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이라는 곳은 으레 그렇듯이, 동네 아주머니들이 서로 친교를 다지며 깔깔거리며 수다를 떠는 공간이기도 하죠. 2016년 어느 날, 저는 자주 다니던 찜질방에서 어떤 누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찜질방에 오던 8살 위의 누나인데, 매우 활기차고 모든 사람들하고 친해보였죠. 한참 어린 남자인 저에게도 웃으며 말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놀랐습니다. 그 누나는 스스로 조현병 환자라는 걸 밝혔으니까요. 외모도 예뻐서 젊을 때 인기가 많았지만, 대학생 때 갑자기 조현병에 걸리며 학교를 그만둬야 했던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죠. 그럼에도 그 누나는 등산을 다니며 약을 먹느라 살이 찌는 걸 관리하고, 밝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누나의 모습이나, 주변 사람들이 그 누나를 대하는 모습은 저에게 많은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제가 SF소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아이디어만 조금 있고 복잡하다는 말을 하자 그 누나는 책을 추천해줬습니다. 헤르만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죠. 저는 그 소설을 읽으면서, 두 인물이 완전히 다른 삶을 살면서도 서로 끝없이 연결되는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누나의 조현병 이야기를 접목시켜, <청록의 시간>의 기본 얼개가 탄생되었습니다. 전체 이야기는 2024년에 완성됐죠.
몇년 전 부터 한국 SF가 붐을 일으키고 있다곤 하지만, 저는 건방지게도 요즘 SF의 전개방식이나 이야기가 그렇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어릴 때 많이 보았던 고전 SF이기 때문입니다. 남이 써 놓은 설정이나 미래 기술을 그냥 쓰면서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기 보다는, 세계를 만들고 미래를 설계하면서 그 과정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람들로 인해 현대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또한 제가 영화를 많이 보다보니,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한편의 영화가 펼쳐졌으면 했습니다. 길고 지난한 이야기들을 몇권이고 다 늘어놔서 이해되도록 하는게 아니라, 구성적으로도 거의 한권 안에 완결되도록 하는게 중요하다 생각하기도 했죠. 그래서 어느 부분은 굉장히 빠르게 몽타주 기법으로 빠르게 지나가도록 표현하고, 어느 부분은 눈에 그리듯 액션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인물들의 감정을 그대로 묘사하기 보단 배경이나 행동묘사로만 드러내는 부분들을 많이 넣었습니다. 참고로 저의 최애 감독은 대런 아르노프스키이고, 최애 영화는 <천년을 흐르는 사랑>입니다.
첫 소설을 쓰면서 뭘 그리 힘을 주고 폼을 잡느냐라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수천편의 영화를 보고 수십편의 영화분석을 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가 모양을 갖춰갔던 것이죠. 제가 이런 소설을 쓴 이유는, 제가 그런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다른 사람과 인문학적 과학적 설명을 듣고 나누며 그사람과 감정적 교류가 오가는 걸 좋아합니다. 바퀴를 만들지 말라고 한다면, 우습게도 전 바퀴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어떤 SF는 이미 누군가 다 만들어 놓은 세계를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지만, <청록의 시간>에서는 그 세계 자체가 곧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마고와 재호이지만, ‘청록의 시간’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야기 구성 이외에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장치를 일부러 넣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SF에서 이렇게 하지 말라’라는 말에서 조금 벗어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괜한 객기를 부리려고 그렇게 쓴 것이 아닙니다. 어느 리뷰에도 덧글로 달았지만, 이 이야기의 2부에서 3부로 넘어사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제가 실제 20여년을 겪었던 아픔의 시간을 비유해서 묘사한 것입니다. (1,2부, 3,4부가 나뉜 이유도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고 만든거긴 한데 아무도 그 얘긴 하지 않아서… 나중에 할 기회가 있으면 하겠습니다) 저는 그런 아픔의 시간을 겪으며 20여년간 남이 시키는 대로, 다른 사람의 창작물을 대신 만들어야 했습니다. 수백편의 애니메이션, 수십회차의 만화, 홍보영상, 다큐영상 등을 말이죠. 그 사이에 인간애도 많이 상실되었으며 저의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외치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저의 첫 소설이기 때문에, 세상에 토로하듯 거칠고 투박하게 제가 하고 싶은 걸 쏟아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이야기를 완성하고, 스스로 많은 위안을 얻었습니다.
제가 소설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 낼 기회가 된다면, 그땐 더 읽기 쉽고 다른 사람의 입맛에 맞는 얘기들을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물론 완벽하다는건 아닙니다. 인물 표현에 대해서도 조금 아쉽고, 스스로도 ‘이런 부분들은 조금 더 다듬는 게 좋겠다’ 하는 곳들도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나 만듦새가 스스로 마음에 들기 때문에, 추후에 조금 수정하더라도 전체를 뜯어고치는 일은 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조만간, 제 마음에 들지 않고 피드백을 받은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고 수정하려 합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좋겠고, 조금이라도 공감해주신다면 더없이 행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