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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밤 후기

분류: 수다, 글쓴이: BornWriter, 19년 4월, 댓글8, 읽음: 264

0.

시험 기간인데 시험 공부하기가 싫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이란 노동하기를 좋아하는 노동자만큼 괴상한 존재일 것 같습니다.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학생을 주변에서 보신다면, 우주적 존재이므로 서둘러 그 자리에서 도망치시기 바랍니다.

 

1.

저를 오래 보신 분이라면 아실 일인데요. 저는 기억력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좋지 않습니다. 아니, 쓸데없는 것은 오래 기억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가령 교수님의 말씀은 싹 까먹지만, 1년하고도 절반 쯤 전에 있었던 ‘만남의 밤’의 기억은 어제처럼 선명하거든요.

 

2.

저는 그 날 제정신이 아니었을 겁니다. 야간 알바를 끝내고 몇 시간 못 잤거든요. 평소에는 커피를 절대 마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정말 깨어있기가 힘들 정도라서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어요. 그리고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읽었습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학기마다 책 사서 읽으라고 3만 얼마의 돈을 줍니다. 그걸 쓰는 학생은 별로 없는데, 사서 읽을 수 있는 책의 범위가 너무 좁거든요. 저는 설국이 없었고 읽어보고 싶었기에 다른 몇 권의 책과 함께 구입했습니다. 그리곤 얇고 무겁지 않아 경기도민의 서울 상경에 함께할 수 있었던 거죠. 그래서, 저는 설국을 읽고 있었습니다.

 

3.

제가 있던 카페는 만남의 밤 회장(?) 바로 앞에 있던 카페였습니다. 그리고 그 카페로 딱 봐도 ‘브릿G’의 일로 온 사람이다 싶은 분들이 몇 계셨고요. 그 전에도 다양한 번개 등으로 얼굴이 익은 분도 있었고, 누군지 전혀 모르겠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글쟁이로다 싶은 분들도 계셨습니다.

제 대각선 쪽으로 아주 어린 분이 앉으시더군요. 그 분은 노트북인가 태블릿PC인가로 뭔가를 뚝딱뚝딱 적어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책을 읽으러 카페에 온 사람처럼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만, 귀는 열려있었습니다. 이윽고 천가을 님이 오셔서 제 앞에 앉으셨고, 두 분의 이야기를 통해 대각선 쪽에 앉아계시던 분이 반도 님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때쯤부터 피로와 카페인이 파이날 퓨전을 일으켜서 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렸습니다.

 

4.

기억이 맞다면, 저는 만남의 밤 회장에 5번째로 들어왔습니다. 입장 큐에 서서 앞뒤로 아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제 이름(정확히는 닉네임)이 적힌 명찰을 후드 집업의 지퍼에다가 달았습니다. 그리고는 너무 앞도 너무 뒤도 아닌 곳에 앉았습니다. 사실은 치킨이 가까운 자리에 앉고 싶었을 뿐입니다.

 

5.

아는 분들이 많이 계셨고, 모르는 분들은 그보다 더 많았습니다. 저는 얼굴을 아는 분들과 돌아다니며 인사를 나누었고, 닉네임으로만 기억하는 분들과 통성명을 했으며, 전혀 모르는 분들과는 말을 제대로 섞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참 아쉽네요. 모두에게 말을 걸어보는 편이 좋았을 텐데.

 

6.

노랑통닭은 맛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술까지 들어가서 피로와 카페인과 알코올의 삼중결합으로 너무 하이한 상태였고요. 노말씨티 님이 가져오신 성심당의 빵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먹은 기억이 절반 이상이네요. 기억하기로는 노말씨티님이 가져와주신 빵이 제 인생 첫 성심당이었을 겁니다. 소보루 튀긴 게 그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리고 이때쯤에 리체르카 님에게 뭔가 큰 실례를 범한 거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러네요.

도중에 주희연님께서 제게 싸인을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제가 왜…, 하는 마음이었어요. 지금도 그때도 저는 제가 누구에게 싸인을 할 위인이 못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심지어 딱히 싸인이랄 만한 것도 없어요 저는. 이 때의 충격으로 저는 필기체를 연습했고, 지금은 멋들어진 필기체로 필명과 이름을 적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씁니다. 고마워요 주희연님!

 

7.

맥주에 리미트가 있다는 걸 알아서 좀 실망했습니다. 그게 왜 실망할 거리가 되는 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머리가 멈춰서 이힣힣 맥쥬맥쥬 했나봅니다. 그래서 저는 최대한 천천히 마시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에 증명된 사실 오디오북이 시작되었지만 사실 제 관심은 그것보다는 다른 분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쪽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열심히 녹음하신 성우분들께 죄송하네요.

 

8.

오디오북이 끝나고 이런저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 최고는 역시 이영도의 귀환이었습니다. 저는 리뷰에서도 밝혔듯, 18년을 오버더초이스의 해로 기억할 듯 합니다. 아이라비님이 이영도의 장편 귀환을 소개할 때, 거기 모인 사람들 전부가 목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목소리로 환호성을 지른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어땠으려나요? 아마 저도 신나게 소리쳤던 거 같은데…

 

9.

저는, 아니, 저희 가문은 대대로 당첨운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경품 추첨을 즐길 수 있었어요. 역시 제 예상대로 저를 빗겨나가더군요 후후후. 상패 수여식은 제가 예상한 분들이 다 받아가셨어요. 받을 만한 분들이 받아갔다고 해야 할까요. 그 당시에 그 부문으로 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딱 그 세 분 밖에 없었거든요.

 

10.

거기 계셨던 스텦(=직원)분들께서 너무 피로해보였습니다. 저는 화학물질의 이상한 상호작용으로 피로를 잊은 상태였지만, 직원분들은 평소의 로동 때문에 꾸준히 누적된 피로였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고보니 영국쥐 님이셨던가요. 그 분만은 유독 쌩쌩하셔서 기억에 남네요. 뭔가 엄청 파워풀한 이미지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사실과 다르다면 죄송합니다(?)

 

11.

공식적인 모임이 끝나고 마음 맞고 시간 괜찮은 사람들끼리 치킨을 더 먹으러 갔습니다. 사실은 술을 더 먹으러 간 거였죠. 저는 모옵시 술이 고팠기에 따라갔습니다. 사실 이야기를 나누는 게 굉장히 즐겁기도 했고요. 그날 후안님이 몇 년간 손 놓았다가 결국 소설로 다시 돌아온 이야기도 들었고, 그 위스키의 이름이 글랜피디치가 아니라 글랜피딕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제가 앉은 자리에는 미성년자가 몇 있어서 이동식 음주를 해야 했습니다(법이 그렇다네요).

 

12.

제 바로 앞에 선작21님이었고, 반도님 [ 기억나지 않는 어떤 분 ] 쎄씨님 천가을님 그리고 저 여섯명이 앉았던 거 같아요. 유독 나이대가 젊은 테이블이라서 더 즐거웠습니다. 물론 나이대가 높은 테이블이라고 해서 덜 즐거웠을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겠지만요.

 

 

그 날의 기억이 정말 즐거워서, 작년에도 만남의 밤을 기대하기는 했습니다. 없어서 아쉬웠고요.

그런데 도대체 브릿G옆에 Beta 딱지는 언제 떼지는 건가요. 작년 2월에 떼지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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