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세종 18년 7월 11일
동방청룡기우제(東方靑龍祈雨祭)를 행하다.
화살은 토끼의 오른 눈에 가 박혔다. 생과 사를 가르는 단 한 발. 화살에 머리를 꿰뚫린 잿빛 토끼가 맥없이 고꾸라졌다.
안개가 원령처럼 숲을 떠도는 새벽이었다. 검은 직령을 입고 역시 검게 물들인 대나무를 엮어 만든 초립을 눌러쓴 남자가 홰나무 뒤에서 발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성명은 서이담, 허여멀끔하니 앳된 얼굴과 달리 뻣뻣한 면직물에 감싸인 널따란 어깨에서는 간신히 수그러든 흥분의 여운이 느껴졌다. 얄팍한 입술은 앙다물었고, 길게 찢어진 눈매가 매섭고도 엄정해 보였다. 왼손에는 물소 뿔로 만든 각궁이 들려 있었는데, 마디가 굵고 거친 손가락 끝 손톱은 흰 부분이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바투 잘려 있었다.
가뜩이나 상처가 많은 손이었다. 특히, 오른손 손등에는 손가락 두 마디 길이쯤 될 법한 검붉은 흉터가 잔뜩 성이 올라 꿈틀거리는 지네처럼 감사납게 도사리고 있었다.
이담이 토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생이 빠져나가고 남은 껍데기는 누추하고 무거웠다. 이담이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건 살생을 넘어선 일이다.”
스승님은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다.
“살생 그 자체는 어렵지 않을지 몰라도 고통 없이 죽이는 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법이지.”
어느 날 아침, 숫돌에 칼을 갈면서 스승님은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하던 그에게 이렇게 일러 주기도 했다.
“사는 건 죽임으로써 가능하단다. 너를 살린 죽음들을 잊지 마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근면 성실하되 칼이 무뎌지게 그냥 두면 안 된다. 날이 서지 않은 칼로는 풀 한 포기를 벨 때조차 피 흘리게 만들고 말 테니.”
이담이 바짓부리에 묻은 흙덩이를 털어 내며 허리를 일으켰다. 골짜기를 훑고 내려온 바람결에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토끼 사체를 집어 망태기에 넣으려던 이담이 문득 귀를 곤두세웠다. 몇 리 밖 냄새의 정체를 따져 밝힐 정도로 이담의 후각은 단련돼 있었다. 대숲에서 등불 같은 한 쌍의 눈동자가 형형한 광채를 발하다 감쪽같이 사라졌다.
범인가. 이담이 각궁을 더듬어 쥐었다. 어디서부터 나를 쫓아오고 있었을까.
가뭄이란 비단 인간들에게만 혹독한 적은 아니었다. 계곡물이 마르고 풀들이 노랗게 시들어 바스라지자 배를 곯은 짐승들은 민가에까지 어슬렁거리며 내려왔다. 노루며 족제비 따위가 일이 아니었다. 큰톱장이 박가의 돌쟁이 아들이 흙담을 넘어 들이닥친 범에게 물려간 것이 나흘 전 일이었다. 코끝에 상처가 나 있는 커다란 암호랑이였다. 새끼를 잃은 어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실성한 듯 머리를 풀어헤친 박가의 아내는 그 길로 창 하나를 뽑아 들고 산에 올랐다.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으려나. 깊은 숲속 느티나무 아래에 잠든 듯 죽어 산신에게 넋을 바쳤을까. 범의 굴속으로 기어이 찾아 들어가 놈의 대가리에 뾰족하게 벼려진 쇠촉을 찔러 넣고 말았을까.
수풀 사이로 불쑥 대가리를 들이민 호랑이가 위협하듯 으르렁거렸다. 두둑하게 부풀어 있어야 할 뱃가죽이 푹 꺼져 있는 꼴을 보니 며칠이나 굶주렸는지 상황을 익히 짐작할 만했다.
안 돼, 활로는 쓰러뜨릴 수 없을 거야. 이담이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느릿느릿 왼손을 허리춤에 가져가 댔다. 거기에는 환도를 넣어 다니기에는 지나치게 둔하고 넓적해 보이는 두툼한 가죽 칼집이 달려 있었다. 이담은 길이 들어 반질반질한 소나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이윽고 그의 왼손에 딸려 나온 것은 일 척 오 촌 길이의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이었다.
그 칼 어디에 미처 닦이지 않은 피 냄새가 배어 있었는지 호랑이가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손잡이 바로 밑에 새겨져 있던 削風刀(삭풍도)라는 석 자가 섬뜩하리만치 선명해 보였다.
“세상에 목숨을 걸고 벌이는 싸움만큼 절박한 건 없지.”
비지땀 속에서도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이담은 스승님의 충고를 다시 한 번 되새겼다.
“똑바로 마주 보아라, 상대의 눈을. 절대 피해서는 안 돼. 네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하는 순간, 적은 네 목덜미에 송곳니를 찔러 넣고 말 거다.”
식칼이 서늘한 밤의 대기를 동강 내며 휘익, 살의에 찬 휘파람을 불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호랑이가 엎드리다시피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미렷다. 이담이 식칼을 치켜들고 과감하게 앞으로 박차고 나갔다. 그 기세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암호랑이가 사람 손을 탄 짐승처럼 양순하게 꼬리를 말아 넣으며 끙끙거렸다.
설마하니 내가 아니라 고작 이 토끼 한 마리를 노리고 있었단 뜻이냐? 살기를 누그러뜨린 이담이 칼을 고쳐 쥐고는 치고 나가려던 발길을 멈추었다. 호랑이가 흐엉 낮게 울었다. 허기에 지쳐 축 늘어진 새끼들을 위해서라도 오늘 밤에는 반드시 사냥에 성공해야 했을 것이다. 칼집 속에 도로 칼을 꽂아 넣으며 이담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허나 만에 하나, 작금의 이 가뭄을 이겨 낸 새끼 호랑이가 자라 마을의 아이들을 덮친다면?
그 질문에 답을 내어놓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해 이담은 토끼 뒷다리를 집어 호랑이를 향해 던져 주었다. 범이 덥석 토끼를 받아 물었다.
죽은 토끼를 잇새에 매단 채로 시근덕거리던 범의 콧등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이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호랑이의 목덜미에 부러진 창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면 너는……. 이담이 망연하게 입을 벌리고서, 숲 그림자 속으로 숨어 들어가던 맹수의 궤적을 더듬었다.
“실상 그보다 더 치열한 싸움이 딱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다른 누구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지.”
스승님은 덧붙여 말씀하셨다.
“이를테면, 자기 새끼라든가.”
보름달이 우듬지에 은회색 비늘을 흩뿌렸다. 빈 망태기를 추어올리며 이담은 터덜터덜 흙길을 걸었다. 산짐승들의 소행인 듯 엉망으로 파헤쳐져 있던 봉분을 돌아 허물어져 가는 오두막 앞에 도착했을 때, 이담이 내내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복숭아나무 둥치에 매여 있던 말들이 콧김을 뿜으며 뒷발질을 했다. 문 밖에 서 있던 사내아이가 그를 발견하고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섬돌 위에 놓여 있던 가죽신이 누구의 것인지 이담은 단박에 알아보았다. 한편, 소년의 옆에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청년이 흙벽을 짚은 채로 삐딱하게 서 있었는데, 이담의 등장에 반가워하거나 인사를 건네는 예의를 갖출 생각일랑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사립문께로 낯을 들이밀면서 비단옷 차림의 사내아이가 고했다.
“영감님, 숙수 나리께서 도착하셨나이다. 나리, 이 늦은 밤에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어서 드시지요. 영감께서 한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신을 벗은 이담이 서둘러 문턱을 넘었다.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베개를 돋워 베고 상선 영감은 상투머리를 한 채로 모로 누워 있었다. 대전 상선 내관 방손순. 그는 어딘가 유별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모시는, 아니, 한때나마 이담 역시 정성을 다해 떠받든 바 있는 주인처럼.
대체 누가 누구 집에 들어가는 줄 모르겠군, 이담이 헛웃음을 삼키며 바닥에 궁둥이를 내려놓았다.
“어디 사냥이라도 다녀오는 길인가.”
상선이 반색하며 홀로 기울이고 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설핏 풍기는 그 향을 맡아 보자니 감향주가 분명했다.
“달이 밝기에 뒷산을 어슬렁거리다 내려왔지요.”
팔꿈치로 바닥을 괴어 상체를 세우며 상선이 다시 물었다.
“사냥감은 좀 있던가.”
“씨가 말랐습디다.”
이담이 잘라 말했다.
“비가 내린 지 벌써 넉 달은 넘었는데, 어찌 풀 한 포기라도 온전하겠습니까. 할아비의 할아비, 그 할아비의 할아비가 살아 계실 적에도 돌무더기 위로 넘쳐흐를 듯 차 있었다던 우물까지 말라붙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어찌하여 하늘이 저희에게 이런 벌을 내리시는지. 혹여 그 질문의 답을 얻고자 이곳까지 납신 건 아니겠지요.”
이담이 의뭉스럽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물론, 아니네.”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상선이 그를 마주 보았다. 이담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허나 그것과 긴밀히 관련된 문제에 대해 논하고자 자네를 찾아왔지.”
이담의 낯을 응시하던 상선이 지극히 예사로운 말투로 덧붙여 말했다.
“제주로 가서 용을 잡아오게. 산방산 해안의 깊은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천년 묵은 청룡을. ‘그분’의 명령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