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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 여름] 먼지처럼 분산되어 있는 익명의 적들, 그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

분류: 책, 글쓴이: 구름사탕, 18년 8월, 읽음: 77

-먼지처럼 분산되어 있는 익명의 적들, 그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우리-

김유진, 「여름」

 

 

Y는 시종일관 두려워한다. Y는 “줄곧 뒤꿈치를 들고 서 있었다.” “Y는 바닥에 온전히 맨발을 내려놓는 법이 없었다.” Y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먼지는 B의 작업장으로부터 날아들었다. B는 도면대로 자른 합판이나 콘크리트의 표면을 사 포기로 일일이 다듬었다. 차고로 쓰이던 작업장은 문이 없었다. 떨어진 톱밥들은 주변의 꽃나 무와 입구에 깔린 자갈 위에 머물렀으나, 입자가 밀가루만큼이나 고운 시멘트가루들은 바람을 타고 집 안으로 이동했다. 창틀, 거실 바닥, 탁자 위, 탁자와 의자 사이, 부엌 선반, 조리대 구 석의 커피머신, 커피 찌꺼기를 모아놓은 유리병 위에 앉았다. 면을 가진 모든 것들 위에, 먼지 는 있었다. 먼지는 살아있는 듯 끊임없이 태어나고 이동했다. 번식했다.

 

Y의 집은 밀가루보다도 작은 먼지들로 가득하다. “먼지는 살아있는 듯 끊임없이 태어나고 이동했다. 번식했다.” 먼지는 부엌의 그릇 안쪽까지 스며들고, Y는 하루에 두 차례, 집 안의 모든 세간을 닦아낸다. 집 안에 분산되어있는 먼지들. 보이지 않는 먼지들. B는 감지하지 않지만, Y는 끊임없이 의식하고 있는 먼지들. 이 먼지들이 현시대의 적의 양상이다.

현시대의 적. 현시대에는 더 이상 거대한 하나의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독재정치에 맞서 싸우고, 하나의 거대담론을 공유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 거대담론과 하나의 방향성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들은 우리의 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적이 너무 많고, 불규칙적으로 산재하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존재하는 다수의, 익명의 적들. 먼지 같은 적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는 어느 것도 미워하지 못하고, 두려움만을 갖게 된다. 무력하고, 그저 두려워하는 인간. 그것이 우리들의 위치다.

이 시대에서는 성공과 극복의 서사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않는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개인적으로 적이 너무 많기 때문에, 수많은 적들 중 하나를 없앤다할지라도 그것이 도무지 성공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다. 그 행위는 성공이 아니라, 대기의 먼지 중 단 하나의 먼지를 일시적으로 닦아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거지를 마친 Y가 수챗구멍의 거름망 덮개를 열었을 때, 그곳에서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 왔다. 두 개의 긴 더듬이와 여러 개의 마디, 무수한 다리를 가진 벌레는 어른 검지만한 길이였 고, 제법 부피감이 있었다. 벌레는 최대한 바닥 가까이 몸을 밀착시키고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살아 있음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았다. 세제 거품이 묻은 등껍질이 반질거렸다. 벌레는 독 충이 아니었고 날개를 가진 것도 아니었으나, Y는 그 생김새에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듯했다.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하던 Y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한 발 한 발 개수대로부터 물러났다. 〔……〕

Y는 침실로 향했다. 슬리퍼를 벗고 양말을 꺼내 신었다.

 

Y는 초반에 수챗구멍 안에서 벌레를 발견한다. 벌레는 등에 세제 거품을 묻히고 바닥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 Y는 벌레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한 발 한 발 개수대로부터 물러난 Y가 취한 조치는 “슬리퍼를 벗고 양말을 꺼내 신”는 것이다. 한없이 수비적이다. Y는 이 일 이후, 벌레가 집 어딘가에 매복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언제나 발뒤꿈치를 들고 다닌다.

김유진은 소설 내내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기 중의 먼지와 집 안 어딘가에 매복된 벌레에 온 신경을 기울이는 것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 안에는 그것밖에 없다. 매복되고 분산된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서사와 개연성을 거부한다. B가 종반에 피를 내뱉는 것의 원인으로 소설 전반적으로 강조되는 먼지들이 있고, Y가 두려워하는 벌레의 전조로 Y가 과거에 바닷가에서 체험했던 수많은 벌레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으로 요약될 수 없다. 고통과 두려움은 근본적으로 피어나고, 느닷없이 찾아온다. 우리는 그것을 예측할 수 없다. B가 종반부에 피를 내뱉을 때도 우리는 그것이 너무 느닷없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미 소설 전체에서 그들은 충분히 괴로워했고, 일상의 모든 것들이 그들을 두렵게 하였으므로 B는 입 주변과 앞가슴에 피칠갑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 사건이 거의 없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어느 행동에 원인이 되는 사건을 삽입하게 되면, 독자의 시선은 그 사건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그 행동은 사건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의 시선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작가는 사람은 특별한 사건 없이도 충분히 괴롭고, 두렵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실현해냈다. Y가 바로 그렇다. Y는 큰 사건 없이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Y의 태도는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삶은 너무 두렵다.

이와 같은 전략은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이 영화는 약 1시간 가량을 저스틴의 기이한 행각을 포착하는 데에 사용한다. 결혼식 날, 그녀는 시종일관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데, 그것에 대한 이유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두려워서 두려워한다. 이는 그녀의 대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구는 사악해. 우리가 그를 위해 슬퍼할 필요가 없어.The earth is evil. We don’t need to grieve for it.” 앞서 말했듯. 분산되고 산재된 먼지 같은 재앙들을 하나의 사건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 이제 이 세상은 사악, 그 자체이다. 우리는 재앙의 원인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움을 포착하는 것뿐이다. 『멜랑콜리아』의 1부와 이 소설은 그것을 기민하게 해낸다.

 

(i) Y는 어두운 거실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어둠을 응시하는 것은 Y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 해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Y는 사물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어둠을 자세히 들여다보 고 또 보아, 결국 스스로 아무것도 구별할 수도 감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했다.

(ii) Y는 이 년 전 B와 함께 남해로 여행을 갔었다. B가 부두에서 바다낚싯배를 빌리기 위해 선주와 흥정을 벌이는 동안, Y는 방파제에 자리를 잡고는 문고판 소설을 읽고 있었다. Y는 생 경한 바다와 책을 번갈아가며 보느라 책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때 갑자기 발등 위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Y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방파제와 먼 바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던 것들, 홍합이나 조개일 것이라 짐작했던 것들은 사실 모두 벌레였다. 벌레는 소금물도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다가 그들의 서식지였기 때문이었다. 벌레들은 바다에서부터 방파제로 무리지어 이동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거침이 없었다. 〔……〕

Y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능한 한 큰 목소리로 B를 불렀다. 이제껏 누군가를 그렇게 애타게 불러본 적은 없었다. Y는 울먹이며 B를 불렀으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Y는 눈을 감았다.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바다 벌레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Y는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크고 작은 소리, 파도, 바람, 자신의 숨소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B와 선주간의 대화를 분리하고 제외해나갔다. 이윽고 연필의 서걱거림 같은 벌레 소리만이 남았다. 서서히 사라져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Y는 비로소 고요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이런 두려운 세상에서 Y가 거의 유일하게 믿는 것은 어둠과 침묵이다. 위 두 사례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Y가 안도할 때는 자신의 완전한 무력함을 인지할 때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완전한 포기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낄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다. 그를 위해, Y는 기꺼이 장님이 되고, 귀머거리가 된다. 위의 (i)에서 어둠을 응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Y는 완전한 무지를 원한다.

(ii)의 경우는 더 흥미롭다. (ii)는 Y가 무지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세밀하고 실감나게 묘사한다. 자신을 둘러싼 벌레들을 발견했을 때, “Y는 눈을 감았다.” 일단 어둠을 택했다. 그리고 소리에 집중했다. 자신을 둘러싼 소리 중, 자신의 적, 벌레의 소리를 제외한 모든 소리를 제외했다. “이윽고 연필의 서걱거림 같은 벌레 소리만이 남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Y는 적을 감지해낸 것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벌레 소리마저 “서서히 사라져갔다.” “Y는 고요 한가운데에서 눈을 떴다.” Y는 소리와 빛이 있는 곳에서조차, 스스로 자신의 감각들을 부정했다. 그 과정에서 적의 형태를 잠깐 인식했으나, 그마저도 인지하기를 거부했다. 그렇게 Y는 장님이 됐다. 보지 못하고, 두려워할 줄만 아는 인간.

이 소설은 우리들의 미래를 예견한다. 우리들은 먼지 속에서 살고 있다. 숨을 쉬다가 예고 없이 피를 뱉을 것이고, 발밑에는 벌레가 으깨질 것이다. 우리는 움직일 수 없다. 극복할 수 없다. 성공할 수 없다. 적을 발견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두려워하다가, 자신의 전 감각을 거세하고 도망가는 것밖에 없다. 처참히 붕괴된 현재와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미래.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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