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으로 가는 길 (제2회 ZA 문학 공모전 대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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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깃들자 도시는 창백해졌다.

정적을 가르며 헬기 소리가 선혈처럼 튀었다. 거리를 배회하던 시체들의 울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낡은 철제 셔터는 소음에 취약했다. 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들어도 저 소리는 익숙해지질 않는다. 판자로 덧댄 창문 틈으로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자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또래의 성인 남자보다 절반이나 작은 체구 탓에 위기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그래서 아침마다 조용히 실내를 돌아다니며 간밤에 보수할 곳이 생기진 않았는지 신중히 살폈다.

지은 지 삼십여 년이 지난 사 층짜리 건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드러난 외벽 곳곳에는 실금이 갔고, 천장은 무너질 듯 움푹 꺼져 있었다. 인간의 냄새를 맡은 놈들은 끊임없이 이곳으로 침입을 시도했다. 다행히 건물은 놈들이 접근하지 못할 만큼 단단했다.

밖으로 이어진 곳을 모조리 판자로 막아버리고 이곳에서 버틴 지 벌써 육 개월째였다.

과거 부동산 사무실이었던 1층에는 현재 나를 비롯해 다섯 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널찍한 중앙 로비는 개인병원 의사인 박 선생과 건달 출신의 조문복, 그리고 나의 보금자리였다. 우리는 사무용으로 쓰던 책걸상을 모두 철제 셔터를 내린 출입문 쪽에 방벽처럼 쌓아두었다.

로비의 왼쪽 끝에 화장실이 있었고, 그 옆의 작은 방은 상담실이었다. 그곳은 대학생 커플인 안종수와 최희원이 사용했다. 그들은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곤 방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지만 딱히 이상은 없었다. 내친김에 옥상에 가보기로 했다. 간밤에 헬기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어쩌면 보급품이 도착했을지도 몰랐다. 창턱 아래에 놓인 등산용 배낭을 메고 쓰레기 배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이 오래된 건물의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바로 각 층마다 존재하는 쓰레기 배출구였다. 놈들이 계단을 장악한 후로 옥상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기뿐이었다. 하지만 이 통로의 입구는 환풍구보다 조금 더 넓은 정도여서 성인은 드나들 수가 없었다. 선천적으로 왜소증 장애를 앓고 있는 나는 예외적으로 이동이 자유로웠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처음으로 이 저주받은 몸이 고마웠다.

덮개를 열고 머리를 막 집어넣는데 어깨 너머로 숨죽인 목소리가 들렸다.

“옥상에 가요?”

엎드린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문복이 화장실에서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내밀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보이지 않아 어디 갔나 했더니 화장실에 있었던 모양이다. 열린 문틈으로 쏟아져 나온 불빛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었다.

그는 나날이 살이 빠졌다. 광대뼈가 툭 불거진 그의 인상은 처음 봤을 때보다 한층 날카로워졌다. 근육질 어깨에 새겨진 용 문신도 예전의 위용이 아니었다.

나는 손바닥에 베인 땀을 옷에 문지르며 대답했다.

“보급품을 좀 찾아보려고요.”

“날이 밝거든 가지. 위험하게.”

문복이 안쓰럽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어차피 여긴 빛이 안 들어와서 낮에도 다를 게 없어요.”

“하여간 조심해요.”

그의 배웅을 받으며 쓰레기 배출구로 들어서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늘 하던 대로 벽을 등지고 다리로 맞은편 벽을 힘껏 밀었다. 그렇게 몸을 지탱한 뒤 등과 어깨를 조금씩 움직여 위로 올라갔다. 2층부터는 배수관이 있어 그것을 잡고 오르면 한결 수월하다. 통로의 꼭대기에 있는 덮개를 열면 옥상으로 이어졌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오는 헬기는 놈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건물 옥상에 보급품을 실어 날랐다. 우리는 그것으로 힘겹게 삶을 연명했다. 문제는 헬기의 방문이 불규칙하다는 점이었다. 또 헬기가 떴다고 해도 군사 훈련의 일환이거나 정찰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아서 기대감을 가지고 옥상에 갔다가 허탕을 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이번에는 열흘이 지나도록 식량을 공급받지 못했다. 남은 음식을 최대한 아끼고 있지만 그것도 이젠 거의 한계였다. 라디오에서는 앞으로 삼 년만 버티면 놈들이 제풀에 죽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보급이 없다면 삼 년은커녕 삼 일도 장담할 수가 없다.

2층에 도착해서 배수관을 잡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젠 눈 감고도 다닐 만큼 익숙해진 길이지만 그래도 신중해야 했다. 행여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하는 날엔 꼼짝없이 지하 쓰레기 집하장에서 득실거리는 놈들의 밥이 될 것이다. 배수관을 단단히 잡고 다시 통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4층에 도착하니 이마에서 비지땀이 뚝뚝 떨어졌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덮개를 들어올렸다. 바깥으로 고개를 빼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이 들렸다.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옥상 난간에서 검정색 줄무늬 고양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감염자들의 특징 중 하나는 붉은 눈이었으므로 나는 안심했다. 녀석이 경계하는 듯 털을 세우며 하악 하고 쇳소리를 냈다.

“걱정 마. 안 잡아먹을 테니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옥상 물탱크 아래쪽에서 낯익은 상자가 보였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간밤에 들었던 헬기 소리는 역시 보급용이었다. 나는 반색을 하며 양 팔을 옥상 입구에 걸치고 몸을 끌어올렸다. 그것을 신호로 느닷없이 고양이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얼굴을 할퀴자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힘껏 팔을 휘저어 고양이를 쫓았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손을 놓쳐 추락할 뻔했다. 간신히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매달렸다. 고양이는 재차 달려들어 내 손을 마구 할퀴었다. 굶주림이나 놈들이 아니라 고양이에게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 필사적으로 고양이에게 휘둘렀다. 떨어지기 직전 간신히 칼을 녀석의 목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런 다음 힘겹게 옥상으로 기어 올라왔다. 고양이는 내 발치에 쓰러져 숨을 헐떡거렸다. 녀석이 할퀸 왼쪽 눈이 따끔거렸다. 놈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으려고 다리를 치켜들었다.

그때 도망도 못 가고 어미의 옆에서 우는 새끼고양이가 보였다. 다리를 다친 것 같았다. 그제야 녀석의 이상한 행동이 이해됐다.

“새끼를 지키려고 그런 거였냐?”

한숨이 나왔다. 발을 내리고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며 보급상자로 다가갔다. 뚜껑을 열어보니 인스턴트 밥과 건빵, 비스킷, 통조림, 육포, 구급상자 따위가 잔뜩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앞으로 일주일은 거뜬할 것 같았다. 나는 배낭을 벗어두고 옥상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리에는 시체들의 행렬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지난주에 봤을 때보다 더 수가 불어난 것 같았다. 놈들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만약 정말로 놈들이 죽지 않으면 그땐 어떡하지?

‘쓸데없는 생각.’

고개를 저으며 옆 건물로 시선을 옮겼다. 나와 마찬가지로 옥상에서 음식을 챙기는 한 남자가 보였다. 창백한 얼굴에서 고단한 삶의 흔적이 묻어났다. 내가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하자 그가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적당히 휴식을 취한 다음 식량을 배낭에 옮겨 담고 쓰레기 배출구 앞으로 돌아왔을 땐 새끼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통조림을 하나 뜯어서 어미 고양이 옆에 내려놓고, 배출구로 들어갔다.

1층에 도착하자 숨이 가쁘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 하지만 사람들이 음식을 보고 기뻐할 생각을 하니 기운이 났다. 마른 침을 삼키며 실내로 들어가려는데 통로 저편에서 걸걸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상담실에 머물던 대학생 종수였다.

벽에 가로막혀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는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들어가지 않고 잠시 제 자리에 머물렀다. 대신 덮개를 슬쩍 열고 몰래 안을 들여다봤다.

종수가 눈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기며 열변을 토했다.

“음식을 빼돌리고 있는 거라고요.”

박 선생이 두꺼운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다 말고 손사래를 쳤다.

“조용히 좀 말해요. 들을라.”

“들을 테면 들으라죠. 솔직히 안 그렇습니까? 일주일마다 오던 배급이 왜 열흘이 다 되도록 안 오냐고요. 그 난쟁이 자식이 저 혼자 살겠다고 빼돌린 게 아니면……”

“그래도 확실한 증거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지. 고생하는 사람한테.”

박 선생의 설득에도 종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굶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까? 이번에도 빈손이면 내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문복이 코웃음을 쳤다.

“가만 안 있으면? 어이 형씨.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 목숨은 전부 그 난쟁이한테 달려 있어. 그놈이 음식을 빼돌리든 다 먹어버리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여태까지 지내고도 그걸 몰라? 꼬우면 당신이 직접 옥상에서 식량을 가져오든가.”

종수는 분한 듯 숨을 씨근덕거렸지만 별다른 항변은 하지 못했다. 그의 옆에는 희원이 긴 생머리를 늘어트리고 앉아 있었다. 얌전히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그녀는 종수의 어깨를 다독였다.

“오빠가 참아. 어쩔 수 없잖아.”

희원의 말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만은 날 믿어주길 바랐는데. 종수는 사람들과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희원을 데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한동안 멍하니 통로에 머물러 있던 나는 이내 배낭에서 참치 통조림과 육포 한 팩을 꺼냈다.

어떻게 해도 의심받을 거라면 나도 다 생각이 있다. 2층으로 올라가 쓰레기 투입구를 열고 꺼낸 음식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건물에서 사람이 있는 곳은 1층뿐이었으므로 2층은 오늘부터 나의 비밀 식량 창고가 되었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투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배낭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거실 바닥에 배낭이 떨어지자 박 선생과 문복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배급이 왔구나!”

“고생했어요, 성국 씨.”

나는 숨을 몰아쉬며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뒤늦게 상담실의 문이 열리며 종수와 희원이 나왔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음식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나와 눈이 마주친 종수가 가까이 다가와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에 상처가 있잖아!”

그의 말에 놀란 듯 문복과 박 선생님도 몸을 경직시키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고양이가 할퀴었어요. 하지만 감염되지 않았으니 걱정 마세요.”

“확실한 거야?”

종수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종 그의 비딱한 태도에 화가 났다. 없는 데서 내 뒷말을 한 것도 마음에 앙금으로 남았다. 그렇지만 종수의 옆에서 두려워하는 희원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네, 눈이 정상이었어요. 새끼를 지키려고 달려든 모양이더라고요.”

박 선생도 내 얼굴을 살펴보곤 감염의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으로 다들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들이 뭘 할 수 있겠는가?

음식을 꺼내 사람 수대로 나눴다. 종수는 지난 번보다 양이 적어진 것 같다며 투덜거렸다. 희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의 옆구리를 손으로 찔렀다. 종수는 몇 마디 더 구시렁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가스는 끊겼지만 전기는 아직도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낡은 전자레인지에 밥을 데우고 각자의 반찬을 모아 상을 차렸다. 너무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배가 부르니 날카롭게 곤두섰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문복과 박 선생은 아껴둔 담배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손거울로 얼굴의 상처를 비췄다. 왼쪽 눈썹에서 관자놀이까지 세 줄의 빗금이 그어졌다. 구급상자에서 소독약을 꺼냈다. 손거울을 창틀에 고정시키고 상처를 소독하는데 등 뒤에서 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해드릴게요.”

“아, 괜찮은데.”

희원은 내 손에서 소독약을 뺏어 들고 내 앞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린 것처럼 예쁜 눈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면봉에 소독약을 묻혀 세심하게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뒤 거즈로 상처를 싸맸다.

그녀의 따뜻한 손길이 닿자 아까 가졌던 섭섭한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다. 2층에 음식을 숨긴 것도 미안했다. 희원은 반창고를 잘라 거즈를 고정시키며 말했다.

“아까 종수 오빠가 했던 말 담아두지 마세요. 자기도 그렇게 말하고 후회했을 거예요. 우린 성국 씨 하나만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나는 홀린 것처럼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별로 신경 안 씁니다.”

내 대답에 희원이 환하게 웃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고마워요. 성국 씨.”

희원이 방에 들어간 뒤 나는 눈을 감고 그녀가 남긴 체취를 음미했다. 한동안 그 기분에 취해 멍하니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뭘 한 거지?

그날 이후로 희원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날 향해 웃어주었고, 옥상에 갔다가 돌아올 때면 수건을 들고 기다렸다가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럴 때마다 종수는 거실 구석에 앉아 말없이 날 쳐다봤다.

고립되기 전에는 종수처럼 키 크고, 잘 생기고, 돈 많은 타입의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의사인 박 선생이나 건달 출신의 문복도 마찬가지였다.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남자는 오로지 나 하나였다.

여자들은 능력 있는 남자에게 끌린다는 속설에 비춰보면 달라진 희원의 태도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에 계산적인 태도가 숨어 있다고 해도 예전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여자에게 받는 관심이 나 역시 싫지 않았다. 가끔씩 빼돌린 주전부리를 희원의 손에 몰래 쥐어줄 때마다 그녀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은 날 행복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종수였다. 그는 희원을 자기 소유의 장난감처럼 대했고,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도 희원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종수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도움을 청하듯 나를 쳐다봤다. 그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일은 괴로웠다. 차라리 거리에서 울부짖는 시체가 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희원 씨를 놔줘.”

방 문을 열던 종수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

“그 손 놓으라고.”

내 말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나는 일순간 긴장했다. 옆에 누워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박 선생과 주머니칼로 나무 인형을 만들던 문복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문복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갑자기 또 왜들 그래요?”

나는 속으로 셈을 헤아렸다. 내가 위기에 처하면 문복과 박 선생이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제 아무리 종수가 체격이 좋다고 해도 우리를 전부 상대할 수는 없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종수를 노려봤다. 그때 그의 어깨 너머로 희원의 얼굴이 보였다. 슬픈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희원이 방으로 들어가자 나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승산은 이쪽에 있었다. 그럼에도 희원은 내 도움을 거절했다. 내가 싸우다 다치는 게 싫은 걸까? 아니면 남자친구에 대한 정이 남아서? 이유가 뭐든 그녀의 진심을 알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 투입구로 기어들어갔다.

“어디가요? 이 시간에.”

박 선생의 물음에 나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옥상에 바람 좀 쐬러요.”

거짓말이었다. 나는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 쓰레기 투입구로 기어 나왔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왼쪽이 접수대였고, 그 옆으로 진료실, 방사선실, 내과, 외과, 원장실이 마주보며 늘어서 있었다. 놈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병원이었다.

희원은 여기 간호사였고, 나는 이 건물의 청소부였다. 그땐 감히 바라볼 수 없을 만큼 빛나 보였던 여자가 이젠 내 가슴에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원장실이란 팻말이 붙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쪽에 바닥재가 뜯겨 나갔고, 그곳을 메우고 있던 콘크리트가 아치형으로 파내져 있었다. 이 아래가 상담실이었다. 희원이 종수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2층으로 올라와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었다. 만약 희원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종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래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신중하게 움직였다. 니퍼로 잘게 파낸 콘크리트의 잔해를 손으로 쉼 없이 긁어낸 끝에 바닥에는 동전만 한 구멍이 뚫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구멍에 눈을 바싹 가져다 댔다.

희원과 종수가 한 침대에 누워 끌어안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둘 다 표정이 밝았다. 순간 뒷목이 뻐근했다. 눈을 떼고 이번에는 귀를 가져다 댔다. 작지만 그들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한테 완전히 빠진 것 같던데. 그 새끼 표정 봤어?”

“어휴, 그런 소리 하지 마. 그 난쟁이가 은근한 눈빛으로 쳐다볼 때마다 얼마나 소름이 끼친다고.”

희원의 목소리가 비현실적인 단어들을 내뱉었다. 세치 혀에 돋아난 칼날이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종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조금만 참아 줘. 놈을 살살 구슬려서 음식을 내놓게 만들란 말야. 여기서 나갈 때까진 그 놈이 우리 생명줄이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 근데 오빠, 여기서 나가면 결혼하자는 말 진심이지? 아버님이 반대해도?”

“희원아, 내가 도대체 너 아니면 누구랑 같이 살겠냐.”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얼른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1층으로 돌아온 후에도 뇌리에 남은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저 농락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노로 펄떡거리던 심장은 곧 싸늘하게 식었고, 나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박 선생과 문복을 지나 상담실로 걸어갔다. 노크를 하자 희원이 문을 열었다.

“성국 씨 무슨 일이에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희원에게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얼른 고개를 숙여 이 쌍년아.’

“뭐라고요?”

희원은 고개를 숙이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주저 없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희원이 어깨를 들썩이며 나를 밀었지만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뒤늦게 종수가 달려와 발로 내 얼굴을 걷어찼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 소란에 곤히 잠들었던 문복과 박 선생이 깨어났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입술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나와 바닥에 주저앉은 희원, 그리고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나를 짓밟으려 다가오는 종수까지. 그들은 재빨리 달려와 종수를 붙잡았다.

그는 성난 짐승처럼 날뛰며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건물 밖을 배회하던 시체들이 덩달아 광기 어린 비명을 질러댔다.

“이거 놔요. 저 자식 죽여 버릴 거야.”

종수는 도저히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을 붙잡고 말리던 문복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번개같이 손이 올라갔다. 뺨을 얻어맞고 허리가 휘청 꺾인 종수는 그제야 몸부림을 멈췄다. 대신 숨을 씩씩 몰아쉬며 나를 노려봤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가 진정되자 박 선생이 물었다. 희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얘기가 끝나자 박 선생이 나를 쳐다봤다.

“사실이에요?”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거짓말이죠. 저 녀석들 나에게 식량을 요구했어요. 내가 감추고 있는 걸 다 안다면서. 그런 건 없다고 하니까 느닷없이 주먹질을 하더라고요.”

종수와 희원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며 또다시 나에게 달려드는 놈을 문복이 막았다. 문복과 박 선생은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헷갈리는 기색이었다. 나는 그들이 좀 더 쉽게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을 덧붙였다.

“이거 어디 무서워서 음식 가져오겠습니까?”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더 이상 잘잘못을 가리는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지옥에서는 생존이 곧 법이자 진실이었다. 화살은 결국 종수에게로 향했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