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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의 카인즈와 “빼앗긴 자들”의 타크베르

분류: 책, 글쓴이: OneTiger, 18년 7월, 읽음: 62

소설 <듄>은 아카리스 행성을 둘러싼 음모와 전쟁을 이야기합니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에서 행성의 자연 생태계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이고, 따라서 생존하기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수많은 귀족 가문들이 이 행성을 주목하는 이유는 아라키스가 멜란지 스파이스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수명을 연장하거나 예지력을 부여하기 때문에 멜란지 스파이스는 상당히 귀한 물건입니다. 그래서 멜란지 생산을 규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황제와 거대 가문들은 행성을 관리하죠.

이 멜란지라는 물질은 모래벌레에게서 비롯합니다. 좀 거칠게 요약한다면, 멜란지 스파이스는 모래벌레의 배설물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황제와 귀족 가문들이 동물의 배설물에 연연한다는 뜻이죠. 뭐, 현실에서도 향유고래의 토사물(용연향)은 아주 비싼 향수가 되죠. 이게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모래벌레는 스파이스를 생산하는 아주 중요한 동물이나, 동시에 아라키스를 사막 행성으로 만든 주범입니다. 물을 몹시 싫어하기 때문에 유충인 모래송어들은 물을 감싸고 없앱니다. 덕분에 행성 원주민 프레멘들은 아주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느 스페이스 오페라들과 달리, 이처럼 <듄>은 자연 생태계에 주목합니다. 아라키스는 사막 행성이고, 모래벌레들은 사막을 만든 주범이고, 하지만 이 거대한 괴수들은 귀중한 스파이스를 생산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기후를 함부로 바꾸지 못하고, 게다가 이 어마어마한 모래벌레들은 사람들을 덥썩 집어삼키고…. 이런 요소들은 복잡하게 얽혔죠. 자연 생태계 이외에 다른 요소들 역시 중요합니다. 귀족들이 암투를 벌이거나 오래된 종교가 귀족 가문을 구원자로 둔갑시키거나 기타 등등. 하지만 이 소설이 돋보이는 이유는 역시 독특한 자연 생태계 때문일 겁니다. <듄>을 연상할 때, 누구나 거대한 모래 사막과 그 사막을 헤엄치는 어마어마한 괴수 모래벌레를 떠올리겠죠.

따라서 행성 생태학자가 중요한 등장인물이 된다고 해도, 그건 하등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리에트 카인즈는 원주민 프레멘들을 이끄는 지도자이고, 동시에 아라키스를 연구하는 행성 생태학자입니다. 그리고 리에트는 뭔가 더 큰 이상을 품었죠. 아라키스에서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생태학자입니다. 혹독한 자연 환경은 힘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카인즈는 프레멘들과 가까워졌을 겁니다. 아니, 사실 카인즈의 아버지인 파도트 역시 생태학자이고 프레멘들과 가까웠죠.

 

리에트 카인즈를 볼 때, 가끔 저는 타크베르라는 등장인물을 생각합니다. 타크베르는 소설 <빼앗긴 자들>에 등장하는 해양 생태학자입니다. 타크베르는 아나레스 위성에 살아요. 아라키스처럼 가혹한 행성이 아니나, 아나레스 역시 꽤나 살기 힘든 위성입니다. 모든 것이 삭막하고 황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게 일해야 합니다. 게다가 대기근이 덮친다면, 사람들은 쫄쫄 굶어야 해요. 아나레스 옆에는 우라스라는 행성이 있고, 우라스 행성은 풍부하고 아름다운 자연 생태계를 자랑하나, 아나레스 사람들은 그런 풍부한 생태계를 구경하지 못합니다. 다들 그저 죽어라 작물들을 키우고 입에 풀칠할 뿐이죠.

타크베르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다행히 이 위성에는 바다가 있고, 바닷속에는 엄청난 물고기들이 돌아다닙니다. 하지만 아직 아나레스 사람들은 그런 물고기들을 식량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크베르는 필사적으로 수산 자원을 연구하고, 그래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작가 어슐라 르 귄이 여러 인물들 중 생태학자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아나레스 위성이 척박하다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힘이 약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생태학자. 이런 관점에서 리에트 카인즈와 타크베르는 비슷할지 모릅니다.

 

사실 생태학자는 척박한 환경과 약자들을 함께 바라봐야 할 겁니다. 비단 SF 소설만 아니라 현실의 생태학자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생태학자는 어떻게 생물 다양성이 상호작용하는지 연구합니다. 그리고 인류 문명의 억압적인 계급 구조는 거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죠. 특히, 산업 혁명 이후, 자본주의 체계는 자연 생태계에 너무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고, 끝내 기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생태학자들은 이를 절대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게다가 자연 생태계가 수탈을 당하는 것처럼, 밑바닥 사람들 역시 수탈을 당합니다. 원주민들은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합니다. 밑바닥 사람들과 자연 환경은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지배 계급(자본가 계급)에게 수탈을 당하죠. 빈민들과 원주민들과 야생 동물들은 모두 비슷한 밑바닥 계급입니다.

따라서 야생 동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생태학자는 원주민들과 빈민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인도의 생태 철학자 반다나 시바가 말한 것처럼, 환경 보호는 그저 싱그러운 녹색 숲을 가꾸는 일이 아닙니다. 환경 보호는 평등한 사회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계급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환경 운동가는 허망한 관념론을 꿈꾸겠죠. <듄>에서는 귀족들의 식민지 통치가 강압적인 계급 구조이고, <빼앗긴 자들>에서는 자본주의가 그렇죠. 따라서 생태학자인 리에트와 타크베르가 그런 계급 구조에 저항하는 상황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카인즈가 무슨 사회를 꿈꾸는지 <듄>은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리에트 카인즈는 프레멘 원주민들의 저항을 이끄는 중이나, 그들이 무슨 사회를 구성해야 하는지 말하지 않아요. 카인즈는 그저 사막 행성을 녹지 행성으로 바꾸기 원할 뿐이고, 열심히 행성 공학(테라포밍)을 연구할 뿐입니다. <듄>은 행성 공학에 치중합니다. <듄>에서 행성 공학과 달리, 사회 공학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합니다. <빼앗긴 자들>에서 타크베르가 살아가는 아나레스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나레스 사회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국가를 대신합니다. 그 덕분에 아나레스 사람들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이는 아나레스에 문제들과 모순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나레스 사회 역시 상당히 많은 문제들과 모순들을 품었습니다. (타크베르의 연인인) 소설 주인공은 그런 것들에 진절머리를 내고, 아예 아나레스에서 탈출했어요. 하지만 타크베르는 아나레스 사회가 소중하다고 말하고, 아나레스 사회를 긍정합니다. 똑같이 가혹한 환경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생태학자이나, 카인즈가 사회 구조를 떠들지 않는 반면, 타크베르에게 평등한 사회 구조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물론 카인즈에게는 나름대로 사정이 있습니다. 귀족 가문들은 아라키스를 주시하고, 그래서 카인즈는 언제나 신경을 날카롭게 세워야 합니다.

 

아라키스에 비해 아나레스는 훨씬 자유롭습니다. 우라스 사람들은 아나레스 사회의 자치를 인정합니다. 우라스 자본가들은 함부로 아나레스에 간섭하거나 침략하지 않죠. 사실 아나레스에는 중요한 광물들이 있고, 우라스 사람들은 그런 광물들을 간절하게 원합니다. 하지만 우라스 사람들은 아나레스에 간섭하지 않아요. 아나레스 사람들은 열심히 광물들을 캐고 그걸 우주선으로 보내요. 우라스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합니다. 그들은 아나레스 사람들을 직접 통제하거나 감독하지 않습니다. 아나레스 사람들이 충분한 광물들을 보내기 때문에 우라스 사람들은 거기에 만족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설정이 꽤나 어설프다고 생각합니다. 인류 문명의 역사에서 지배 계급은 언제나 자원을 채취하는 약자들을 통제하기 원했습니다. 남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을 때, 유럽은 원주민 노동자들을 아주 잔인하게 몰아붙였죠. 포토시 광산에서는 엄청난 원주민들이 죽었습니다. 그런 가혹한 수탈 때문에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있었고, 오늘날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왜 제3세계 농민들이 죽어나가겠어요. 만약 작가 어슐라 르 귄이 <빼앗긴 자들>을 좀 더 현실적으로 쓰고 싶었다면, 더 많은 광물들을 얻기 위해 우라스 자본가들은 아나레스를 통제하고 수탈해야 했을 겁니다.

 

우라스 사람들이 아나레스 사회를 통제하지 않는 이유는 작가가 노동자 평의회에 좀 더 집중하기 원했기 때문일 겁니다. 어슐라 르 귄 역시 착취적인 남아메리카 식민지나 폭력적인 자본주의 체계를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르 귄이 쓴 또 다른 소설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은 그런 착취를 이야기하죠.) 하지만 작가는 평등한 사회 구조와 착취적인 자본주의를 대조하기 원했고, 그래서 식민지 침략 이야기를 제외한 것 같습니다. 어슐라 르 귄은 외부적인 변수 없이 양쪽을 대조하기 원했겠죠.

저는 이게 <빼앗긴 자들>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평등한 사회 구조를 묘사하고 싶다고 해도, 작가가 자본주의의 침략을 소홀하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역사적으로 지배 계급들은 언제나 평등한 사회를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평등한 사회가 너무 이상적이라고 말하나, 평등한 사회로 가는 실험들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문제는 지배 계급들이 그런 실험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파리 코뮌이나 스파르타쿠스 단체나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가 계속 존재했다면, 21세기 초반은 상당히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기득권들은 그걸 알았고, 그래서 그들을 짓밟았죠.

 

<빼앗긴 자들>은 그런 과정을 생략했고, 그래서 꽤나 낭만적인 소설이 되었습니다. 카인즈는 언제 귀족 가문들이 아라키스를 침략할지 전전긍긍하나, 타크베르는 그런 것을 고민하지 않아요. 우라스 군대는 아나레스를 침략하지 않죠. 하지만 그런 설정을 감안한다고 해도, 여전히 독자들은 아나레스 사회에서 중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아나레스에서 노동자 평의회는 토지 같은 생산 수단을 사회적으로 공유합니다. 그래서 중앙 집중적인 권력이 텃세를 부린다고 해도, 밑바닥 사람들은 먹고 살 수 있죠. 아나레스에 중앙 집중적인 모순이 존재한다고 해도, 밑바닥 사람들은 대대적으로 수탈을 당하지 않아요. 아나레스에서는 권력자가 약자를 굶기지 못하죠.

<듄>에서 리에트 카인즈가 이런 상황을 원할까요? 카인즈 역시 힘겹게 살아가는 원주민들을 돕기 원하고, 귀족 가문들보다 이런 약자들을 바라보고, 권위적인 귀족 가문들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하지만 카인즈는 거기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카인즈는 권위적인 지배 계급을 싫어하나, 어떻게 약자들이 먹고 살 수 있는지 말하지 않아요. 귀족들과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리에트 카인즈는 속내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나, 그렇다고 해도 카인즈는 사회 공학을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리에트의 아버지 파도트 카인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파도트 역시 지배 계급을 강력하게 부인하고, 프레멘들이 노예처럼 살아가는 상황에 분노합니다. 파도트는 인류가 행성 생태계에 아주 잔인한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해요. 파도트 카인즈는 그런 착취와 수탈을 끝내고 싶어하고, 아라키스에서 자신이 행성 공학과 사회 공학을 동시에 추구한다면, 그걸 끝장낼 수 있을 거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파도트는 그게 무슨 사회 공학인지 자세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파도트 카인즈는 오직 행성 공학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파도트는 생산 수단의 개인적인 소유를 없애고 모두가 땅을 공유하는 제도들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파도트와 리에트는 아카리스 행성에서 새로운 생산 방식을 꿈꿨고 그런 생산 방식이 계급 차별에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파도트와 리에트가 토지의 개인적인 소유에 반대했을까요? 만약 두 사람이 토지의 개인적인 소유를 인정했다면, 누군가는 또 다른 지배 계급이 되었을 테고, 계속 수탈을 반복했을지 모릅니다. 프레멘들은 노예에서 벗어났을지 모르나, 또 다른 노예들이 등장했을 테고, 자연 생태계는 수탈을 당했겠죠. 흔히 우리는 자원의 저주 운운합니다. 하지만 고통을 받는 제3세계가 모두 자원의 저주에 해당할까요?

 

파도트와 리에트 카인즈는 노예들을 없애기 원했고 자연 생태계를 보존하기 원했습니다. 두 생태학자는 충분히 인상적인 인물들이나, 아쉬운 한계를 드러냈어요. 파도트와 리에트는 사회 공학을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았죠. 그런 관점에서 노동자 평의회를 지지하는 타크베르는 파도트와 리에트보다 나을지 모릅니다.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의 비평문을 편집 및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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