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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사 – B.B. King

글쓴이: 박짝, 17년 9월, 댓글3, 읽음: 111

 

 

비비 킹. (1925-2015)

1980. 블루스 명예의 전당.

1987. 락앤롤 명예의 전당. 그래미 평생공로상.

 

비비 킹은 블루스와 락앤롤, 양쪽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는데도 전혀 나태해지지 않았다.

 

1991-2009까지 수상한 그래미만 11개. (전부 레코딩 관련 수상.) 마지막 수상한 앨범이 2008년에 발표한 명반, <One Kind Favor>다. 롤링 스톤에선 “그의 커리어 중 가장 뛰어난 스튜디오 앨범 중 하나이며, Singing in the Blues,나 Lucile에 비견할 만 하다”고 평했다. 위에 적었는데도 다시 또 써야겠다. 영감님은 1925년생, 당시 83세였다.

말년 활동은 정말 경이롭다. 공로상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던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20년이다. 쉽게 말하면, 20년 전에도, 30년 전에도, 40년 전에도 엄청난 명성을 얻었는데도, 80 중반 나이가 될 때까지 끊임없이 창작활동을 계속했다.

레코딩뿐만이 아니었다. 공연 횟수는 연평균 250회. 미국 allmusic 사이트에선 연 300회로 적었다. 매일 했다는 얘기다. 왕성한 현역이나 다름없는 횟수다. 실제로 내가 비비 킹 관련 포스팅을 했던 시절, 비비킹이 살아있던 2014년에는 비비킹 오피셜 사이트에 하루이틀 꼴로 공연이 잡혀 있었다.

다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당시 공연장에서 종종 박자를 놓치거나, 가사를 깜빡하거나, 공연에 늦거나 하는 일이 잦아졌고, 기사로도 종종 나왔다. 나는 그럼에도 공연을 워낙 왕성하게 하셔서 건강에 큰 문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1년 뒤, 2015년, 영감님은 돌아가셨다. 나는 비비킹 관련 포스팅을 블로그에 올리며 더 장수하길 빌었는데, 1년뒤에 돌아가실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돌아가실 정도로 편찮으시면 공연은 안 하시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죽을 때까지 음악할거다. 무대 위에서 죽겠다.’ 말을 외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내게 삶으로 보여준 사람은 비비킹 뿐이었다. 뭐 하나 아쉬울 거 없는 말년에도 그는 신인처럼 열정적이었고, 문자 그대로 끝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늘 비비옹은 꾸준했다. 1990년 당시 비비옹이 결근하자 나왔던 반응을 음악평론가 임진모가 옮겼던 적이 있다.

(생략)…당뇨병으로 오랜만에 공연에 ‘결근’하게 됐다. 재즈페스티벌의 한 관계자가 “지난 71년부터 지금껏 B.B.킹과 함께 일해왔지만 단 한번도 쇼를 취소하거나 빠진 적이 없었다”고 인정할 만큼 킹은 성실한 자세를 보여왔다.

 

그를 알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닌 우연이었다. 뉴욕 여행을 갔다가 비비킹 라이브 클럽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간판이 크다는 별 시덥잖은 이유였다. 한국에 돌아와 사진을 돌려보다, 이 클럽 주인은 누구지 싶어서 찾다 보니 비비킹 음악에 빠져들었다. 금세 열성적인 팬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를 만나지는 못했다. 돌아가신 뒤에서야 뒤늦게 라이브 클럽에 다시 갈 수 있었다. 그가 늘 있었다는 공연장에서 다른 이들이 공연하는 걸 지켜본 게 전부였다.

언어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세대마저 다른 동양 청년이 살아가는 태도에, 자신의 음악이 이렇게 큰 영향을 미칠 지는 비비옹도 잘 몰랐을 것이다.

 

 

그만큼 비비옹은 정말 위대했다.

내겐 모든 분야를 통틀어서 가장 성실하고 열정적인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래선지, ‘박짝’이란 필명을 쓰면서, 별 고민 없이 모든 프사를 비비킹으로 정했다.

프사를 보면 게을러질 수가 없다.

이 사람이 음악했듯 글 쓰고 싶다는 말은 감히 꺼낼 수도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겠다 다짐할뿐이다.

 

RIP B.B. King

박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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