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정류장

일곱 번째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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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168일

“주말 사건사고 뉴스입니다. 서울 신림동 다세대주택 1층에서 20대 여성이 목 졸려 숨져 있는 것을 집주인이 발견해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소변과 정액 등을 채취해 정밀분석을 의뢰하고 주변 탐문수사에 나섰습니다. 휴일 막바지 단풍을 즐기려는 나들이객으로 정체를 빚었던 고속도로에서 10중 추돌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녀가 올라탄다. 밤 9시 36분, 어제보다 24분이 늦었다. 오늘 그녀의 출근시간이 8시 28분이었으니, 13시간 8분 만에 그녀를 보는 것이 된다. 평소보다 늦은 그녀를 기다리느라 뒷타임 운전자를 두 명이나 먼저 보냈다. 담배까지 사다 안기며 배차를 조정하는 이유를 한동안 궁금해 하더니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젠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환승입니다.”

기계음이 울리고 그녀가 눈인사를 한다. 나도 고개를 까딱, 그녀와 눈을 맞춘다. 매일 23개의 똑같은 정류장을 38분씩 몇 번이고 왕복해야 하는 나에게,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그녀는 노약자석 바로 뒤 기둥옆 자리에 앉는다. 앙다문 입술에 피곤함이 배어 있다. 요즘 퇴근길의 그녀는 늘 저런 표정이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낯설었는데, 보면 볼수록 저 표정도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창밖을 응시하는 그녀를 바라보는데, “두 사람이요.”, “중부소방서 가요?” 등의 쓸데없는 잡음이 끼어든다. 아아, 시간이 얼마 없는데, 이럴 때는 정말이지 그녀와 나 사이에 아무도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이제 그녀가 내릴 일곱 번째 정류장이다. 조심스럽게 차를 세우고 문을 연다. 오늘은 내리면서도 눈인사를 할까?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녀를 살핀다. 역시 많이 피곤했나보군. 눈을 맞춰주지 않고 그냥 내려버리는 걸 보면…….

그녀가 내리고 난 뒤 일곱 번째 정류장을 출발하는 이 순간이 하루의 끝인 것만 같다. 아직 두세 번은 더 돌아야 하는데 이미 그녀가 집에 들어가 버렸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기운이 빠진다. 그래도 내일도 그녀를 볼 수 있으니까. 출근할 때도 나의 버스를 타면 좋으련만……. 그녀를 옆 좌석에 태우고 눈 맞추며 웃으면서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치과의사다. 168일 전 오래 참아온 통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찾아간 치과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아니 처음 눈을 맞췄다. 진료대에 누워 얼굴을 올려다 볼 때부터 왠지 낯이 익다 싶었는데 치료를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나의 일곱 번째 정류장 근처에 살고 있었다.

“어머, 5번 마을버스 운전하세요? 저 그거 타고 다니잖아요. 어쩐지 아는 분 같더라. 제가 특별히 안 아프게 잘 해드릴게요.”

적당히 기분 좋게 차가운 손이 입가를 어루만졌다. 끔찍이 싫어했던 치과 특유의 약품 냄새도 그녀의 가운 소매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향기롭게 느껴졌다.

“이 악물고 사시나 봐요. 너무 세게 다무시면 치아에 안 좋아요. 스트레스도 덜 받으시는 게 좋고요. 충치가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면 안 믿어지시죠?”

그 날부터 그녀와 만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오늘이 168일째다. 마을버스 운전을 1년쯤 했을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지금이 아침인지 오후인지 여기가 종점인지 중간 정류장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 붕 뜬 것 같고, 회전목마를 타고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곧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매일 좁은 공간을 몇 번이고 왕복하다 보니 뇌에 이상이라도 생긴 걸까 겁이 났다. 그 날부터 무엇이건 숫자를 세고 보는 버릇이 들었다. 정류장 하나를 지나칠 때마다 하나, 둘, 셋, ……열여섯, 스물 둘, 종점에서 담배 한 대. 두 번째 출발을 하면서 다시 정류장 하나, 둘, 셋 ……스물 둘, 또 담배 한 대. 한 바퀴를 도는데 걸리는 시간과 배차 횟수를 완전히 익힌 후에는 그날그날 승객의 숫자를 세기도 했다. 첫 번째 배차 때 24명, 두 번째 배차 때 15명…….

그렇게 세고 있으면 아무것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방금 전이 첫 번째였으니 이번은 두 번째구나. 지금이 두 번째라면 다음은 세 번째인 거야. 딴 생각을 하고 있자면 한 바퀴 두 바퀴 돌 때마다 심해지던 어지럼증과 울렁증도 잊혀졌다. 하루가 구획별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 마음도 편했다.

60일 동안 8번 치료를 받은 후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마지막 진료날 제과점에서 롤케이크를 하나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이런 거 받으면 안 되는데……. 하하, 너무 감사해요. 제가 좀 훌륭한 의사긴 하죠. 하나도 안 아프셨죠? 아이, 농담이고요, 너무 잘 먹을게요. 안녕히 가세요, 치아 관리 잘 하시고요.”

예, 예, 고개를 거듭 주억거리면서 뒷걸음질쳐 병원을 나오는데, 그녀가 팔짝팔짝 뛰며 전화를 받는다.

“어, 오빠! 밥은 먹었어? 우리 오늘 어디서 만나?”

스르르 닫히는 유리문 사이로 무언가 육중한 것이 쿵, 내려앉는다. 선팅된 치과라는 커다란 글자에 가려 그녀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입매만 보인다.

회사로 복귀해 스물세 개의 정류장들을 도는 내내 그 입매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혹시나 그녀가 탈까 9시 이후 배차를 모두 내가 하겠다고 했다. 치과 치료는 끝나버렸고 그저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한 번 그녀를 보고 싶었다. 치료를 받던 두 달간 띄엄띄엄 보았던 그녀의 동선과 퇴근시간을 계산해 둘 걸 후회가 된다. 10시가 지나고 11시가 지나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목이 바짝바짝 말라 계속 물을 들이켠다.

그녀를 처음 봤던 날이 생각난다. 봄인데도 올해 들어 가장 매서운 바람이 불었던 그날, 손님들이 유독 극성맞았다. 거스름돈이 덜 나왔다고 따지는 중년 아줌마, 알아듣지 못할 말들과 욕설을 섞어가며 고래고래 떠드는 중학생들, 자기는 기술자인데 십장이 막노동꾼 취급을 한다며 술에 취한 아저씨, 매일 버스에 태워달라고 조르는 동네 바보 녀석까지…….

그 녀석은 일단 버스에 타면 열 번도 돌고 스무 번도 돌았다. 집에 갇혀서 오죽 답답하겠나 하는 측은한 마음에 몇 번 태워준 것이 실수였다. 사람들의 내뿜는 공기와 히터기운에 둘러싸여 그 녀석이 쉴 새 없이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신경이 바늘 끝처럼 곤두섰다. 당장 내리라고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그녀가 버스에 탔다.

살다보면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온다. 나는 그때 그녀의 노란색 바바리에 사로잡혔다. 개나리 색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는데, 함께 두른 연둣빛 스카프와 맞춤인 듯 어울렸다. 퀴퀴하고 혼란스러웠던 마을버스 안에 개나리가 활짝 피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전까지 잿빛 겨울이었던 내 인생에 순식간에 봄이 온 것처럼,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살색 스타킹에 앞코가 둥근 구두를 신었다. 덜컹, 과속방지턱을 넘을 때마다 개나리 색 바바리가 무릎 아래 가지런한 다리를 스쳤다.

그 몇 분의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개나리 색에 정신이 팔려 얼굴을 제대로 볼 사이도 없이 그녀가 내려버렸다. 일곱 번째 정류장이었다. 그 뒤로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마치 얼굴이 없었던 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다, 그 사로잡힘이 어찌나 순식간이었던지 그녀가 현실의 사람이 아니라고, 잠시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해 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우연히 찾아간 치과에서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이다. 얼굴을 기억할 순 없었지만, 그녀가 개나리 색 바바리의 그녀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치료가 끝나고 그녀가 마스크를 벗었을 때, 나도 모르게 ‘아! 개나리 색 바바리!’ 라고 말할 뻔했으니까. 치료도중 입 속을 들여다보느라고 그녀의 몸이 다가올 때면 온통 개나리로 둘러싸인 듯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는데……. 8번만에 치료가 끝나버린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지막 배차를 도는데, 일곱 번째 정류장에 외제 차 한 대가 버티고 섰다. 경적을 누르며 짜증을 내는 순간, 조수석에서 누군가 내린다. 그녀다. 해사한 얼굴의 그녀가, 아쉬운 듯 창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운전석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다. 핸들을 잡은 손과 액셀러레이터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려 한다. 외제 차는 미끄러지듯 정류장을 떠나고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가 손을 흔든다. 고개가 저절로 운전대를 파고든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흔적을 찾는 것이 하루의 목적이 되었다. 일주일간 아침 배차를 도맡아 뛰어봤으나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 아침마다 그녀의 집 앞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매일 아침 8시 20~30분경 치과에서 보았던 간호사가 빨간 경차를 몰고 그녀의 집 앞으로 온다. 둘이 함께 출근하는 모양이다. 두 사람은 보통 8시 20분에서 5~7분 사이를 두고 만난다. 이렇게 되면 아침에는 그녀가 나의 차에 탈 확률이 거의 없다. 그래도 오며가며 멀리서라도 그녀를 볼 수는 있을 테니까 아침 배차를 8시 20분부터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에는 대체로 9시 20분경에 버스를 탄다. 매일 언제 퇴근할지 알 수가 없으니, 치과 진료가 끝나고 도착하는 시간을 계산해 9시 10분부터 계속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08일간 정류장에 서 있는 그 외제 차를 5번 발견했다. 조수석에 그녀가 없어 정류장에 정차한 채 무작정 기다리고 있자면 승객들이 빨리 출발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곤 했다. 아랑곳 않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서야 차를 출발시킬 때면, 무거운 형벌 같은 이 차를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무작정 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8일 전 막차 시간에는, 그녀가 술에 취해 버스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졸기 시작하더니 다섯 번째 정류장을 지나고 여섯 번째 정류장을 출발하는 데도 깰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그녀의 집 앞, 깨울까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지나친다. 그녀를 태우고 여덟 번째 정류장을 향해 출발하는 것은 처음이 아닌가, 가슴이 뛴다. 이대로 세상 끝까지라도 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종점에 도착해 승객들이 모두 내리고 난 뒤,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든 빨리 깨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잠든 그녀의 모습을 지켜본다. 무표정할 때 슬픔을 머금은 것 같은 입매, 웃을 때 살짝 주름이 잡히던 콧날, 말할 때마다 사뿐히 치켜 올라가던 눈썹이 가지런하다. 마주 볼 때면 단번에 나를 관통해 등짝까지 박히는 것 같은 그녀의 눈빛이 보고 싶다.

“환승입니다.”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털썩 그녀 쪽으로 넘어졌다. 좌석을 찾던 젊은 손님들이 괜찮으세요? 나를 부축한다. 막차 운행이 끝났는데, 출입문 닫아두는 것을 잊었다. 투닥거리는 소리에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잠이 덜 깼는지 창밖을 두리번거리다가 손님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허둥대는 나를 발견하고 눈을 치뜬다.

“윤, 윤 선생님, 종점이에요. 이게 막차니까 그냥 계속 타고 가셔서 집 앞에서 내리세요.”

“아 예, 제가 깜빡 졸았나 봐요. 깨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쓰레기를 줍는 척하며 일어서서 차 밖으로 나왔다. 셔터가 반쯤 내려진 종점 약국의 망가진 간판, ‘약’이라는 빨간 글자의 형광등 불이 꺼졌다 켜졌다 한 지 사흘째다. 술 깨는 약이라도 사다줄까, 괜히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닌가 생각을 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는 좀 괜찮으세요? 문제가 있으면 애프터서비스 해드려야 하는데……. 하하.”

어느새 뒤에 와 있는 그녀, 얼른 담배를 비벼 껐다.

“어, 계속 피우셔도 되는데……. 찬바람 좀 쐬려고요. 술이 깨야 집까지 제대로 찾아갈 거 아니에요. 막차니까 조금 더 기다렸다 가실 거죠?”

헤프게 웃으며 그녀가 살짝 휘청거린다. 허둥지둥 양 팔을 잡아주는데 그녀가 슬쩍 기댄다.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

“아 예, 저기…… 술 깨는 약이라도 좀 드시겠어요?”

“약국 문 벌써 닫은 거 같은데요? 어지럽고 속이 좀 부대끼긴 하는데…….”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영업이 끝났다고 짜증스럽게 말하던 약사가 나를 알아보고 오늘은 웬일로 늘 오시던 시간이 아니네요? 반가운 체를 한다. 약을 사들고 나와 뚜껑을 따서 그녀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꾸벅 절을 하더니 꿀떡꿀떡 잘도 마신다.

“휴우우우우. 사는 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네요.”

“무슨 그런 말씀을, 훌륭한 의사 선생님께서 왜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러세요.”

“훌륭하긴요, 죽을 고생해서 의사가 됐는데, 매일매일 짐이 계속 늘어나기만 하는데요. 의사만 되고나면 모든 게 잘 풀릴 거다, 이 악물고 여기까지 왔는데 입 안에 무언가를 머금은 채, 뱉어버리지도 삼키지도 못하고 동동거리면서 사는 느낌이에요. 원래 사는 게 이런 건지……. 제가 너무 속상해서 좀 마셨어요.”

“저는 매일 23개의 똑같은 정류장을 몇 번이고 계속 도는걸요. 그렇게 한참 돌다보면 내가 버스를 몰고 있는 건지, 버스가 나를 몰고 있는 건지 헷갈려요. 너무 지루할 때면 아무데나 세워놓고 도망가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그럴 땐 이 마을버스가 짐이고 형벌인 것 같죠. 너무 좁은 동네만 왕복해서 그런가, 차라리 시내버스나 택시운전을 하는 게 낫지 않나 생각하기도 해요. 근데 또 생각해 보면 조금 멀리 떠나본다고 다르겠나 싶고……. 어느 누가 자기 인생에서 도망갈 수 있겠어요. 모두가 그런 짐을 하나씩 지고 살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아이쿠! 제가 주제넘게 말이 많았네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너무 위로가 되네요. 저도 온종일 사람들 좁은 입 속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게 뭔가 싶고, 갑갑하고 미쳐버릴 것 같은 순간 있거든요. 다들 그런가 봐요.”

“이렇게 젊고 이쁘신데 행복해지셔야죠. 좋다고 생각하면 또 좋아지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제가 살아보니까…….”

“아저씨! 빨리 출발안하고 뭐합니까?”

피둥피둥한 중년의 아줌마가 버스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른다. 아줌마들은 왜 다들 저모양일까. 배려를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그녀가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더니 버스에 탔다.

운전석에 올라 버스를 출발시킨다. 그새 술이 깼는지 그녀는 새치름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더니, 내 말이 정말 위로가 된 걸까. 방금 전까지 그녀와 나눈 이야기들이 꿈만 같다. 피곤할 텐데 얼른 들어가 쉬게 해 줘야지. 오늘따라 일곱 번째 정류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도로 위를 날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

김 형사의 하루

“상대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사람을 일컫는 말, 스토커. 그 스토커 문제가 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지난달 신림동 다세대 주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20대 여성이 스토커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헤어진 애인이나 전남편의 스토킹에 의해 살해된 경우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범인이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60대라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마을 버스 운전을 하는 예순일곱 살 김모 씨는 승객이었던 스물여섯 살 윤모 씨를 몇 달간 스토킹하다가…….”

“세상에, 일흔이 코앞인 노인네가 기운도 좋지. 아무리 여자라도 팔팔한 20대를 어떻게……. 젊은 애가 싫다고 발버둥을 쳤으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에휴, 그저 사내놈들은 문지방 넘을 힘만 있으면……, 쯧쯧.”

허여멀건 설렁탕을 무심히 내려놓으며 주인 여자가 혀를 찼다.

“나도 나중에 늙어서 꼴리는데 주는 사람 없으면 저렇게 되려나……. 정작 사체에서 성폭행 흔적은 안 나왔어요. 마음만 날뛰고 몸이 안 따라준 게죠, 흐흐.”

설렁탕 국물을 제대로 삼키지도 않고 박 형사가 실실댄다.

“근데 말이야, 왜 뒤에서 목을 졸랐을까? 빨랫줄이랑 면장갑에 비닐장갑까지 준비하고 신발에도 비닐을 씌워서 들어갈 만큼 치밀하게 준비했으면서, 어이없게 체액을 남긴 것도 웃기고. 젊은 애 덮치러 가면서 위협할 칼이나 몽둥이도 없었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아?”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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