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 일본의 무잔에(無惨絵)에 대한 잡설
* 이미지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으니 굳이 넣지 않겠습니다. *
츠키오카 요시토시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19세기 말 종기 우키요에 화가로, 마지막 우키요에 화가로도 불리우며 별명은 ‘피투성이 요시토시’입니다.
왜 피투성이 요시토시냐고요?
제목의 ‘무잔에’는 한자대로 무참한 그림… 예를 들어 사람의 목을 칼을 들고 뎅겅뎅겅 자른다든지 뭐 그런 걸 그려낸 그림을 말하는데요. 츠키오카 요시토시는 사진 기술의 발달로 우키요에가 사라져가던 시대, 그 섬세한 화풍으로도 이름이 높았지만 저 ‘무잔에’ 연작으로도 악명이 높은 사람이거든요.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호기심이 일어나셨다면야 검색을 말리지는 않겠지만, 여성을 밧줄로 묶어놓고 칼로 난도질하는 그림이나 팔다리가 잘린 남녀가 길거리에 묶여서 피를 질질 흘리는 그림 같은 것을 한번 보시면 어떤 분은 으악! 하고 우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른 뒤 그 그림을 본 대뇌의 기억 중추를 뭉텅뭉텅 파내고 싶어질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의 그림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그림은 <아다치가하라의 외딴 집>입니다.
잔혹한 그림 보고 싶지 않으신데 무잔에가 뭔지 모르고 클릭하신 분에게 실례니까, 그림 첨부는 하지 않고 대충 어떤 그림인지만 알려드릴게요.
장소는 허름한 폐가.
어둑어둑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구석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추악한 노파가 칼을 갑니다.
노파가 노려보는 것은 반쯤 헐벗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입니다.
노파가 직접 잡아다가 묶은 것인지 발이 묶여서 지붕의 서까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성은 만삭의 몸입니다.
그림은 여기서 끝나지만 우리는 추측할 수 있지요.
아, 저 임신부는 노파의 칼에 죽음을 맞이하겠구나, 하고요.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그림 치고는 피가 덜 나오는 것이긴 합니다만, 참으로 잔혹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그저 “으, 뭐 저런 그림이 다 있어? 하여간 일본놈들은.”라고 넘어가면 그것은 그림을 반만 읽은 것입니다.
이 그림에는 나름의 배경이 있거든요.
일본에는 ‘노’라는 전통 연극이 있지요. 이 중 가부키로도 상연되는 <구로쓰카>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이 그림은 그 내용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 <구로쓰카>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면.
주인공은 ‘이와테’라는 귀족 가문의 유모입니다. 이 유모는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의 병에 임신부의 생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지요. 충직한 이와테는 ‘아다치가하라’라는 곳에 있는 외딴 집에서 마침내 임신부의 생간을 꺼내는 데 성공합니다만 아뿔싸. 이와테가 죽인 그 임신부는 바로 이와테의 친딸이었습니다. 고뇌하던 이와테는 일본의 전통 요괴 중 하나인 ‘오니온나’가 되어 지나가는 행인을 잡아먹고 살다가 여행을 다니던 승려에게 퇴치당합니다.
으, 역시 잔인한 내용이기는 하죠?
『일본의 요괴문화 : 그 생성원리와 문화산업적 기능』이라는 책에 따르면, 이 <구로쓰카>의 테마는 ‘주인에 대한 의리와 인간으로서의 정 사이의 갈등’이라고 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으로 강요당하는 의무와 인간으로서 타고난 본성 사이의 갈등이라고 해도 되는 것일까요.
이와테가 오니온나가 된 것은 필연입니다.
그 어떤 사회적 의무와 강압도 인간의 본성을 이겨서까지 존재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이와테는 분명히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린 사람이고, 그에 따라 오니온나가 될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렇다면, 오니온나는 대체 무엇일까요?
오니온나가 존재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테는 자신의 친딸을 죽이지 않았어도 오니온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회적인 의무, 즉 주군에게 바쳐야 할 의리를 위해서라면 인간으로서의 본성마저 억누르는 강압적인 사회입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잔인하게 앗으면서까지 살아남아야 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신부의 생간을 꺼내 바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이와테는 이미 오니온나가 될 운명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오니온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니온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사회의 썩은 면을 드러내니까요.
오니온나는 그 자체만으로 이 사회는 개인을 억압하는, 매우 자유롭지 못한 세계라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오니온나는 그 존재만으로 사회의 질서를 파괴할 수밖에 없지요. 꼭 인간을 잡아먹고 행패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기존의 사회를 유지하려면 오니온나는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퇴치해야 하는 존재, 억압해야 하는 존재, 없애야 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오니온나입니다.
제가 이 <아다치가하라의 외딴 집>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잔혹함이 그저 잔혹함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간을 돌려 츠키오카 요시토시에게 “왜 이 그림을 그리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화가는 어물어물거리다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겠지요.
“아뇨, 저 그릴 때 별 생각 없었고요… 사진 때문에 그림은 사양길인데 잘 팔리는 게 저런 그림이라서 그렸습니다.”
누가 알아요? 진짜로 그저 돈 벌려고 그렸을지?
그러나 적어도 제가 읽기에 <아다치가하라의 외딴 집>은 그저 잔혹하기만 한 그림이 아닙니다.
사회의 강압과 그에 맞서는 인간의 본성을 그려낸 훌륭한 작품이에요.
인간이 괴물이 되는 순간은 대체 어떠한 때일까요?
저는 그 그림을 보고 ‘인간의 본성을 사회적 의무가 이길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츠키오카 요시토시의 그림을 두고 어떤 수업에서 짧은 페이퍼를 썼을 때, 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집어넣었습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보았을 때 사람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마도 도망치거나, 직면하거나, 웃음으로 얼버무려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은 어느 쪽이신가요.
비록 그럴 깜냥도 그릇도 안 됩니다만, 저는 직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금기를 건드리고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박살내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현실은 데모조차 안 나가고 집에서 빈둥빈둥 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