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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집 ‘현남 오빠에게’ 다 읽었어요

분류: 책, 글쓴이: 구름사탕, 18년 4월, 댓글8, 읽음: 219

재미있어요! 7명의 여성 작가들이 각자 단편 하나씩 써서 묶어놓은 책인데, 페미니즘이라는 큰 주제를 공유하지만, 글이 저마다 다른 시선을 가지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되게 신기했어요! ㅎㅎ 인상깊었던 작품 몇 개 소개해보겠습니다.

 

  “난 너희 어머니,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해.” 그가 말했다. “평생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갈등도 없었고, 아버지 내조도 잘 하셨고, 자식들 똑바르게 잘 키워냈고.”

  “현명하다는게 뭐지.” 유진이 물었다.

  “가족을 위해서 자기를 앞세우지 않고, 희생하는 거. 나 좋게 봐.”

  “엄만 행복하지 않았어.”

  “네 기준에서 봤을 때 그랬겠지. 옛날 분들 살아오신 걸 네 기준으로 판단하는 거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중략)

  그가 말했던 현명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란 무슨 의미였을까. 참고 참고 또 참는 사람, 남자가 하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 사람, 남자와 아이들에게 궁극의 편안함을 제공하는 사람. 자기 욕구를 헐어 남의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자기주장이 없거나 약하므로 갈등을 일으킬 일도 없는 사람…… 그가 ‘현명함’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때마다 유진은 거부감을 느꼈다.

  ㅣ최은영, <당신의 평화>

  <당신의 평화>는 정말 좋아서, 엄마한테 읽어드리기도 했어요 ㅎㅎ 원체 최은영 작가님을 좋아해서 ㅎㅎㅎ 최은영 작가님은 하고 싶은 말과 감정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내는데, 그 감정들이 거부감없이 다가오는 게 매력인 것 같아요. 인간관계에서 존재하는 묘한 감정선들을 진짜 훌륭하게 포착해내셔서 제가 매우 아끼는 작가입니다 ㅎㅎㅎㅎㅎ 이 소설에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는 유진이 자신의 어머니인 정순과 싸우고 나서 나오는 구절입니다. 적어볼게요.

 

  유진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고 있었다. 정순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을 것이고, 자신과 유진이 주고받았던 말을 지울 것이다. 유진은 그런 정순을 용서하겠지. 언제나처럼 정순의 전화를 받고 아주 가끔은 정순과 얼굴을 보고 밥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유진은 정순이 오늘 했던 행동과 말들을 잊지 못하게 된다. 용서해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언제까지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겠지만 오늘 같은 순간들이 만들어낸 거리를 좁힐 방법은 없다. 그 거리는 유진에게 어떤 안타까움을, 그리고 자유를 줬지만 언젠가 그만큼의 슬픔을 줄 것이었다. 유진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떤 사랑도, 어떤 후회도 그 슬픔을 갚아줄 수 없다는 사실도. 그러나 이 순간의 유진은 최선을 다해 이 익숙한 반복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뿐이었다. 혼자가 되고 싶을 뿐이었다.

  ㅣ최은영, <당신의 평화>

 

가족은 정말 가까운 존재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해요. <당신의 평화>는 그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보게 되겠지만 접힐 수 없는 거리감을 감당해야하는 존재. 지속되지만, 쉽사리 훼손되어버리는 관계. 가족. 아, 가족 뭐지…. 이런 기분으로 읽어내려간 단편이었습니다.

<현남 오빠에게>에 실린 단편들 중에는 상당히 장르적인 단편들도 꽤 있어요. 손보미의 <이방인>은 여자 주인공이 활약하는 느와르 단편이고, 구병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은 왠지 헝거게임 생각나는 단편이었구,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는 SF느낌이 풀풀 납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그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가 자신의 눈을 피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그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서 말했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넌 그냥 잘생긴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ㅣ손보미, <이방인>

 

<이방인>은 진짜.. 분위기가 개쩔어요. 피폐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심지가 굳은, 굉장히 카리스마 있고 인간적인 여자 주인공이 활약을 합니다. 소설 전체에서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서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한 단편이 끝날 때마다 작가의 말이 쓰여져 있는데 손보미의 작가의 말은 꽤 인상적이었어요.

 

  이 기획을 청탁받았을 때, 나는 막연하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느와르풍의 소설을 한 편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이러한 소설의 ‘여성’ 주인공은 섹스어필을 해서도 안 되고,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고, 다른 누군가ㅡ특히 남성ㅡ의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제한은 사실, 우스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풍의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들은 섹스어필을 하고, 사랑에 마음껏 빠지고, 여성의 도움을 수도 없이 받기 때문이다.

 

이 작가의 말은 평상시 소설을 쓸 때 여성 캐릭터가 어떻게 소비되어 왔는지를 돌이켜보게 됩니다. 여성을 단순히 피해자 A, B로 전락시키지 않았는가? 그저 남자 캐릭터를 성심성의껏 도와주고, 그것에 만족하는, 순종적인 여자 캐릭터를 만들지는 않았는가. 여성 캐릭터에게 충분히 주체성을 부여했는가. 여성 캐릭터들이 타인ㅡ주로 남자ㅡ을 돕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는 않았는가. 그런 지점에서 보았을 때, <이방인>은 정말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단편이 장편의 분량으로 개작되면 좋을 텐데ㅡ라는 욕심도 조금 생겼네요.

구병모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은 분위기가 압도적인 소설이에요. 구병모 작가가 원체 순문학(이 단어 별로 안 좋아하지만.)과 장르문학을 넘나드시는 분이시라서 그런지 이번 단편도 되게 훌륭한 스릴러 단편입니다. 다 죽여요. 여장남자 콘테스트에 참가한 남자들이 있는데, 갑자기 사냥꾼들이 화살로 그들을 척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빨간 드레스와 스틸레토 힐을 신은 남자가 화살을 피해 달아나는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 즐거웠네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내용 소개는 여기까지.

김성중의 <화성의 아이>는 SF입니다. 굉장히 차분하고 유머러스하며 평화적인 SF에요. 화성에 냉동인간으로 보내졌다가 어느 먼 미래에 깨어난 ‘나’와 1957년 우주로 쏘아올린 강아지 라이카의 유령이 화성에서 화성을 탐방하고, 누군가 이곳에 다다르기를 기다리는 이야기에요. 말하는 강아지 유령인 라이카가 워낙 재치있고 재미있는 캐릭터라서 훈훈한 마음으로 완독했습니다.

 

  여성주의가 남녀의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사랑을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은 틀렸다. 나는 여성주의야말로 사랑을 향한 투쟁이며, 사랑을 죽이는 가부장제의 해독제라고 생각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굴종을 요구하고 오만 가지 방법으로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키는 방식으로는 어떤 인간도 해방될 수 없다. 다른 인간에게 굴종을 요구하는 인간마저도 말이다. 며느리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딸이라는 이유로 받아 마땅한 고통은 없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괴롭힘 당할 이유 같은 건 없다.

  서로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가능한 세상을 꿈꾼다. 흘릴 필요가 없는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꾼다.

 

최은영 작가님의 작가의 말입니다. 가부장제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 굳건히 자리잡고 있고, 여성들을 착취하고 혐오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가부장적인 여성혐오를 부술 때가 됐어요. 현재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미투 운동 같은 것도 가부장제를 부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비가시화되어왔고, 어둠 속에 감춰 놨던 폭력들, 부당한 폭력들을 부술 수 있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직 페미니즘에 대해 잘 안다고는 못 하겠지만요. 그래도 부당한 것을 부당한 것이라고 더 제대로 알고, 말하고 싶어서 <현남 오빠에게>를 읽었고,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국 여성의 현주소와 나아가야할 방향을 어렴풋하게나마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일곱 편 중 어떤 이야기에서도 여성 자신이 끝까지 소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생경할 것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여성성이 필요할 때에만 등장하고 사라지는 여성이 없는 이야기만을 읽는다면 세상에서 자신의 쓸모도 다르게 여길 수 있으리라.

  ㅣ이민경, 발문.

 

창작을 하는 사람으로서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소외시키지 않을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면, 페미니즘에 대해 알고 싶은데 뭘 읽고 어떻게 공부해야할 지 모르겠다면, <현남 오빠에게>를 읽어보시라고 적극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픽션은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현실을 잘 파악해야 좋은 픽션이 나오는 법이잖아요? 헤헤. 이것으로 저의 <현남 오빠에게> 영업을 마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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