 증권 캠프니, 전경련 캠프에 참석하느라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과는…….

드르륵. 교실 문소리에 급우 몇이 뒤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그뿐, 데면데면 고개를 돌렸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과는 1학기 내내 인사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스스로 선택한 바였다. 채율은 이제 곧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다. 2류 학교 아이들과 친해질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롱샴 책가방을 가방 고리에 걸고 영어 교재와 MP3를 꺼냈다. 입시 실패를 위로하며 아버지가 사주신 핑크색 소니 NWZ-S455 MP3는 채율이 어디를 가든 반드시 챙기는 애장품 1호였다. 주로 영어 듣기 파일을 재생시키거나 과외 선생님의 강의를 녹음하는 데 사용했다.

이어폰에서 MOT의 「서울은 흐림」이 흘러나왔다. 양수처럼 부드러운 선율에 맞춰 호흡을 진정시켰다.

1교시부터 영어였다. 영어 담당 박창순 선생님은 독해 문제집을 하나 선정해서 돌아가며 읽고 해석하게 한다. 중3때 이미 토플 250대를 넘겼던 채율은 영어 시간마다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지루하기는 2교시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수학 김승국 선생님은 1학기 복습을 한답시고 고난도 프린트 문제 풀이만 했다.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 태반이 졸거나, 장난을 치는데도 못 본 체 설명만 계속하고 있다.

교실을 장악할 능력이 없는, 학원이었다면 학생과 학부모의 탄핵을 받아 진즉에 내쫓겼을 무능한 교사였다.

에어컨은 고장 났는지 자꾸만 미지근한 바람을 토해냈다. 외고 입시에 성공했었더라면 지금쯤 엘리트 친구들과 함께 캠프에 참석하고 있었을 터였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질 않을 소중한 청춘을 영양가 없는 수업으로 탕진하고 있다는 게 비통했다. 상처는 계속 욱신거렸다.

‘병원에 가보지 않아도 괜찮을까?’

손수건을 들춰보았다. 치흔 주변으로 검푸르게 멍이 올라와 있다.

“안채율! 너도 무는 남자한테 당했냐?”

뒷자리에 앉은 내신 9등급이 어깨를 쳤다. 형식만 의문문일 뿐 과도한 성량을 집적시킨 사실상 보도였다. 졸고 있던 교실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우리 반 애가? 진짜?

“무는 남자라니?”

김 선생님이 프린트 물을 교탁에 내려놓으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든 수업시간을 줄여보고자 너도나도 침을 튀겨가며 신종 변태에 대한 15분 분량 오디오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피해자인 채율은 입도 벙긋할 필요가 없었다. 김 선생님 허락 하에 양호실에 갈 수 있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종례시간 직전, 담임선생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울렸다.

“1학년 7반 안채율, 2학년 1반 오유진, 3반 서민지, 4반 신보람, 은진경, 3학년 3반 도현정, 5반 마슬기, 11반 유하현 지금 호명된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후 1학년 7반 교실로 오기 바랍니다. 다시 말합니다. 1학년 7반 안채율…….”

정식교사 발령을 받은 지 2년밖에 되지 않는 정동수 선생님은 서른이 된 올해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초짜였다. 피곤할 정도로 반 아이들을 각별하게 대하는 면이 있다. 교무실로 돌아간 수학 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흥분한 모양이었다.

“내일 하면 안 돼요? 저 오늘 과외 가야 하는데…….”

“금방 끝낼 테니까. 걱정 마.”

팔에 든 멍을 보고 동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책상 위에는 인쇄된 A4용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무는 남자에게 기습당한 상황을 육하원칙에 맞춰 쓸 수 있게 칸이 나뉜 용지였다. 진술서는 빠르고 성의 없이 작성되었다. 최대한 자세하게 쓰라는 당부가 무색했다.

‘하교시간이라 그런 걸까.’

집중력이 없는 얼굴들이었다. 운영위원회 회장 딸인 신보람 선배는 아예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유명예고를 다니다가 폭력사건을 일으키고 일반고로 편입한 마슬기 선배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다. 다들 동수를 불신하고 있었다.

선암여고는 선암중, 선암고와 함께 선암 재단에 소속된 사립학교였다. 개방 이사제가 도입된 이후 위세가 한풀 꺾였다 해도 이사장의 오빠 하윤일이 3선 국회의원으로 건재했다. 시교육청과 시의회, 교과부에도 상당한 수의 사람을 심어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학생이라고 다 같은 학생이 아니듯이 교사라고 다 같은 교사가 아니었다. 사립 선암여고에서는 설립자 하순아 이사장을 중심으로 인척관계에 있는 교원들이 권력을 나눠가지고 있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가 물과 기름처럼 확실하게 양분되어 있는 야생의 세렝게티에서 신출내기 교사는 기간제 교사와 다름없이 각종 잡무에 차출되어 머슴처럼 부려졌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봤자 이사장의 며느리이자 교무부장 박해오 선생님이 공문 몇 개 떠넘겨 버리면 금방 흐지부지될 것이다. 사정을 번연히 알고 있는 선배들이니 답변할 의욕이 생길 리 없다. 동수는 혼자서 벽을 치는 듯한 연설을 계속했다.

‘교장선생님께 말해 볼까?’

채율은 생각했다. 하씨 세력을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는 건 이여주 교장 선생님이었다.

채율은 교장 선생님이 좋았다. 선암학원 역사상 하씨 가문과 친인척 관계가 아니면서 처음으로 교장자리에 오른 사람이었다. 지난달 채율의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을 때는 존경하는 작가를 만난 문학소녀처럼 볼을 붉히며 사인을 받았다. 몸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겸손함과 인자함이 좋았다.

학생들이 무는 남자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걸 아시면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 선생님이 무는 남자를 잡을 수 있도록 비호해 주실 것이다.

채율은 하교하기 전 교장실에 들렀다.

안타깝게도 교장 선생님은 출장 중이셨다. 정부에서는 위탁 급식 체제를 직영으로 바꾸라고 압박을 주고 있었다. 그에 대응하기 위해 서울시 사립중고교 교장회 모임에 가셨다고 했다. 냉장고처럼 시원한 교장실을 빠져나와 교문을 향해 뛰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백만 원짜리 수학 과외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2

무는 남자에게 습격당한 1학년 최초의 피해자라는 타이틀은 은자처럼 호젓이 소일하던 채율의 라이프스타일을 변화시켰다. 이름도 얼굴도 알고 싶지 않은 아이들이 수시로 찾아와 성가시게 굴었다. 개중에는 정체가 모호한 불량서클도 있었다.

“3반에 무는 남자 잡으려고 작당한 애들이 있어. 걔네들이 네 뒷조사하고 다니더라? 하도 귀찮게 굴기에 너희 어머니가 쓰신 책이랑 오빠에 대해서 말해줬어. 나 잘못한 거 아니지? 그거 비밀도 아니잖아?”

반장 정희가 귀띔해 줬을 때 이미 불길했었다.

무는 남자 체포 수사대. 줄여 무수대로 불린다는 4인조 저능아들이었다. 도형의 방정식 연습문제를 몰입해서 풀고 있던 쉬는 시간, 그들은 찾아왔다.

“자네가 천재 안채율인가?”

무수대 리더 윤미도는 검은 테 셀룰로이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열린 입사이로 덧니가 도드라져 보였다. 부챗살 펴지듯 미도의 양옆으로 3명의 얼간이들이 나타났다.

맨손으로 소도 때려잡을 듯 늠름한 팔뚝을 가진 여학생. 독방에서 10년 수련한 듯 시커먼 오라를 풍기는 폐인. 열일곱 동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숙성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

“천재라고?”

저렴한 발상을 비웃으며 채율이 비소했다.

그 단어는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2년 전부터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채율의 이란성 쌍둥이 오빠 채준을 향한 말이다. 어머니가 쓴 베스트셀러 『천재는 이렇게 만든다』라는 책에서도 천재는 오빠였다.

무지한 대중들은 채율이 오빠와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머니에게서 똑같은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최소한 14K정도는 천재성이 도금되어 있을 거라고 여겼다. 채율이 오빠보다 잘 하는 건 다트 던지기밖에는 없는데.

“자네 우리 수사대에 들어오지 않겠어? 물론 공짜로 가입하라는 건 아니야.”

미도는 책 한권을 내밀었다. 연습장처럼 스프링 제본된 책이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표지 밑으로 ‘레오디드 안드레예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희곡「뺨 맞는 남자」와 첫 단편 소설 「가난과 부」가 수록되어 있었다. 직역한 듯 투박한 문장이 비전문가에 의한 번역임을 짐작하게 했다.

“채준이는 수학에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채율이는 러시아 언어와 문학에 관심이 많아요. 전부터 도스토예프스키나 막심 고리키에 푹 빠져 살더니, 얼마 전에는 레오니드 안드레예프의 「인간의 삶」을 감명 깊게 읽었다네요. 전문 번역가가 되어서 안드레예프의 작품을 번역하는 게 딸의 꿈이에요. 이번에 외고에 합격하면 좀 더 꿈에 가까워지겠죠.”

1년 전 방송에 출현했던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생이 되살아났다.

방송용 멘트를 믿고 책을 구해오다니. 아들에 비해 잘난 것 없는 딸을 변호하기 위해 어머니가 지어낸 거짓말에 불과하다.

입시에 실패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어머니 명예에 먹칠을 했다. 여기서 가입을 거절하면 다시 한 번 어머니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 된다.

모두가 채율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미도는 신입대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말고도 읽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말만 해. 얼마든지 훔쳐다 줄 테니까.”

그리하여 채율은 선암여고 비공식 추리 동아리 무수대의 정식대원이 되었다. 보충수업이 끝나면 무수대 대원들은 제갈공명을 모시듯 천재 소녀를 모시러 왔다.

무수대 모임은 언제나 자견관(自見館), 선암여고 서편에 자리 잡은 다목적 강당에서 이루어졌다. 자견관 1층은 급식실, 2층은 체육관 겸 강당이었다. 3층은 학교 건물과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음악실과 무용실, 전산실, 각종 동아리실, 등사실 등으로 활용되었다. 3층 연극부실 옆 창고가 무수대의 아지트였다. 대원 연희가 연극부에도 가입되어 있어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여고생들을 물고 돌아다닐 뿐이지만 나중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아? 강간범이나 연쇄살인범도 사소한 장난에서 시작했던 거라고. 우리는 이 남자를 잡아 교화해야 할 의무가 있어. 미래에 생길지 모를 희생자들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야.”

곰팡이 냄새가 시큼시큼한 좁은 공간에서 무수대 아이들은 시트콤 대사 같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이를테면 미도의 오른팔이자, 행동대장 격인 최성은은 무수대 가입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에 무는 남자를 잡아서 경찰 표창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럼 내가 지망하는 K대 경호학과 갈 때 가산점을 받을 수 있거든. 졸업할 때 공로상도 받을 수 있고. 나중에 놈과 마주치게 되면 요 며칠 연습한 맛수히(무에타이에서 올려치기)를 날려줄 생각이야.”

연예인 지망생 연희는 매스컴을 탈 기회를 잡으려고 무수대에 가입했다. 연약한 여고생들이 힘을 합쳐 변태를 잡는다면 지방 언론사라도 취재를 올 테고, 그러면 성숙하고 섹시한 미소로 시청자들을 홀릴 계획이었다.

김윤서는 놀아주는 친구가 없어 가입했다고 했다. 종이만 보이면 이상한 도형을 강박적으로 그리는 아이였다.

수사대 아지트 선반에는 Ⅰ급 비밀이라고 쓰여 있는 파일이 놓여 있었다. 안에는 지금까지 무는 남자가 출현한 장소와 시간, 변장 모습까지 각종 데이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는 남자는 1학기말고사가 끝난 7월 5일부터 보충 수업이 시작된 8월 2일까지, 한 주에 두 번꼴로 출몰했다. 등하교 시간. 피해자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렸다. 기말고사가 끝난 이후부터는 단축 수업을 했고, 보충 수업 때도 오전만 공부를 했던 걸 감안하면 무는 남자는 대학생이거나 확실한 직업이 없는 백수일 확률이 높았다.

특이한 점은 무는 남자가 선암여고 학생들만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근방 세원여상, 형주고, 선암여중, 석용고 아이들 중에 피해자를 본 아이들은 한명도 없었다. 세원여상과는 도로 하나를 두고 연접해 있음에도 그러했다.

연희는 3차 무는 남자 프로파일링 보고서에서 무는 남자가 선암여고 학생들을 노리게 된 이유를 이렇게 파악했다.

우리 학교 여학생들이 제일 예쁘기 때문이다. 토요일마다 우리 학교를 기웃거리는 남학생들 수를 생각해보라. 아마 무는 남자는 학창시절 우리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했을 것이다. 그 때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게 한이 되어…….
보고서뿐만 아니라 직접 대화를 나눌 때도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브레인 스토밍되었다. 근거도 증거도 없었던 여러 잡설 가운데 압권은 무중력 세계관을 가진 윤서의 입을 통해 나왔다.

“오유진 선배랑 맨티(mantee) 후배인 애가 우리반이거든. 걔 말이, 그때 유진 선배는 여드름 흉터 없애는 시술을 받은 직후라 물을 만질 수 없었대. 여름이니까 하루라도 씻지 않으면 냄새가 나잖아. 땀 냄새가 나는 불결한 몸을 물다니 이상하지 않아? 실제로 무는 남자는 유진 언니를 물 때 오만상을 찌푸렸었다는 거야.

내가 무는 남자였다면 악취를 맡자마자 바로 놔줬을 거야. 습격 받은 순서도 특이해. 서민지, 유하현, 은진경, 도연희, 오유진, 마슬기, 신보람, 안채율 순이야. 성(姓) 이니셜은 각각 S, U, E, D, O, M, S, A지. 이 글자들에 흐르는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니? 글자들을 거꾸로 읽어보라고.”

“아스모데우스(Asmodeus)?”

볼드모트의 이름을 들은 헤르미온느처럼 윤서는 목을 움츠렸다.

“외경 토비트 서에 나오는 정욕의 악마야. 인간 여자를 탐한 악마였지. 무는 남자는 흑마술사야. 아스모데우스를 소환하기 위해 순결한 여학생의 피가 필요했던 거지. 아이들이 피해를 입은 지역을 지도에 표시해 보면…….”

윤서는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냈다. 손으로 직접 그린 화려한 만다라들이 표지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다이어리에 붙은 지도 위에 엑스 자 표시를 했다. 사건 장소들이 명쾌하게 한붓그리기로 그려졌다. 뒤집혀진 오망성(五芒星)이었다.

“앞으로 희생자는 두 명이 더 나올 거야. 오망성에는 총 열 개의 점이 있는데 아직 두 군데가 남았거든. 아마 장소는 이곳과 이곳이 되겠지.”

자견관을 순식간에 호그와트 기숙사로 뒤바꾸는 말이었다. 25억을 들였는데도 줄줄 빗물이 새는 강당 천장이 그럴싸한 분위기를 연출해 주었다.

서글프게도 이 클럽 안에서는 채율도 하나의 캐릭터로 통용되었다. 한번 매트릭스가 조직되고 나니 등장할 수순이나 대사가 정해져버렸다. 의견을 나누다 말고 대원들은 채점을 기대하는 눈빛으로 채율 쪽을 흘끔거린다. 바보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채율이 나설 때였다.

“유씨는 영어로 쓸 때 U가 아니라 Y로 시작해. 아니면, 아예 류(Ryu)라고 쓰고……. 성(姓)은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서, 장소는 무시로 이으면 어떻게 해? 고의로 원하는 도형이 나오도록 연결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봐, 이렇게 이으면 별이 아니라 그냥 나무 목(木)자가 나오지? 피해 장소들에 점을 찍을 때는 가능한 세밀한 지도를 써야지. 축척이 작은 지도를 쓰면 형태 왜곡이 쉽잖아.”

가끔 채율이 소견 발표를 할 차례가 오기도 했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건 진실이 아니라 재미였으므로 기대에 부응하기는 쉬웠다.

“그 사람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에이즈 같은 거 말이야. 작년 제천에서 에이즈 택시 기사 있었던 거 기억나지? 세상에 대한 원망에 사무쳐서 애꿎은 사람들에게 병을 옮기고 다녔잖아. 물론 에이즈는 물린다고 해서 걸리는 병은 아니야.

하지만 무는 남자의 목적이 처음부터 병을 옮기는 거였다면, 일부러 입 안에 상처를 내고 출혈이 있는 상태로 아이들을 물지 않았을까? 실제로 피해자들은 피가 날 만큼 세게 물렸어. 전염확률이 높아지지. 무는 정도라면 신고가 들어와도 경찰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거야. 강간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하게 병을 전염시킬 수 있지. 에이즈는 잠복기간이 몇 년씩이나 되는 병이니까, 발병할 때쯤이면 아이들은 대학생이나 사회인이 되어 있을걸. 설마 성관계 경험도 없었던 고등학교 때 병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테니, 범인이 감염경로 추적에 걸릴 가능성도 극히 적어.

여학생들만 노린 이유? 체력이 약해 제압하기 쉽잖아. 순결무구한 것일수록 더럽히는 쾌감도 크고. 원한에 사무친 인간이 저지를 만한 범죄야.”

다들 감명 받은 얼굴로 박수를 쳤다.

간단한 회의가 끝난 후에는 현장조사를 위해 사건 장소를 방문했다. 결론보다 답을 탐색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더의 가치관에 따라 가는 도중에 떡볶이 가게가 있으면 들렀고, 헌혈의 집이 있으면 피를 뽑아 영화를 봤다. 때로는 목적을 망각한 채 맥도널드부터 향했다. 헤어질 때가 되면 미도는 일당을 주는 고용주처럼 거들먹거리며 안드레예프 작품을 한 장씩 찢어 내밀었다.

집에 돌아온 후에는 낭비한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했다. 밤 10시가 되면 미국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감시하는 어머니 전화였다.

“저녁 내내 수학 공부했어. 응. 그 문제집은 벌써 다 풀어 놨고. 과외 선생님한테는 왜 관두라고 그랬어? 그 선생님이 그렇게 족집게라며? 오빠한테는 몇 천만 원도 안 아깝고, 딸한테는 백만 원도 아깝지? 몰라! 아빠는 아직 안 들어 왔어. 요즘 계속 술만 먹고 다녀. 맞아. 바람났나 봐.”

짜증. 짜증. 온통 짜증나는 일들뿐이다.

가끔 오빠가 전화할 때도 있었다. 성별부터 성격, 아이큐까지 전혀 다른 쌍둥이 오빠였지만, 상대는 복소함수 문제를 암산으로 풀어버리는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다. 전화 한 통 만으로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채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너희 학교 애들 조심해야겠다.”

혹시 정말로 에이즈 환자라서? 소름이 끼쳤다.

“너, 지하철 타기 전에 물렸다며? 다른 피해자들도 학교보다 집이나 학원 쪽에서 가까운 곳에서 습격을 당했지. 여덟 명이나 물렸는데 목격자는 한 명도 없는 게 이상하지 않았어?”

천재는 부연했다. 무는 남자는 피해자들의 집이나 등굣길을 미리 알고 있었다. 목표물이 인적이 없는 곳을 지날 때를 노려 덮친 것이다.

오빠가 지적한 사실을 전하자 무수대 아이들은 학교의 운명이 자기들 어깨에 달린 것처럼 행동했다. 개학 후에도 탐정 놀이를 계속하며 무는 남자가 에이즈 환자라는 미신을 전도해 나갔다.

3

외고 입시에 실패한 이후 채율의 소원은 미국 명문 고교에 진학하는 것뿐이었다. 그 길만이 실패자라는 멍에를 벗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입시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중3때 치렀던 난리를 고3때도 치를 자신이 없었다. 입시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지성과 이성을 제대로 단련하는 살아 있는 학문을 하고 싶었다.

같은 자궁에서 쌍둥이로 9개월을 자랐다. 그러나 지금 오빠는 필즈상을 받은 보처즈 박사와 뜨겁게 토론하며 학문을 즐기고 있고 채율은 서른 명을 우겨넣은 교실에서 다섯 개 중 하나만 고르면 되는 기술을 연마하고 있다. 1번이 아니면 2번인, 2번이 아니면 3번이 정답인 단순한 세계.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재능이 부족하면 드넓게 사유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해야 하는 걸까. 정신적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남들이 찾아낸 답만 외우는 인생은 거절하고 싶다.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는 곳으로 가서 꿈을 펼치고 싶다.

어머니는 채율의 부탁을 보류했다. 베스트셀러까지 출판한 자칭 타칭 교육 전문가 입장에서 누가 봐도 도피 유학으로 여겨질 길로 딸을 인도하기는 힘들었다. 그리하여 나온 타협안이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거들랑’이라는 조건부였다.

전교 1등을 하는 순간 인간 사육장에서 탈출할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2학기 개학 후 미도의 쪽대본을 과감히 외면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녀석들은 느닷없이 문자를 보내 채율을 유혹했다.

「새로운 피해자가 생겼어. 무는 남자 맨얼굴을 봤대!」

호기심은 갈증처럼 유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자견관 창고로 향했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