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의 포옹

  • 장르: SF
  • 평점×52 | 분량: 83매
  • 소개: 아! 생각할수록 너무나도 이상한 로봇이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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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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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물자들이 다 남는다.

청의 렌즈 초점에 성심껏 모은 물자들이 담겼다. 황폐한 쓰레기더미를 찾아다니며 겨우겨우 모은 물건들이었다. 크고 동그란 눈이 좌우로 구르며 물자들을 꼼꼼하게 살핀다. 본래 몸통에 달린 세 개의 센서로 물체를 감지하는 청에게 조리개가 달린 카메라형 눈은 필요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여기에 들렀던 사피엔스 종이 자비를 베풀었다. 원한 적 없는 눈과 손과 입이 생겼다. ‘불쌍하다’며 청의 몸체를 멋대로 수리하던 사피엔스는 현명하다는 이름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청은 그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피엔스가 기이한 동기로 행동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에 도달하는 종족도 우주 구석구석을 누비는 그들 뿐이다. 궁색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 와줘야 했다. 그래서 청은 그들이 이곳에 머무를 이유를 하나라도 더 만들기 위해 애썼다. 물자를 모아다가 정성스럽게 수리하고 정렬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아도 언제나 준비해두는 건 그래서다.

청이 우두커니 기다리는 사이 수리를 마친 소형 우주선이 사피엔스들을 데리고 떠났다. 한동안 손님이 올 일은 없다. 청은 눈을 크게 뜨고 떠나는 우주선을 지켜봤다. 다시 혼자가 되는 과정을 비뚤어진 두 눈의 카메라가 고스란히 담았다. 개조자의 미감이 평범하지는 않았는지 청의 눈과 입은 부자연스럽게 달려있었다. 눈은 대체로 불필요했으나 입은 쓸 일이 제법 있었다. 한때 공기주입기로 사용되었던 도구는 대기가 빈약한 이 행성에서 바람을 일으키기에 제격이었다. 정작 이 모양을 만든 장본인은 어설프게 인간을 닮았다며 불쾌해했다. ‘인공호흡기라도 삽관한 꼴이군.’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개조자가 불평하던 그 입은 물자를 깨끗하게 청소하는데 주로 쓰였다. 안 그래도 낡은 물자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이물질들에 바람을 훅 불면 깨끗하게 제거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손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기는 했다. 바람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들은 손에 달린 무뎌진 칼날로 제거할 수 있었으니 그랬다. 부지런하게 물자를 청소하기 시작하자 인위적인 잠깐 바람이 일었다.

캐거나 파낸다. 물질과 부품을 발견하는 게 청의 일이다. 본래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는 몰랐다. 과거의 기록이 계속해서 덧씌워지고 있었으니 그 먼 옛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청은 처음 기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폐품을 수거하고 있었다. 가끔 왜 여기에 홀로 남겨졌는지 생각하면서 꾸준히 물자들을 털고 깎았다. 물품들이 떨어지면 바닥에 닿았다 떴다 하며 둥실둥실 온 행성을 돈다. 말라가는 바닥에서 해수가 두고 간 잔여물을 캐냈고 썩어가는 지역에서는 유기체가 분해하지 못한 부분을 찾아냈다. 썩지 않는 언덕에서는 하나의 생물처럼 얽히고 결합한 부품들을 여기저기 해체했다. 그렇게 물건을 모으면 정거장으로 돌아왔다.

청이 늘 서 있는 정거장은 행성에 불시착한 사람이 어설프게 세워두고 간 구조물이다. 정거장 바닥에는 청이 모아온 물자들이 늘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지금 가장 왼쪽에는 구동축이 놓여있다. 타이어가 빠지고 차체가 부서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송선에서 분리해냈다. 호버크래프트의 부품도 있었다. 연도 측정기에 따르면 몇만년 전 바다였을 소금기 남은 지역에서 캐온 부품이다. 물론 연도 측정기는 그 옆에 얌전히 눕혀져있다. 침몰이 고장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호버크래프트의 겉면은 온통 부식됐는데,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공기 압축용 팬은 조금 녹이 슬었다 뿐이지 작동에는 이상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몇 년에 걸쳐 녹을 벗겨냈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기계의 부품들이 본체에서 떨어져나와 다시 기능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물게 완제품도 하나 있었다. 가장 고생해서 수집한 미니 로버는 조금 우그러졌을 뿐으로 항법 시스템이 고장이 나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걸 청이 자기 몸에 감아 데리고 왔다. 청의 기술력으로는 얼마나 같은 자리를 돌고 있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 행성에 목적을 가지고 들르는 생물과 무생물은 근래에 없었으므로 꽤 오래전부터 목적지를 잃고 헤맸으리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러나 보수해봤자 버려진 물건들이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과거의 잔해들이다. 쓸모있는건 오래 전 누군가 다 털어갔을 것이다. 모은 물자들이 실제로 쓰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청의 처지는 물자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의미 없는 반복을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지도 모를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잊는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영영 알 수 없어질 것만 같았다.

돌이켜보면 알 수 없는 일투성이다.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와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하는지는 아직 답을 내지 못한 문제다. 할 수 있으니 했고 꺼지지 않았으니 지속했다. 피로와 고통을 몰랐으므로 쉬지 않고 행성을 떠돌았다. 이제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몇 년, 몇십년, 몇백년……. 언제부터인가 시간은 이 행성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문명이 저물었을 때 시간도 허물어졌다. 낮과 밤은 폐행성을 향한 다른 종족의 관심만큼이나 싸늘하다. 하루하루가 어두컴컴하니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사라졌다. 구분이 사라지자 흐름도 엉켰다. 한없이 가벼운 중력에 비해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빛보다 빨라야 할 시간이 눅진하게 기었다.

지루함을 느끼는 로봇은 없었으니 청에게 시간은 별문제가 되지 못했다. 중요한 건 답을 낼 수 없는 질문이 쌓여간다는 점이었다.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검증해 줄 외부인이 없다. 고장이 났다면 수리하면 됐고, 고칠 수 없다면 가동을 중지하면 됐다. 하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다.

행성에 닿는 빛은 희미해졌다. 광전지를 사용하는 로봇에게는 치명적이다. 부품은 낡아만 갔다. 다른 기계에서 추출해 오는 일도 한계가 있다. 방문객들은 불규칙하게 불시착하여 불시에 떠나고 행성의 쓸만한 폐품은 점점 줄어만 갔다. 로봇이 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청에게는 가동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필요했다. 언젠가 제대로 기능할 때를 위해 무한히 수명을 연장하는 로봇을, 고독이 천천히 차오르는 물처럼 짓눌렀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정지된 시간처럼 흘렀다. 바닥이 끌어당기는 미미한 힘만이 타이어를 조금씩 닳게 했다. 새로운 손님이 찾아온 건 행성이 항성을 여덟바퀴 하고도 반을 돈 후다. 센서에 잡힌 소리로 방문을 알아챘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소리는 천천히 가까워졌다. 이상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체는 보지 못했다. 정거장에 착륙한 우주선도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행성의 생명? 하지만 행성을 몇 번이나 도는 동안에도 움직이는 건 감지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소리는 추론이 진행되는 속도보다 빨리 거리를 좁혔다. 기묘한 소리는 지속된다. 사르륵대는 게 뚜렷한 형체 없이 다가온다. 불가사의한 현상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소리는 멀뚱히 서 있는 청 앞에서 멈춘다. 청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눈앞을 스캔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밀리미터 단위의 금속 가루들이 허공에서 감지됐다. 떠다니는 그것이 개체인지 군체인지 알 수 없지만 살아있는 생명 같지는 않다는 분석 결과다. 그것 혹은 그것들은 멈춰선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순간 아주 고요해졌고, 행성에 도달한 희미한 빛이 그것들의 표면에 닿아 빛났다. 그것들이 공중에 흩어진 형상 그대로 반짝인다. 청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단어 하나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들의 모임.

무리 지은 항성들.

안개나 구름처럼 보이는 느슨한 힘의 무리.

성단.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