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선물

  • 장르: SF, 일반 | 태그: #그늘진자리 #SF #루나시티
  • 평점×79 | 분량: 98매
  • 소개: 모처럼 휴가를 얻은 지호는 화성의 선물 피해자 모임에 나갈 마음을 먹는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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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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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진 자리가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아요.

지호는 희영의 말을 잊지 못했다. 지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바보같이. 한 마디 받아쳤더라면 지금만큼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론 억울했다. 일부러 티를 낸 게 아니었다. 뭐랄까. 그냥 힘이 없었다. 마라톤을 전력질주한 선수처럼 턱턱 숨이 막혔고, 산해진미를 입에 넣어도 크기만 다른 딱딱한 고무를 씹는 기분이었다. 소리도 잠수한 것처럼 잘 들리지 않아 대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결국 3년간 공들인 우주 정거장 간 협약도 동기에게 넘어가 겨우겨우 매듭지었다. 그 덕분에 지호가 바닥부터 쌓은 공은 마침표를 찍은 동기에게 전부 돌아갔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엎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어떻게 할래. 좀 쉴래?”

부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지호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왜요?”

“쉬고 싶지 않아? 맡은 협약도 마무리 됐고. 걱정 마. 윗선은 내가 다 허락 맡아놨어.”

“권고 사직…, 뭐 그런 거예요?”

“무슨 말이야. 우리 회사가 좋은 회사는 아니지만 악덕 회사는 아냐. 내가 지호 팀장이랑 사적으로 친분이 없어서 안 물었는데. 지호 팀장이 겪은 거 보통 사람들이면 다 이해해. 협약도 자기 손으로 마무리 못 지어서 속상하지?”

지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배에 힘을 주었다.

“저 괜찮아요. 부장님.”

부장은 지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답답한 건 나인데 왜 그쪽이 한숨을 쉬어요. 지호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냅다 두들기고 싶었다. 갈비뼈가 으스러뜨리더라도 갑갑한 가슴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호는 모은 두 손만 꼼지락거렸다.

“그래, 그래. 알았어. 가서 일 봐. 마음 바뀌면 언제든지 찾아와.”

부장은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지호는 꾸벅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지호는 움직일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들은 왜 나를 보고 눈치를 살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던대로 관심 끄고 간격 유지해. 피차 불편하게 선 넘지 말자고. 그동안 잘해왔잖아.

지호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굳이 따지자면 키오스크를 다루듯 필요한 상호작용만 나눴다. 일처리만 잘 굴러가면 되지, 란 생각이었고, 기계와 친분을 쌓는 사람은 없다. 저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그은 선을 굳이 넘지 않는다. 이제껏 교감없이 잘 지내와놓고선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고 관심을 보이고 눈치를 보는 건 이상했다.

지호는 털썩 의자에 늘어졌다. 보고도 아니고 짧은 대화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힘이 쭉 빠졌다. 몸을 가눌 힘도 없어 책상에 무너졌다. 윗선은 내가 다 허락 맡아놨어. 저주처럼 저미는 부장의 목소리를 떼어내듯 지호는 팔에 얼굴을 비볐다. 책상 한편에 놓인 홀로그램 프로젝터 귀퉁이이에 한껏 지친 사람이 비쳤다. 괜찮으세요?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들었다. 지호는 팔꿈치로 책상을 딛고 몸을 일으켰다.

회사에서 편의를 봐준다는데 버팅길 이유가 있을까? 지호가 출근하는 건 관성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출근하고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하고 잠을 자는, 회전하는 쳇바퀴 위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계속 달릴 뿐이었다. 지호는 한 번도 쳇바퀴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못했다. 일을 사랑하거나 책임감이 투철해서는 아니었다. 돌아오지 못할까 봐 겁이 났다. 지호는 황망한 손을 어찌할 줄 모르고 디바이스에서 달력을 띄웠다.

지호는 날짜보다 연도에 눈이 먼저 갔다. 미지가 죽은 지 5년이 지났다. 벌써 5년이다. 지호는 손가락을 쓸어내렸다. 합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틀 휴가를 낸 걸 빼면 지호는 5년 동안 단 5일, 미지의 기일만 쉬었다. 부장이 오지랖을 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정도면 회사 차원에서 강제로 휴가를 쓰도록 유도하는 게 맞았다. 오히려 늦었다.

사내 공유 스케줄을 띄웠다. 지호 이름을 단 프로젝트가 하나도 없었다. 발을 걸친 프로젝트는 있었지만 손이 부족할 때 도와주는 정도지 전담은 아니었다. 그러고보니 담당 프로젝트를 매듭짓고 두 달이 되어가는데도 일을 주지 않았다. 부장 말마따나 악덕 회사는 아니어도 직원 쉬는 꼴을 못 보는 회사인데 이상했다. 이런 게 티를 내는 건가? 지호는 메마른 손으로 눈두덩이를 비볐다. 서걱서걱 허물 벗겨지는 소리가 났다.

지호는 한 달 장기 휴가를 얻었다. 부장이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무실을 나서는 지호에게 부서 사람들은 힘내라고, 푹 쉬고 오라고, 진작 쉬었어야 했다고 한마디씩 얹었다. 사내 메신저로 생면부지에게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지호는 답장하지 않았다. 뭐라고 써야 할지 몰랐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