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예술론
“게임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그러나 놀랍게도 이유는 있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이유가 있기 때문에 행위한다. 지식을 얻기 위해 책을 읽고, 재미를 얻기 위해 게임을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예술 행위에 참여한다. 그것이 감상이든, 창조이든. ‘그냥 한다’는 건 이런 과정을 본능 단위로 생략해버린 상태이다.
예술에 심취한 사람이라면, 본능 단위로 생략된 ‘그냥 하기’에 대해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한번쯤은 왜 자신이 이것을 좋아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누군가는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는 건담이 좋아요. 큰 로봇이 나와서 싸우잖아요.”
내가 이런 대답을 하는 사람들을 하찮게 평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부러운 사람들이다. 자신이 믿는 것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단순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서로 충돌하는 데에서 오는 숭고함을 만끽한다.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어려서부터 예술의 주변부를 걸어왔다. 그것이 사회에서 하찮게 취급되는 판타지 소설이건, 라이트노벨이건, 그와 관련된 사람들과 인터넷상에서 얽히며 이리저리 뒹굴어왔다. 수년이 지나 추리소설도 읽게 되고, 영화도 보게 되고 만화나 드라마까지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예술가가 될 것이라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왔으나, 지금은 반쯤 포기한 상태이다. 막연하게 예술의 찌꺼기만을 주워 먹고 있을 뿐이다.
우울증과 씨름하며 살다 보니 왜 사느냐. 하는 질문과 함께 왜 이 짓거리를 그만두지 못하고 까마귀처럼 예술의 썩은 살을 뜯고 있는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질문을 해결하지 못하면 왜 사느냐에 대한 질문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를 괴롭히던 키워드는 무의미였다. 세상만사가 다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문이었다. 세상 자체가 커다란 로르샤흐 테스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칠해진 데칼코마니에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그것은 물감 덩어리일 뿐인데.
앨런 무어는 그의 역작 <킬링 조크>에서 조커의 입을 빌려 말한다. “이 세상이 캄캄하고 끔찍한 농담이란 사실을 깨달은 순간 멍텅구리 미치광이가 됐다는 거지! 난 다 인정해! 근데 넌 왜 못하는 거야! …(중략)… 이게 농담이 아니면 뭐야?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얻고자 기를 쓰는 것 알고 보면 전부 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개그라는 거지. 넌 그 우스운 면을 왜 몰라보는 거야? 왜 웃질 않느냐고?”
이후의 전개를 볼 때, 앨런 무어는 이런 인간 실존의 문제에 대해 나름의 희망을 품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막혀버렸다. 인간은 그저 존재할 뿐, 그 행위에도, 예술에도 의미가 없지 않은가. 이와 관련한 생각이 들 때마다 혼란에 빠졌다. 세상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런 생각에 영향을 준 건 우울증만이 아니리라, 인터넷에서 보았던 사건사고가 현실을 압도했던 순간이 있었다. 그 일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 있지 않았던가. 세월호, 탄핵, 그 이후는 충분히 인간 실존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할 만한 사건들이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인가? 이는 내가 파먹는 예술의 시체와도 연결된다. 왜 나는 예술이라는 믹서기에서 갈려나오는 찌꺼기를 의미없이 파먹고 있는가. 스스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방향감각에 의존해서만 나아가면서 무슨 의미를 발견하려 하는가.
최근까지는 머릿속이 여러 일로 안개처럼 뿌옇게 되어 있어서 제대로 생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나마 머릿속이 안정을 되찾은 현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늘어놓고 내가 배운 것들을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 나의 예술론을 쓴다.
갓 대학에 입학했던 시절 관심을 가진 것은 북유럽 스릴러였다. 북유럽 스릴러는 북유럽의 복지 사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북유럽 스릴러의 기원인 <마르틴 벡 시리즈>를 쓴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는 경찰 소설의 효시인 <87분서 시리즈>의 형식을 빌리면서 동시에 스웨덴 사회를 문제점을 고발하는 소설을 썼다.
북유럽 스릴러의 작가들은 이런 복지 사회의 이면을 고발하는 것을 즐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스웨덴 범죄소설의 아이콘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등장하는 <밀레니엄 시리즈>이리라. 스웨덴의 네오 나치와 여성혐오를 강하게 고발하는 이 작품은 북유럽 너머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데에 성공했다. 작가인 스티그 라르손은 신문기자로, 여러 차례 고발 기사를 쓰며 암살 위협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그 외에 유명한 작가로는 <쿠르트 발란데르 시리즈>의 헨닝 망켈, <해리 홀레 시리즈>의 요 네스뵈, <에들렌두르 시리즈>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북유럽 국가들의 소설은 사회 고발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범죄 소설이야말로 사회를 고발하는 강력한 수단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런 경향을 사회의 거울로서의 소설, 북유럽 작가들의 리얼리즘적 태도라고 본다.
그들의 리얼리즘과 범죄 고발 소설에 대한 관계를 좀 더 짚어보자. 그들이 범죄의 근원으로 짚어내는 것은 북유럽 자체의 복지 문제이다. 그들은 북유럽의 모순된 복지 제도가 범죄를 양산하며, 복지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개인에게 주목한다. 피해자들은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죽어갈 수 없었던 인물들이다. 특히 북유럽 소설의 피해자들은 강간 살해나 가정폭력으로 인해 사망한 경우가 다수인데, 이러한 사건들은 과거에 묻혀 있다가 작품이 진행되는 현재에서야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북유럽 복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여성과 아이들이 주된 피해자로 등장함으로서 현실적 고발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작가들은 그런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 개인에게 주목한다. 그들은 영국의 신사적 탐정이나 미국의 마초이즘적 탐정과는 달리, 수사관에게 부양해야 할 가족을 제시한다. 그들 가정은 대부분은 주인공의 ‘일‘과 ‘가정’ 사이의 조율 실패로 파탄에 이르러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겪는 섬세함이 다른 지역 범죄 소설과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이런 두 가지 요소가 북유럽 스릴러의 큰 특징이다. 피해자와 수사관. 이 두 축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우리는 적대적인 체제와 마주한 개인을 발견하게 된다. 국가의 복지 체제는 적어도 소설 안에서는 불합리하다. 피해자는 국가 체제의 피해자로서 잔인하게 죽었고, 수사관은 무력하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 앞의 인간은 다시금 ‘무의미성’과 마주한 인간 실존을 환기시킨다. 적대적인 세계 앞에서 인간은 무엇인가.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었음을 깨달은 건 며칠도 되지 않았다. 나는 인간을 보고 싶은 것이었다. 무의미성 앞에서 인간은 모두 어떻게 살아가는가?
나는 히어로 만화를 즐겨 보는 편인데, 그 중에서도 내 입문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맷 프랙션과 데이비드 아하의 <호크아이>였다. 활을 잘 쏘는 정도의 능력만 가진 호크아이는 일상의 어벤저로 활약하며 빌라 주민들과의 삶을 즐긴다. 쉴드 요원으로서의 임무도 맡지만 실수연발. 하지만 그의 일상은 유쾌하다. 나는 <호크아이>를 재밌게 봤으며, 자신 있게 권할 수 있다.
주로 내가 좋아하는 히어로들은 스트리트 히어로로 불린다.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퍼니셔>, 그리고 <나이트윙>, <할리퀸> 등. 이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도시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동시에 정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삶은 각기 다르다. 스파이더맨은 –작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히어로 일을 위해 가난을 무릅쓰는 청년이고, 데어데블은 변호사와 자경단 사이에 선 눈먼 집행자이다. 퍼니셔는 큰 비극을 겪고 미쳐버린 인간이고, 나이트윙은 배트맨의 아들이나 다름없는 인간이다. 할리퀸은 조커와 관련하여 PTSD를 겪는 빌런과 히어로 사이의 여성이다.
<엑스맨> 시리즈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 이들은 돌연변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점을 포기하고 인간이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인간을 지향한다기 보다는, 주체가 되고자 한다고 표현해야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만화 이야기가 너무 길었으니 그만두자. 범죄 장르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고, 스파이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다. 이 부분에서 놀랄 수도 있겠는데, 흔히 스파이 소설은 거대담론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스파이 소설은 개인과 체제 사이의 대결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이 다수이지만, ‘콘돌에서의 3일’이나 ‘마라톤 맨’,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등은 적대적 체제 사이를 헤매는 개인을 잘 보여주지 않던가.
이처럼 히어로 장르, 추리, 스파이 등은 거대한 무의미성에 맞서는 인간상을 하나하나 보여준다. 그것은 아슬아슬할 수도, 광기로 치달을 수도, 유쾌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이 좋다. 인간 자체가 무의미성을 어떻게 참아가는가, 스스로를 어떻게 합리화하는가 그것이 보고 싶다.
좋아하는 작품 늘어놓기가 끝났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정말로 예술 속에서 인간 실존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어느 정도야 가능하겠지만, 대중 예술에서 완전한 인간 실존을 찾을 수 있는가?
대중 예술은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역할을 한다. 대중 예술을 만드는 것이 점차 쉬워지고, DIY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정작 창작을 하는 이들은 지식인 계층, 부르주아 계층이다. 대중 예술에서 인간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정작 우리는 지식인이나 부르주아 계층이 생각할 법한 인간상만 보는 것이 아닌가?
가령, 이 문제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으로는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가 있다. 나는 이 작품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데, 이 작품이 전적으로 중산층 부르주아지의 시각에서 ‘가난하지만 자신만의 삶을 사는’ 사회적 하층민의 신화적 코드를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공녀>의 중산층들은 모두 각자의 고민들, 시부모의 문제나 이혼 문제, 결혼 문제 등 고난을 겪으며 극빈층인 ‘미소‘의 삶을 낙원화한다. 여기에서 가난은 여유로움, 혹은 꿈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이는 실제 가난의 현실을 은폐한다.
트위터에서 <소공녀>에 대한 비난 –내 SNS 친구들은 많이 특이한 편이다.-을 본 터라 <소공녀>에 대한 거부감을 미리 가진 상태로 작품을 본 것도 있지만, 나는 이 작품이 평단에서 오히려 호평을 받은 것에 대해 강하게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 작품을 두고 합평회까지 했는데, –정확하게는 <죄 많은 소녀>의 합평회였으나, 그 작품을 개인적 트라우마 때문에 볼 수 없어 양해를 구하고 <소공녀>를 보았다.- 누구도 그 점을 문제삼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 합평회를 당장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가 감상문을 잘못 쓴 까닭이 더 크겠지마는.
<스파이더맨 : 홈커밍>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히어로 영화이다. 이 작품은 스파이더맨의 계급적 특성을 모두 제거했고, 하층 계급의 노동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탄압받는 과정을 그리는 비극을 그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스파이더맨은 토니 스타크의 앞잡이일 뿐이다.
그 밖에 봉준호의 <기생충>에 대해서도 개인적으로는 부르주아의 하층 계급의 공격성에 대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과연 우리는 예술에서 인간 군상을 오롯이 발견할 수 있는가? 특히, 계급적 하층민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열에 아홉은 없다고 할 것이다. 사실 동의하는 바이다. 수학의 ‘극한’ 개념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노동 계급이 창작자가 되는 순간은 굉장히 ‘애매하다.’ 그들은 창작이라는 노동을 함과 동시에 창작을 함으로서 노동 계급에게 이데올로기를 전파한다. 동네 술집에서 연주하던 펑크 밴드가 대성공해서 전국 라이브 투어를 한다면 그 펑크 밴드는 노동계급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나? 오히려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을 쓰기는 싫었다. 그러나 쓸 수밖에 없다.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창작자만이 아니라, 수용자들도 포함된다. 그리고 그 독자들 하나하나가 개인적인 사상을 가진 주체들이다. 누군가는 컴퓨터 코드를 짜는 프로그래머이며, 누군가는 조건만남으로 하루를 버티면서도 예술을 향유하려 노력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공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인력소를 드나들면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지 예술에 대응하는 예술의 언더그라운드를 이룬다. 나는 이 주체들이 예술을 응시하는 한, 예술에서 언젠가는 사회 하층이 생각하는 인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사회 하층은 예술에 대하여 수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중세를 볼 때 장인과 도제 간의 격차가 줄어들면서 여가 시간이 늘어났고, 그로 인해 노동 계층이 예술을 향유한 전례가 있다.
언더그라운드는 특정 ‘대중예술’을 지지하기보다는 ‘삶 자체’를 예술화한다. 가령 술집의 종업원은 술집에서 일하며 술이 삶에 주는 여파를 익힌다. 어떤 이는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는 것을 예술로 치환한다. 이들은 예술의 범위를 부르주아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힌다. 즉, 언더그라운드의 예술 향유가 곧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언더그라운드의 예술화된 삶은 다시 역으로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친다. 대표적인 예로는 흑당 버블티 붐이나 마라탕 붐이 있을 것이다.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에는 한때 인기를 끌었다가 사라진 대만 카스테라가 언급된다. 대만 카스테라는 작품에서 기우 가족이 극빈층으로 떨어지게 된 계기로 언급되는 나름의 위치가 있는 장치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이러한 붐은 일시적이고, 소비지향적이다. 또한 이것이 반드시 성립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시각은 나로서는 낙관적이다. 이렇게 삶 자체가 예술이 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하층이 무의미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그 모습이 반영된 인간이 예술에 등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실 이런 예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다. 1930년대 갱스터 영화. 그 중 특히 <스카페이스>가 그러하다. 아메리칸 드림의 거짓을 까발리는 이 영화는 당대 하층민의 발악을 담고 있다. 그 외에 근래의 ‘미도리노 루페’ 등의 작가나 ‘잘자 뿡뿡‘ 등이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아쉽게도 작품을 보지는 못했다.
나는 실존 앞의 인간상을 계급에 관계없이 꾸준히 탐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무의미 앞에 선 인간이 보고 싶다. 그들이 무의미 앞에서 발버둥 치면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지, 그것 자체에 의문을 품고 지켜보고 싶다.
그러면서 탐구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의미 앞에서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