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웃으시니 보기 좋네요. 그런데 밥은 왜 자꾸 안 드세요. 여기 선생님들 힘들게 해서 뭐하시게요. 다 아빠 도와주는 사람들인데.
바깥엔 아주 해가 쨍쨍해. 비가 내린다더니 오늘도 우산을 괜히 가지고 왔어. 요즘 마음이 싱숭생숭해요. 여름 탄다는 것도 있나? 동창이 그러대요. 우리는 이제 여자도 남자도 아닌 나이라고. 그래도 아빠 딸이 화축동 여배우던 시절도 있었지.
화축동 기억나요? 뭐 이렇게 계단 많은 동네로 오냐고 내가 이삿날 울었잖아. 럭키상회 아줌마는 그렇게 깍깍 우는 여자앤 첨 본다고 나를 끝까지 까마귀라고 불렀어. 기억나지? 골목 모퉁이에 초록 전파사랑 문구사, 사라다빵이 끝내주게 맛있던 제과점이랑…
그리고 우리 옆집에 내 친구. 은이.
은이는 첨부터 나한테 살가웠어. 화축여고 가는 첫 날부터 어깨에 손을 척 얹더라. 너 새로 이사 왔지, 네가 길을 아냐, 같이 가준다. 그래 놓고는 놀이터로 빠져서 지각시켰다니까. 그네 타면서 웃긴 얘기 듣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게 다 동네에선 케케묵은 농담이었던 거야. 철 지난 농담에 내가 웃어대니까 저도 신났겠지.
웃긴 얘기만 한 것도 아냐. 무서운 얘기는 더 많이 했어. 저 계단은 쓰지 마라. 일 년에 꼭 한 명씩 굴러서 죽는다. 저 집에선 불이 나서 일가족이 죽었다. 비 오는 날엔 우는 소리가 들린다. 하천 왜 그렇게 빤히 보냐. 너 가리키는 물귀신이 보이냐.
어쩌면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미리 날 반죽한 걸까. 예방접종이랄까? 내가 너무 겁먹고 이사라도 갈까봐 그랬을 거야. 은이가 썰렁한 소릴 하도 해서 난 그 얘기도 정말 장난인 줄 알았지.
네, 그 함진아비 얘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