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머쓱한 임시 큐레이션] 브릿G의 시인들
시(詩)란 무엇인가?
본인은 얼마 전까지 학생을 가르쳤던(현재 무직) 사람으로 한 가지 느낀 바를 말해보자면, 아이들이 국어를 배울 때 가장 짜증을 냈던 부분이 바로 시(詩)였다는 겁니다. 문법이야 껄끄러워하면서도 한글 짱 국어 짱 따위의 추임새로 세종대왕을 찬양함으로써(문제도 딱히 어려운 편도 아니고)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 완화효과는 있으나, 시는 도통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더라 이겁니다.
이유가 뭔고 하니 허구한 날 임이 어쩌고, 자연이 어쩌고, 소시민이 어쩌고, 도시가 어쩌고, 요건 요거고, 저건 저거다 따위의 교육만 해대니 일단 재미가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시라는 걸 재밌게 다루기도 힘들기에 선생은 결국 교과서와 참고서로 통달한 지식을 앵무새마냥 주구장창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반성합니다. 아니 뭐 점수 올렸으면 됐지. 예. 그래도 반성합시다.
이쯤에서 본인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살짝 해야 할 듯싶습니다. 본인은 중학교 2학년 시절 국어 선생(이하 이 씨)에게 박달나무로 만든 곤봉으로 죽도록 처 맞은 바 있었으니, 바로 시 때문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은 겁니다. 당나라의 두보, 고려의 이규보와 맹사성, 조선의 정철과 송순…… 그들이 원탁에 모여 각자의 시를 탐독한들, (외재율 속에 묶여 있으되) 어차피 술과 자연에만 관심이 있는 것일 텐데 말입니다.
그리하여 국어 시간에 시를 배울 때마다 아니 이게 왜 임금에 대한 충성입니까? 도대체 이게 왜 희망이고, 왜 이게 그리움입니까? 이 사람이 정말 이 생각으로 썼대요? 라며 하나하나 따져대니, 박달나무곤봉을 늘 소지하고 다니던 이 씨가 입을 열기를 “허허허 짓궂은 녀석.”하면서 껄껄 웃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가히 음흉함 그 자체였고, 본인은 그것을 다음 주에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다음 주 국어 시간, 이 씨는 난데없이 나를 교탁으로 불러내 과제 메일 제목을 [숙제라서 보냅니다.]라고 썼다는 이유로 박달나무곤봉을 휘둘렀고, 그 박달나무곤봉에 두들겨 맞은 어린 저는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박달나무는 엄청 단단하다 이겁니다. 내 돌머리가 견디지 못하다니……
아무튼 제가 짓궂게 질문을 쏴댔던 날, 아마도 이 씨는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자식 괘씸하잖아?’ 했을 겁니다. 이후 저는 다수가 합의하여 명시되어 있는 교과서에 대해 그냥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딱히 이 씨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저의 객기였다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어린 아이의 객기를 너그럽게 감쌀 수 있다면, 잠시 눈을 감고 옛날로 돌아가 봅시다. 아니다. 눈은 감으면 안 됩니다. 다음 글을 읽어보십시오.
엄만 일단 하늘나라에 도착하면
나한테 편지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니까 여기 그냥 있어야 해요.
안 그러면 우릴 찾지 못할 거예요, 소녀는 그렇게 말한다.
저녁마다 소녀는 창가에 앉아
몇 시간씩 기다린다.
지평선은 어둡고 음울하다.
엄마의 편지가 길을 못 찾고 있는 건 그 때문일지 몰라.
여러 날이 흐른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정말 멋진 시 아닙니까? 하지만 다비드 포앙키노스의 <샬로테>라는 소설의 한 부분입니다(정말 저렇게 나옵니다). 시 같지만 분명히 소설이죠. 요게 참 묘한 말입니다. 시 같지만 소설이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이 작가라면 하나의 글을 꾸려가면서 온갖 감각을 다하여 이야기를 매만지고, 흐름을 터주며, 어쩌면 사람과 사랑 혹은 갈등과 환희 그 어떤 무언가를 문장 속에 집어넣을 겁니다. 그렇다면 시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시는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인터스텔라>라는 SF영화에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시에 대하여 비중을 느끼도록 하는데 소설이라고 상관없겠습니까?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빅토르 위고, 애드거 앨런 포, 헤르만 헤세 같은 작가들도 시를 썼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시를 읽으며 고찰하거나, 가끔씩은 써보는 편이 결코 손해는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어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맥주 한잔 마시며 크아아아악 하는 것도, 기지개를 갸아아아악 피는 것도 어찌 보면 일종의 시나 다름없다고 했을 때, 그렇다면 시는 우리 모두의 능력인 겁니다. 그냥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습니다. 제한시간 안에 오지선다에서 방황을 끝내야 하는, 어찌 보면 그 불행한 영혼에서 이미 한참 벗어난 인간에겐, 시란 그런 의미입니다. 따라서 저에겐 시를 쓸 능력이 분명 있습니다. 하물며 고 씨 성을 가졌고 이름은 외자인 늙은 등신도 나 시인이요 하면서 산소를 낭비하고 있는데, 누구라고 못하겠습니까?
결국 시(詩)는 사람 마음대로입니다. 집필도 해석도 그냥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겁니다. 예컨대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들께서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 추억을 가져간다네」라는 시를 슥 내민다면, 그걸 받아든 부모는 ‘허허허 이 녀석이 나와의 시간을 원하는구나.’하고 해석해도 상관없다 이겁니다. 아들이 용돈을 원해서 쓴 시(詩)라고 한들…… 예 물론 저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 만약 여러분 중에서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그냥 선생이 하라는 대로 하십시오. 그건 현실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이쯤에서 브릿G의 시인들이 쓴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
Lure 작가의 <향기가 없이>는 SF를 가미하여 실재(實在)에 대한 고찰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시다. 표류하는 가상과 돌아온 현실은 사실 무척이나 가깝지 않던가.
2.
치노르 작가의 <이 별의 호흡법>은 차이로 인한 고독함을 괴리감 가득한 별을 통해 말하는 시다. ‘이 별’ 속의 띄어쓰기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독자에게 큰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3.
엠피 작가의 <당신이 이 글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는 여러 개의 시를 묶어놓은 글로, 다수와 유일함, 불가항력과 소망, 닿을 수 없는 사랑, 비로소 기다림, 착각 후의 충격, 상처와 회복, 죽음에 대한 초월, 차라리 증오를, 망설임과 후회, 서서히 깨지는 망각에 대해 다룬다.
4.
리튼라이프 작가의 <그리움의 한 조각이>는 축약한 제목을 촥 펴놓은 것처럼 이야기 같은 고백을 듣는 듯한 시다. 가냘프지만 묵묵하여 결코 쓰러지지 않는 하나의 시간을 통해 그리움을 다루고 있다.
5.
여운 작가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는 50편 만들기를 목표로 연재하는 시집이다. 제목 그대로 절제 있는 시를 보여주고 있다. 초록색이 아주 잘 어울린다.
6.
유디트 작가의 <50여개의 마음>은 마찬가지로 50편을 목표로 연재하는 시집이다. 어렵지 않은 스타일로 일상과 가까운 소재와 느낌을 충분하게 전달할 것이다.
사실 이 큐레이션을 큐레이션 게시판에 올리려고 했지만 큐레이션을 올리기 위해선 리뷰 1개 이상을 써야 하는 통한의 조건이 있으므로, 일단 리뷰 하나를 쓰기 전에 이곳 자유게시판에 대신 올려보는 바입니다…… 였는데 조금 전에 큐레이션으로 올려보니 올려지는군요…? 더 보완해서 올리겠습니다. (머쓱)
P.S.
본 글에 소개되지 않은 시인이 있다면 댓글로 소개해주세요. 후에 참고하여 추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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