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쓸데없는 짓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뜬금없이 이야기해보자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나스 키노코입니다.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을 좋아하며 어지간한 글들은 재독하거나 하지 않지만 그의 작품만은 예외로 몇 번을 곱씹어보아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새로 번역되는 글도 없고 그래서 한동안 관심이 끊겨 있었는데 페이트 그랜드 오더라는 게임이 한국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면서 다시 관심을 갖고 그의 작품들도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진월담 월희>(만화책)를 다시 읽고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플롯이 그 분량에 비해 지극히 빈곤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가 이후에 쓴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보아도 이야기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며 몇 개의 포인트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인물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에만 분량이 할애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전설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결국 인물들과 그 인물들을 이해하려는 작가의 태도에서 나오는 것이더군요. 소위 로망을 충족하는 상황들이나 명장면 같은 것들은 나스가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집요하게 그들을 파헤쳐 내려가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것이고요.
그것을 알고 나니 그간 제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더군요. 저는 대체로 장르의 외적인 스타일을 먼저 파악하는 쪽이었고 글을 쓸 때도 그 쪽을 위주로 글을 썼습니다. 인물들은 그 외적인 형태에서 부여된 위치에서 기계장치처럼 자기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일 뿐이죠. 결국 반대로 하고 있던 셈입니다. 그 결과, 인물들은 공허해지고 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죠.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무언가 바뀔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제 안에 남은 문장은 이미 고갈되었고 저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이제서야 이런 것을 깨닫게 된 것이 그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뭐, 그것 또한 제 재능없음의 방증일 뿐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