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시간여행 이야기

17년 7월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볼 때마다 저는 한 가지 불만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시간 여행을 통해 역사를 바꾸는 데 성공하고, 바뀐 역사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요. 그들도 모두 행복할까요?

제가 처음 에디터에 적어 내려갔던 소설은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한 사람을 타임캡슐에 실어 과거로 보냅니다. 이를 놓고 사람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과거로 되돌아간 사람이 역사를 바꾸게 되면, 미래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1. 바뀐 역사는 새로운 타임라인에 써지고, 기존의 타임라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즉, 타임머신을 개발하여 누군가를 과거로 보낸 보람도 없이, 미래에 남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2. 과거로 보낸 사람이 하는 일 역시, 기존의 타임라인에 이미 모두 반영되어 있다. 타임라인은 바뀌지 않고, 역시 남은 사람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3. 과거로 보낸 사람이 새로운 타임라인을 쓰는 순간, 기존의 타임라인은 사라진다. 미래에 남은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모두 사라진다.

4. 과거로 보낸 사람이 새로운 타임라인을 쓰는 순간, 기존의 타임라인이 변화한다. 누군가는 더 행복한 상황에 처하고, 누군가는 불행해지고, 누군가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라지겠지만, 변화하기 전의 기존 타임라인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진다. 그들이 살아왔던 모든 삶의 흔적과 함께.

5. 기존 타임라인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타임라인으로 이동한다. 새로운 타임라인에 자신의 자리가 없는 불행한 사람들의 존재는 사라진다.

그 어떤 경우에도, 남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5번 정도가 그나마 낫지요. 그게 시간여행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바꾼다는 건, 무언가를 지우는 거니까요. 기억을 온전히 유지한 채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주인공은 그나마 괜찮지만,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자신의 삶을 난도질 당하는 ‘남겨진 사람들’은 행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와 같은 가능성들을 놓고 남겨진 사람들이 갑론을박하던 이야기는 결국 폐기되었습니다. 재미가 없어서요. 대신 저는 남겨진 사람들의 삶에 최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여행의 규칙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 먼저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을 최소화했습니다. 시간여행자와 남겨진 사람들의 차이를 최대한 적게 하고 싶었거든요. 제 규칙에서 왜곡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어떤 사건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 뿐입니다. 그것도 자신이나 자신 주변에서 일어난 일만 가능합니다. 바뀌는 건 완전히 무작위적이며 왜곡자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건이 바뀌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합니다.

2. 사건이 바뀌었다는 인식을 할 수 있는 건 주시라는 능력을 가진 다른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주시자들도 미래를 보지는 못합니다. 왜곡이 일어났다는 걸 인식하고, 바뀌기 전과 바뀐 후의 사건 진행을 동시에 알 수 있는 것 뿐이죠.

3. 왜곡이 일어나면 새로운 타임라인이 생성됩니다. 실제로 왜곡을 시도한 사람은 여전히 기존의 타임라인에 남아있게 되고요. 이 기존의 타임라인은 서서히 새로운 타임라인과 합쳐집니다. 합쳐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타임라인에 대한 기억들을 서서히 잃게 되고, 합쳐진 후에는 완전히 잊게 됩니다.

4. 따라서 왜곡을 시도하는 사람도 자신의 기억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역사를 바꿀 수 있습니다. 일 분전의 과거를 바꾼다면 고작 몇 분의 기억만 잃을테니 큰 문제는 아닐겁니다. 하지만 일 년전의 과거를 바꾼다면, 타임라인이 완전히 합쳐지기까지 대략 수 년간의 기억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 처럼 서서히 잃어가야 하겠죠.

대략 이 정도의 얼개를 세워놓고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3회분 정도를 쓴 상황에서 무작정 글을 올려버렸습니다. 혼자서 쓰다가는 처음 썼던 이야기처럼 중도에 포기해 버릴 것 같았거든요. 결국 이렇게 완결까지 왔으니 그건 잘한 일 같습니다만, 덕분에 설정은 여러모로 누더기가 되었습니다. 이미 올린 분량에서 해 버린 이야기들을 수습해야 했으니까요. 너무나 복잡해져버린 설정을 이야기 내에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번외편까지 따로 올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2부를 쓰면서, 결국 저는 그냥 쓰고 싶던 걸 다 써보자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미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진 설정을 독자분들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은 포기하고, 타임 패러독스 없이 논리적으로 완벽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포기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이야기가 폭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기현은 1부에만 등장하는 악역이었습니다. 2002년의 에피소드는 처음에는 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그저 지나가는 이야기였죠.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주인공들의 능력도 뻥튀기 시켜 버렸습니다.

중간에 몇 번이나 펼쳐놓은 이야기들이 수습되지 않아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부렸던 욕심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진전시켰고, 결국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된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정말 진심으로 가슴깊이 감사드립니다. 연재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던 건 모두 독자님들 덕택입니다.

결국 마무리를 짓고 나니, 글을 시작할 때의 욕심과는 달리 다른 시간여행물과 비슷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우선은 읽어주신 독자분들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은 안 하시기를 바라는 정도지만, 욕심을 부린다면 다른 시간여행물과는 다른 독특한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셨다면 더 바램이 없겠습니다.

제 자신의 글솜씨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야기들을 쓰고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에 더하는 건, 제가 아주 조금이나마 새로운 무언가를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때문이겠죠. 그 즐거움 만큼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올리는 게 순전히 저의 즐거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만큼,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 소심한 즐거움을 서로 주고 받는 풍요로운 행복으로 만들어 주시는 독자님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만, 이 이야기로 익명의 분들에게 후원까지 받았습니다.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 응원해 주시는 분들, 후원해 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립니다.

다음 이야기는, 좀 더 편하게 즐기실 수 있도록 노력해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