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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소설은 좋습니다. 하지만 ‘재미’가 뭘까요?

분류: 책, 글쓴이: OneTiger, 18년 8월, 댓글3, 읽음: 155

이 세상에는 다양한 평론가들이 있습니다. 당연히 이 세상에는 다양한 평론 방법들이 있어요. 소설을 읽을 때, 독자는 그런 다양한 평론 방법들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작가에게, 등장인물에게, 작가가 글을 썼던 시대 배경에게, 주제나 철학이나 사상에게, 소설 형식에게, 해당 소설을 가장 많이 읽는 독자층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여러 방법들을 동원할 때마다, 소설을 읽는 느낌은 달라질 겁니다. 무엇이 옳은 방법일까요?

사실 정답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소설에 따라 어울리는 서로 다른 방법들이 존재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무슨 소설에 무슨 방법이 어울릴까요? 등장인물들이 개성적으로 등장하는 소설에서 독자가 사상을 파악해도 될까요? 독자가 작가와 소설을 똑같이 취급해야 할까요? 아니면 작가와 소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낼까요? 작가가 사상을 강조한다면, 독자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소설을 자주 읽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좋은 평론 방법이 무엇일지 짐작할 겁니다. 독서 경험을 많이 쌓는다면, 다들 그런 시각을 갖출 수 있을지 몰라요. 그렇다고 해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독자는 무엇이 좋은 방법인지 계속 고민해야 하겠죠.

 

누군가는 재미가 전부라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재미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재미 때문이겠죠. 하지만 재미가 뭘까요? 보편적인 재미가 존재하나요? 어떤 독자는 신나고 빠른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독자는 진중하고 묵직한 소설이 재미있다고 말하겠죠. 어떤 독자는 일상적인 반복을 중시할 테고, 어떤 독자는 비일상적인 모험을 중시하겠죠. 어떤 소설은 아주 짜릿한 1회성 재미를 줄 테고, 어떤 소설은 모호하나 묵직한 재미를 계속 풍길지 모릅니다. 심지어 독자들이 느끼는 재미는 누군가가 허용한 재미일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욕망이 자신에게서 비롯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르주 바타유 같은 철학자는 그게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지배 계급이 뭔가를 금지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욕망합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욕망은 금기에서 비롯했어요. 사람들은 자신이 아니라 지배 계급이 만든 체계에서 욕망을 끄집어냅니다. 이런 논리를 재미에 적용할 수 있겠죠. 사람들이 뭔가에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지배 계급이 그걸 허용하거나 만들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왜 숱한 남자들이 야한 소설의 성 추행 장면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겠어요.

 

숱한 남자들은 남자에게 특별히 강렬한 성적 욕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대중적인 착각에 불과해요. 가부장적 구조가 그런 착각과 왜곡을 널리 퍼뜨리기 때문에 숱한 남자들은 그런 왜곡이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런 왜곡을 이용해 이야기를 쓴다면, 숱한 남자들은 그게 재미있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숱한 남자들은 아무 이유 없이 메갈리아를 그렇게 헐뜯고, 게거품을 물고, 두 눈을 까뒤집을 겁니다. 다른 감성들이나 사고 방식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숱한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나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공산주의를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저는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현실 사회주의보다 평화롭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자본주의가 기후 변화 같은 행성 규모의 환경 재앙을 불렀음에도, 사람들은 고작 현실 사회주의가 폭력적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들이 공산주의를 비난하는 이유는 그저 지배 계급이 그렇게 세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앵무새처럼 녹음기처럼, 그들은 지배 계급이 세뇌한 내용을 모방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독자가 오롯하게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요? 우리가 느끼는 재미는 지배 계급이 불어넣은 관념일지 모르죠. 한때 남한에서는 개돼지라는 표현이 유행했습니다. 우리가 뭔가를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개돼지이기 때문일지 몰라요.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북아메리카 부족민과 유럽 침략자가 서로 만났을 때, 부족민은 수많은 생명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부족민은 그런 개념이 감동적이라고 느꼈어요. 하지만 유럽 사람은 그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감동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환경을 착취하고 싶어하고, 유럽 사람은 오직 그런 시각으로 자연 환경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에 유럽 사람은 부족민이 말하는 감동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런 사례는 꽤나 유명하고, 가치관이 절대 보편적이지 않음을 증명하죠. 우리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을 읽고 만화를 보고 영화를 볼 때, 저는 그런 점을 의식하느라 애씁니다. “내가 정말 재미를 제대로 느끼는가? 누군가가 내게 재미를 주입하지 않는가? 고정 관념 때문에 내가 재미를 느끼지 않는가?” 지배적인 관념은 사람들을 세뇌하고, 따라서 재미 역시 세뇌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를 비평할 때, 저는 창작물 안에 머무르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창작물 밖으로 튀어나오고, 지배 계급과 사회 구조를 비평에 연결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는 너무 피곤한 태도일지 모릅니다.

 

소설이나 만화나 영화를 비평할 때, 수많은 사람들은 창작물 안에 머무릅니다. 그들은 창작물을 그대로 비평합니다. 설사 창작물 밖으로 잠시 고개를 내민다고 해도, 그들은 그저 (지배 계급이 허용한) 상식을 주워섬길 뿐입니다. 이런 비평이 좋은 비평일까요? 소설 속에서 독자가 소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게 좋은 비평일까요? 소설을 비평할 때, 독자는 작가와 소설에게 거리를 두고, 무엇이 작가와 소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그때 마침내 독자는 소설을 제대로 비평할 수 있겠죠. 저는 이런 비평이 좋은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SF 소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SF 소설을 비평할 때, 저는 저런 방법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SF 소설을 비평할 때, 독자는 SF 소설에게 거리를 두고, 무엇이 SF 소설에게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SF 소설은 세상을 뒤집습니다. SF 소설은 인류 문명을 떠나고 낯선 세계에서 인류 문명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조차 지배 계급에게 영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SF 소설이 세상을 뒤집는다면, 독자 역시 지배적인 관념을 떠나야 할지 모릅니다.

 

물론 저는 독자가 오직 이런 방법으로만 재미를 평가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는 허먼 멜빌이 쓴 <백경>이 미국 문화의 금자탑이라고 추켜세웁니다. 미국 고전 문학들을 꼽을 때, 평론가들은 주저하지 않고 <백경>을 꼽습니다. <백경>은 수많은 후대 작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미국 문학을 자세히 논평하고 싶다면, 평론가들은 <백경>을 빠뜨리지 못할 겁니다. 이런 사례들을 고려한다면, <백경>이 나타났을 때, 독자들은 아주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습니다. 허먼 멜빌이 <백경>을 출간했을 때, 반응은 별로 뜨겁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평론가들은 <백경>이 미치광이 소설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나 악평은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반응조차 호의적이지 않았어요. 허먼 멜빌은 <주홍 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손을 존경했고, <백경>에 호손을 존경한다고 썼습니다. 하지만 나다니엘 호손 역시 <백경>에 냉담했고, 허먼 멜빌은 크게 실망합니다. 이것 때문에 허먼 멜빌은 창작 의욕을 크게 잃어버립니다. 만약 21세기에 허먼 멜빌이 부활한다면, 멜빌은 깜짝 놀랄 겁니다. 멜빌은 자신의 소설이 미국 최고의 소설이라는 상황을 납득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20세기에 평론가들이 <백경>을 재해석 및 재평가했기 때문에 <백경>은 금자탑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경>은 유일무이한 사례가 아닙니다. 소설 창작 세상에서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습니다. 재해석이나 재평가는 흔한 사례입니다. 만약 수많은 출판사들이 어떤 소설을 무시한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런 소설이 엉터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런 엉터리 소설은 퓰리처 수상작이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문전박대를 당하는 만화가가 엉터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엉터리 만화가는 아주 선구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지 모릅니다. 그 만화가가 만든 애니메이션은 길이길이 남는 역사적인 걸작이 될지 모르죠. 아니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숱한 명성들을 쌓은 어떤 소설가들은 잊혀질지 모릅니다. 한때 그들은 빛나는 거성이었으나, 흐르는 세월은 그런 별빛을 가릴지 모르죠.

시대에 따라 창작가들과 창작물들은 재평가를 받습니다. SF 세상에도 이런 사례는 있습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현대 장르 창작계를 주름잡는 작가입니다. 크툴루 신화가 없었다면, 현대 장르 창작계는 굉장히 달라졌을 겁니다. 수많은 후대 창작가들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유산을 따릅니다. 그래서 생전에 러브크래프트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을까요? 아서 코난 도일처럼 러브크래프트가 성공적인 작가가 되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러브크래프트는 가난에 시달리는 빈곤한 작가였어요.

 

만약 어거스트 덜레스 같은 추종자가 재평가하지 않았다면,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그저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해도, 분명히 생전에 러브크래프트는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인기는 고사하고, 러브크래프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 바랐습니다. 문예 비평가 콜린 윌슨은 그런 러브크래프트가 아주 불행한 작가였다고 회고합니다. 흔히 우리는 <블레이드 러너>를 저주 받은 걸작이라고 부릅니다. 개봉 당시, <블레이드 러너>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영화 감독들과 평론가들과 관객들은 <블레이드 러너>가 대단한 걸작이라고 추켜세우나, 개봉 당시, <블레이드 러너>는 그런 호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블레이드 러너>는 <이티>에게 밀려났죠. 이는 존 카펜터가 감독한 <괴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블레이드 러너>와 <괴물>과 <이티>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습니다. 하지만 <이티>는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고, <블레이드 러너>와 <괴물>을 죽을 쒔죠. 나중에 두 영화는 재평가를 받았고, 두 영화 모두 저주 받은 걸작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워드 러브크래프트는 저주 받은 걸작이라는 평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러브크래프트는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재미가 뭘까요? 재미있는 소설이 뭘까요?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 있을까요? 만약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재미있는 소설이 있다면, 왜 하워드 러브크래프트가 가난에 시달려야 했을까요? 만약 오늘날 러브크래프트가 지적 재산권을 받는다면, 수많은 소설들, 애니메이션들, 비디오 게임들에게 엄청난 자금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러브크래프트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생전에 독자들이 러브크래프트를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만약 리들리 스콧이나 존 카펜터나 해리슨 포드나 커트 러셀이 단명했다면, 그들은 <블레이드 러너>나 <괴물>이 재평가를 받는 순간을 지켜볼 수 없었을 겁니다. 만약 그들이 단명했다면, 세상을 뜨는 순간까지, 그들은 <블레이드 러너>나 <괴물>이 실패작이라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저는 어떤 소설이 재미있거나 재미없다고 함부로 단언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대적인 한계에 갇혔을지 모릅니다. 시대적인 한계 속에서 우리는 창작물들을 평가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철학자는 이론이 시대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대 속에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비평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릅니다.

 

저는 소설 창작과 독서에서 재미가 무엇인지 딱히 단정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런 재미는 고정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창작물을 비평할 때, 저는 장점들을 찾느라 애씁니다. 지금 당장 어떤 소설이 혹평을 받는다고 해도, 나중에 그 소설은 재평가를 받을지 모릅니다. 아무도 그걸 장담하지 못합니다. 흠, 이는 헛된 낙관론이나 희망 고문일지 모르나, 어쩌면 여기 브릿G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어떤 소설은 나중에 커다란 재평가를 받을지 모릅니다. 그건 여러분이 쓴 소설일지 모릅니다.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의 비평문을 편집 및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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