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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역사”와 “듄”과 행성 공학 SF

분류: 책, 글쓴이: OneTiger, 18년 7월, 읽음: 72

에릭 콘웨이는 캘리포니아 공과 대학교의 과학 역사가입니다. 에릭 콘웨이는 기후 변화를 경고하기 위한 글들을 썼고, <다가올 역사, 서양 문명의 몰락>은 그런 글들 중 하나입니다. 제목처럼 <다가올 역사>는 미래에 암울한 대재난이 다가올 거라고 경고해요. 기후 변화는 미래 세계에 엄청난 파국을 미칠 테고, 수많은 사람들은 고통에 부딪힐 겁니다. 지구 기후가 이미 대대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기 때문에 현대 세계는 이를 막지 못합니다.

기후 변화가 문제가 되기 전에 현대 문명은 이를 막아야 했으나, 다들 자본주의를 숭배하고 환경 오염에 관심이 없었죠. 1970년대에 <침묵의 봄>과 <인구 폭발> 덕분에 환경 운동들은 강해졌으나, 그것조차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타파하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레이첼 카슨이나 폴 에를리히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고, 환경 운동들이나 녹색당들 역시 자본주의를 깨뜨리지 못했어요. 여전히 환경 운동가들은 자본주의라는 진짜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하죠. <다가올 역사>는 그런 현상을 지적합니다. 에릭 콘웨이는 우리가 자본주의를 깨뜨리지 않는다면 미래 세대가 고통을 짊어질 거라고 경고해요.

미래적인 관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다가올 역사>는 SF 소설처럼 보입니다. 에릭 콘웨이 역시 SF 소설이 중요하다고 말하고요. 에릭 콘웨이는 수 십 년 전부터 SF 소설이 기후 변화와 혼란이라는 주제를 파고들었다고 말합니다. <다가올 역사>는 킴 스탠리 로빈슨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나, 에릭 콘웨이는 프랭크 허버트 역시 높게 평가합니다. 에릭 콘웨이는 프랭크 허버트가 그런 주제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다루는 SF 작가였다고 말해요. <듄>은 어떻게 자연 생태계가 인류 문명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비록 <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트레이드 가문과 하코넨 가문이 벌이는 싸움이나, 행성 공학(테라포밍)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합니다. 광대한 사막 풍경과 거대한 모래벌레와 사막 행성을 둘러싼 행성 공학은 절대 빠지지 못하는 요소들입니다. 프레멘들은 아라키스 행성을 좀 더 녹음이 지는 행성으로 만들기 원했고, 꾸준히 여러 장비들을 설치했습니다. 하지만 아라키스 행성이 바뀌었을 때, 멜란지 스파이스나 모래벌레가 바뀌었고, 프레멘들이 살아가는 방법 역시 바뀌었습니다. <듄>은 거대한 기후 변화와 행성 공학이라는 소재를 대표하는 SF 소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행성 공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듄>은 원작 소설이 지니는 가치를 재현하지 못하죠. 흔히 사람들은 웨스트우드가 만든 비디오 게임 <듄 2>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소설 <듄>과 비디오 게임 <듄 2>는 서로 다릅니다. <듄 2>와 <듄 2000>, <엠퍼러: 배틀 포 듄> 같은 실시간 전략 게임들은 행성 공학을 중시하지 않아요. 저런 게임들에서 게임 플레이어는 자원을 수집하고, 건물을 짓고, 유닛을 생산하고, 적들을 파괴합니다. 실시간 전략 게임에서 이것들은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게임 플레이어는 유닛 생산 비용이나 기술 사다리나 지형을 외우고, 재빨리 마우스를 클릭하느라 애씁니다.

여기에 행성 공학이나 생태 철학은 없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행성 공학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연 생태계와 인류 문명이 서로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해도, 게임 플레이어들은 거기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은 유닛 생산 비용을 외우고 마우스를 빨리 클릭하느라 바쁩니다. 행성 공학? 생태 철학?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 철학을 고민한다면, 게임 플레이가 쉬워질까요? 게임 플레이어가 생태 철학을 고민한다면, 유닛들이 좀 더 빨리 나오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SF 게임은 그저 빨리 마우스를 클릭하기 원할 뿐입니다. 여기에 우주와 미래를 바라보는 사상이나 철학은 없습니다. 유닛 비용이나 빠른 마우스 클릭. 이게 사이언스 픽션일까요. 설사 이게 사이언스 픽션이라고 해도, 핵심적인 요소는 부차적으로 밀려나겠죠.

한편으로 프랭크 허버트가 <듄>을 쓰기 전에 프레드릭 폴 같은 작가는 <우주 상인>을 썼습니다. <듄>은 1965년 소설이고, <우주 상인>은 1952년 소설입니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발표하기 전에, 녹색당 운동이 활발해지기 전에, 이미 프랭크 허버트는 <듄>을 썼어요. 그리고 <듄>이 나오기 전에 이미 프레드릭 폴은 <우주 상인>을 썼죠. <우주 상인>은 대기업들이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디스토피아를 강렬하게 그렸습니다.

<우주 상인>은 기후 변화와 행성 공학을 대대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후 변화는 유일무이한 환경 오염이 아닙니다. 핵 폐기물이나 수질 오염이나 독성 물질이나 자원 고갈 역시 환경 오염입니다. <우주 상인>은 그런 재난들을 보여주고, 환경 운동 세력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심지어 19세기에 윌리엄 모리스는 <에코토피아 뉴스>를 썼고, 생태 사회주의가 자연 환경을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에코토피아 뉴스>는 본격적인 SF 소설이 아니나, 이런 유사 SF 소설이 일찌감치 자연 생태계를 걱정했음을 보여주죠. 아니면 허버트 웰즈가 쓴 <타임 머신> 같은 소설이 있고요. <타임 머신>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를 비유하는) 계급 구조는 파탄을 일으키고, 자연 생태계 역시 멸망합니다.

이런 소설들을 고려한다면, SF 소설과 행성 공학과 생태 철학은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가올 역사>는 SF 소설을 모방했겠죠. 언젠가 이런 SF 소설들은 더 이상 SF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그건 너무 모순적이고 끔찍하고 서글픈 현실일 겁니다. 그런 끔찍하고 서글픈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는 서둘러 준비해야 할 겁니다. 임금 노예로서 우리가 계속 대기업들에게 충성한다면, 우리에게는 미래에 대비할 시간이 없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억압적이고 수직적인 계급 구조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자신들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암묵적으로 지배 계급을 추종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폭력들이 만연하고, 기후 변화 같은 행성적인 재앙이 발생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저 비유적인 관용어에 불과하겠죠. 수많은 사람들은 그런 비유적인 관용어가 현실이라고 착각하고요.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 운운하는 주장은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은폐하거나 미화합니다. 그런 착각은 개인들의 잘못이 아닐 겁니다. 어떻게 일개 개인들이 사회 구조를 쉽게 파악하고 저항하겠어요. 진짜 문제는 그런 세뇌를 조장하는 사회 구조겠죠.

※ 이 글은 개인 블로그의 비평문을 편집 및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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