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참치 님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제목이 거창해서 죄송합니다.
최참치 님께서 켄 리우의 단편집 <종이 동물원>이 재밌어 보이신다는 글을 남겨 주셨기에,
본격 홍보글을 한번 시전해도 되겠냐는 댓글을 달았다가
이렇게 정말로 뻔뻔하게 홍보하러 온 사람입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문장들을 받아 적었나 모르겠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켄 리우라는 사람이 더 궁금해졌고, 이미 좋아하게 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네뷸러 상과 휴고 상 및 세계환상문학상의 단편 부문 최우수상을
모조리 석권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의 주인공.
세가지 상 가운데 가장 역사가 짧은 세계환상문학상이
처음으로 제정된 1975년 이후 40년 만에 첫 3관왕 기록.
전 세계 SF 판타지 독자들을 단숨에 매료시킨 단편 소설이자
표제작인 <종이 동물원>의 작가,
당시 서른 여섯 살의 오래된 신예, 켄 리우를 말입니다.
화려한 수상 내역으로 일거에 세계 SF 판타지 문학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된 켄 리우.
1976년 중국 서북부의 간쑤성 란저우시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 중국계 미국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중국어판으로 읽고 SF의 매력에 눈을 뜬 이후
단편의 제왕 레이 브래드버리에 버금가는 단편 습작을 끝없이 해왔던 작가.
켄 리우는 이 작품집에 수록된 동북아시아의 현대사를 다룬 단편들 때문에
같은 중국계 독자들로부터 혹평을 받기도 했고,
중국판에서는 공산당을 비판하는 문장과 단어를 삭제한 채 불완전하게 출간되거나,
심지어 일본에서는 일본의 역사를 정면으로 다룬 단편을 아예 누락한 채 출간되는 일도 겪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고 ‘역사’와 ‘이야기’라는 키워드에
진심으로 감응하고자 하는 켄 리우.
미국에서 유색 인종 작가의 작품들은 오로지 자전적 고백일 때에만 가치 있는 것으로 대접받기에
그런 분위기를 거스르고 싶어서 자신이 물려받은 중국 문화와 관련된 것은 무조건 피하려고 했다던 그는,
피할 수 없는 것을 피하고자 했던 과거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건 입의 절반이 테이프로 막힌 채 말하는 것,
몸의 절반이 마비된 채 춤추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켄 리우의 대표적인 단편 선집 <종이 동물원>에는
일상과 환상, 역사와 기억이 만나는 지점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는 작품들이 담겨 있습니다.
표제작 단편 <종이 동물원>을 비롯해 SF에서부터 환상문학, 하드보일드,
대체 역사, 전기(傳奇)소설에 이르기까지.
켄 리우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집으로
일본 731부대, 대만 228사건, 조선인 위안부 문제, 아편전쟁 이후 홍콩,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대기근 등
동북아시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사건들을 녹여 냅니다.
자, 그럼 본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 몇 개만 간단히 추려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종이 동물원
앞서 소개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수상 이력을 지닌 단편이자, 이 작품집을 대변하는 표제작입니다.
어린시절, 선물 포장지를 사용해 종이 동물을 만들고 생명을 불어넣어 주던
중국인 어머니와 그 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짧지만 가슴 찡한 감동이
독자의 마음을 타격하는 작품입니다.
“내가 ‘사랑(love)’이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켰다.
“하지만 ‘아이[愛]’라고 말하면, 여기서 느껴요.”
엄마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종이 동물원> 중에서
켄 리우는 딸의 출생과 함께 부모 되기에 관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로서 ‘아이가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를 이해할 것인가’ 하는 불안이 들었고,
부모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에게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낄 것 같다고,
그 또한 <종이 동물원>의 주제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입지전적인 이 단편의 자세한 줄거리는
‘책끝을 접다’ 카드뉴스로 제작되어 좀 더 다채롭게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책끝을 접다의 시선으로 함께 살펴봐 주세요.
파자점술사
“우리 할아버지는 사람 이름의 한자랑 그 사람이 고르는 한자를 가지고 운세를 점쳐 줘.”
미국인 소녀와 중국인 점술가의 우정을 통해 타이완 현대사를 그린 판타지 단편입니다.
작중 주요 소재인 ‘파자점’은 주로 한자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뜻을 조합하거나 획수를 따져 사람의 명운을 점치는 점술로서,
중국에서는 처즈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지난 세기 중국과 타이완의 역사를 고스란히 체험한 중국인 노인이
미국인 소녀에게 복잡한 영어 단어로 파자점을 쳐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만의 역사적 비극 228사건과 연계된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이 다시 한 번 눈시울을 붉힙니다.
재작년 대만 타이베이에 갔을 때 228기념관을 들러 그 끔찍한 참상을 접하게 된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희생자가 구체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라는 점에서
제주의 43사건과 무척 닮아 있었습니다.
“그 학살의 와중에 새로운 마법이 태어났네.
이제 아무도 228 학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게 된 거야.
228이라는 숫자는 금기가 되고 말았네.” ―본문 중에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 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저희가 있는 이곳은 하얼빈시 근교에 위치한 핑팡 지구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대부분 핑팡이라는 지명을 무심히 듣고 넘기겠지만,
어떤 이들은 핑팡을 아시아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전쟁 기간 동안 일본 제국 육군 제731부대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인체 내구력의 한계를 조사하는 연구의 일환으로,
수많은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에게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기 때문입니다.” ―본문 중에서
물리학자가 발명한 기술을 통해 과거를 직접 볼 수 있게 된 미래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 여러 나라의 ‘역사 갈등’을 정면으로 다루는 중편 소설입니다.
‘현재의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대담한 가정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형식을 빌려 각국 정부 관계자 및 학자,
731부대 희생자 유족 등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진행되는데,
켄 리우는 이 형식을 테드 창의 소설을 읽고 창안했다고 합니다.
작가는 이 중편을 두고 ‘스스로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하는 이야기’라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다지만
켄 리우는 이 단편 때문에 일본과 중국에서 불완전한 단편집을 출간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러니한 점은,
단지 지어낸 이야기로만 끝날 수도 있었던 이 중편소설의 내용이
동북아시아 각국의 출판 행태를 통해 현실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일본의 경우를 보면, 2015년과 2017년에 켄 리우의 일본어판 단편집 2종이 출판되었다.
이로써 모두 31편의 중단편이 번역 출간되었지만
그중에 작가가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이 중편은 빠져 있다.
다음으로 중국의 경우를 보면 간체자 중국어판 단편집 4종을 통해
무려 50편이 넘는 중단편이 출간되었으며, 그중에는 이 중편 또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출판된 간체자 중국어판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곳곳이 삭제된 불완전한 판본이다.
삭제된 부분은 마오쩌둥 주석, 대약진 운동, 3년 대기근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
즉 중국 공산당에 비판적인 내용이 나오는 곳들이다.
이로써 동북아시아 4개국 가운데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을 완전한 형태로 출판한 나라는
(중국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타이완, 그리고 한국이다.
역사 갈등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현실에서 기묘한 생명력을 얻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장성주, <종이 동물원> 해설 중에서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문장입니다.
“진실은 연약하지 않고, 누가 부정한다고 해서 훼손되지도 않습니다.
진실은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숨을 거둡니다.” ―본문 중에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세 작품을 임의로 뽑아 보았지만
각종 논문과 연구를 기반으로 한 SF 단편들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너무 사족이 길었는데요,
켄 리우의 서문 중 일부를 인용하며 이만 소개를 마치고자 합니다.
사유가 문명의 미로를 지나 당신의 정신에 닿는 기나긴 여정에서
번역을 거치며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나는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리라 믿고,
당신은 당신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우리 정신은 어떻게든 서로에게 닿는다.
비록 짧고 불완전할지라도.
사유는 우주를 조금 더 친절하게, 좀 더 밝게,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그런 기적을 바라며 산다.
-켄 리우, <종이 동물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