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내내 이어지던 장마가 비로소 끝이 났다.
해가 타오르자 피부는 붉게 익고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맺혔다. 저 밖에서 매미는 며칠 남지 않은 날을 직감한 듯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단화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었다. 연이은 비에 죽어가던 화초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르르게 빛났다. 그녀는 손을 뻗어 행거에 널린 옷을 만졌다. 눅눅하던 빨래가 바짝 말라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집안 어디선가 피어오르던 곰팡내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만큼 말끔했다.
“그래도 또 비가 온대.”
단화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또?”
친구는 사 온 수박을 막 냉장고에 넣는 중이었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전하는 반갑지 않은 소식에 단화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게 말이야. 환경오염이 문제야. 인간들이 너무 자연을 망쳐. 세상은 순리대로 살아야 하는데 사회는 역행하고 있잖아. 어쩌면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볼지도 몰라.”
신랄하게 말을 내뱉고는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어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그녀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거리는 모습을 단화는 멍하니 쳐다봤다. 만약 지구의 종말을 본다면 나 혼자가 좋겠어. 라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친구는 손등으로 땀을 닦아냈다.
“덥다.”
“에어컨 틀까?”
“그래. 나도 환경오염에 일조하지 뭐.”
그 말에 단화는 거실로 돌아와 협탁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손끝에 휴대폰이 닿는다. 지이잉. 지이잉. 아까부터 진동하는 걸 애써 모른 척한다.
소파에 앉은 친구가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몸을 내맡겼다. 후우. 살 것 같다. 혼자 중얼거린다.
“베란다 문 안 닫아도 돼?”
친구가 물었다. 단화는 열린 베란다 문 너머 아파트 단지 사이로 보이는 산봉우리를 봤다. 그녀는 친구의 말을 따라한다.
“나도 일조하지 뭐.”
이렇게 휴일이면 남편은 저 산을 올랐다.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면 동네 뒷산이 힘들기는 뭐가 힘드냐고 핀잔을 줬다. 당신은 그게 문제야. 궁금하면 올라가 보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단 한 번도 단화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하지 않았다. 그걸 묻는 게 아닌데 남편은 그녀가 무엇을 말하든 꼬아서 들었다. 꼬인 대화는 소통이 되지 않은 채로 가슴에 쌓였다. 그래서 가끔 아니, 아주 많이 산에 올라간 남편이 길을 잃어 영영 내려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쾅쾅쾅.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 소리가 꽤 커서 놀란 친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쾅쾅쾅.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계속 두드리다가 더욱 세고 둔탁한 소음이 집안을 울렸다.
“야! 문 열어. 너 거기 있는 거 알아! 이 문 안 열어?”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당황한 친구가 단화를 보았다.
“괜찮아. 시어머니야.”
그녀를 다독이면서 단화는 땀이 찬 손을 옷에 문질렀다. 그새 묵직해진 발을 옮겼다. 소리가 요란해졌다. 옆집에서 쫓아오겠네. 친구가 들으라는 듯 읊조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숨이 턱 막히는 오후의 열기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달려들었다. 언뜻 비친 그 얼굴이 남편 같아서 단화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그림자가 단화의 팔을 낚아챘다. 억센 손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단화는 신발장을 붙들었다.
“전화 안 받으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여자의 목소리에 단화는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남편보다 작은 키, 남편보다 여린 몸, 짙은 화장품 냄새. 진한 화장을 한 얼굴이 드러났다. 단정했을 머리는 방금까지 문을 주먹으로 두들기고 발로 찬 탓에 산발이 되었고, 열기 탓에 얼굴을 흐르는 땀이 화장을 지웠다. 문신한 눈썹이 일그러졌다. 붉게 칠한 입술이 찢어진다.
“내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으랬지? 우리 아들 집에서 우리 아들이 준 돈으로 호의호식하면서 나를 무시해? 감히 네가 나를 무시해? 또 그래 봐! 또 그래 보라고!!”
억센 손아귀로 단화를 흔들어댔다. 휘청휘청. 맥없이 몸이 흔들렸다.
“그만 하세요!”
거실에 있던 친구가 달려와 둘 사이를 막아섰다.
“남편 잡아먹고 너는 잘 살아지냐? 숨이 쉬어져?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 네년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