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의 손가락을 따라 발렌타인은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의 윤곽선 앞에 놓인 그림은 다른 그림들과 사뭇 달랐다.
다른 그림들은 분필로 그려졌고 사람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반면, 그것은 혈액으로 그려진데다 사람의 형상을 띄고 있지 않았다.
워낙 단순한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져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조차 알기 힘들었다. 마치…… 유서 깊은 가문의 문장처럼 상징적으로 보였다.
발렌타인은 미간을 좁히고 피로 그려진 문장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실루엣이 그 문장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러니 이 문장은 아마 아버지가 그렸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어째서? 응접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 있던 모두가 죽어가는 와중에 이런 그림을?
-2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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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부인께선 이게 뭔지 아시겠어요? 무슨 의미가 있는 그림인지?”
후작부인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손수건에 그려진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봐도 그림은 단순한 선과 도형으로 이루어져 추상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게 어떤 가문의 문장 같다는 막연한 인상은 있었다. 그러니 박식하고 연륜이 깊은 후작부인이라면 떠오르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집중해서 그림을 보던 후작부인은 음, 하고 낮은 신음을 냈다.
“이건 아마 고대 제국 시대에……. 유리 대제가 위세를 떨치던 때 쓰이던 문장 같구나. 당시엔 극도로 단순화된 문장을 사용했다고 배웠던 것 같거든. 그런데 왜 이런 걸 물어보는 거니?”
후작부인의 설명에 발렌타인은 당혹을 감출 수가 없었다. 갑자기 웬 고대 제국 시대란 말인가? 역사 공부를 할 때나 나오는 이름이 자기 집에서 일어난 사건의 한복판에?
“고대 제국…… 시대요?? 어……. 그게요, 아버지께서 마지막 순간에 이 그림을 남기셨다 하거든요. 그래서 뭔가 중요한 단서가 아닐까 싶어서 여쭤봤어요.”
하지만 뜬금없이 고대 제국 시대의 문장이라니? 발렌타인은 대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히려 더욱 알 수 없어졌다.
-4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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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성의 서재에서 찾아낸 바에 따르면, 고대 제국 시대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표현 속에 복잡한 의미를 담는 기호화된 미술 양식을 고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당대 사람들에게도 심오해보였을 미술품을 현대인이 해독하기란 까다로울 수밖에 없었다.
고대 제국 시대 미술품에 있는 십자 문양은 기본적으로 검을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만약 십자 문양이 사물을 대담하게 양분하고 있다면? 강대한 무력,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뜻이 파생되기도 했다. 이것이 파트레샤가 응접실의 문장에 대해 알아낸 전부였다.
아마 데이도 비슷한 지점까지는 알아냈을 터였다. 그리고 문장의 전체 의미를 해독해보려다 실패해서 나가 떨어졌을 테고.
파트레샤는 한숨을 내쉬었다.
-8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