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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혹은 인물이) 살아 움직이는 경험에 대하여

분류: 내글홍보, 글쓴이: 창궁, 8시간 전, 읽음: 47

원문은 다른 말투로 썼던지라 말투 교정 작업은 제미나이를 거쳤습니다.

 


창작하는 분들로부터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인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창작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 창작에 숙련된 분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러한 감각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어떠냐고요? 실은 그 지점이 참 애매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내 통제를 벗어나 창작물이 살아있다”는 감각에 휩싸이거나 그런 생각이 든 적이 딱히 없습니다. 다만 이것은 ‘정의’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애매하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발견과 탐색: 요소들의 유기적 연결

“창작물이 살아있다”는 추상적인 감각에서 벗어나 좀 더 현상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기존 구상에서 벗어나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구상을 발견하거나 탐색하는 일”은 저에게도 매우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저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으며, 실제로 지금 연재 중인 《미궁 사변》은 대놓고 이러한 현상을 적극적으로 유발하여 집필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창작에는 인물, 배경, 사건이라는 커다란 요소와 그를 구성하는 수많은 세부 요소가 존재합니다. 이 요소들은 얼마든지 쪼개질 수 있고, 또 파생될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 쪼개고 파생하여 인식할지는 각자의 몫이겠지요. 그리고 이 요소들은 ‘작품’이라는 틀 안에서 ‘이야기’를 구성하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때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집니다.

저는 요소들을 연결하는 방식이 반드시 한 가지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저는 대체로 블록을 쌓듯, 요소들을 이용해 하나의 콤팩트한 건축물을 완성하는 이미지를 그립니다. 모든 요소는 제자리에 있어야 하며, 각자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남거나 빠지는 요소가 적을수록 훌륭한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확장: ‘잘 안다’는 것의 아이러니

하지만 단순히 ‘쌓는 것’만으로 연결을 인식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한붓그리기처럼 각 요소들을 하나로 꿰어내는 지점을 발견하기도 하고, 숨은그림찾기처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요소를 찾아내기도 합니다. 혹은 방 정리를 하듯 흩어진 요소들을 새로운 규격에 맞게 정리하며 새로운 방식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과정은 초기 구상의 연결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거나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요소들 간의 연결 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재고하고, 기존의 내가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연결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작품 속 인물들이 살아있다고 말하기보다, 제가 그들을 “잘 안다”고 말합니다. 인물이 내적으로 인식하는 것 이상의 측면과 연결을 제가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잘 모릅니다. 아직 제가 발견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알아가고 있다’는 말이 가장 근접할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모름’을 전제하므로 글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잘 알면서도 더 알아간다’는 아이러니한 상태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해체와 창발: 분석하는 창작자

분석하고 탐구하는 것, 앎과 모름을 반복하는 것. 저는 총체로서의 삶(살아있음)을 논하기보다, 오히려 총체를 해체한 개별 요소들의 창발적 연결을 사랑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생각입니다. 곱씹고, 해체하고, 분석하고, 고찰하며 요소들을 붙였다 떼었다 해보는 과정에서 문득 “새로운 연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연결들이 늘 쓸모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가치 있는 발견인지 분간할 내적 기준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 초기 구상과 목표, 더 근원적으로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라는 본인의 문학관입니다.

지금 쓰고 있는 장편 《미궁 사변》은 개별 요소에 대해 깊이 탐색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쓰는 족족 새로운 발견과 연결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초고를 쓰며 디테일을 채우다 보니 요소들이 끊임없이 추가되고, 기존 요소들과의 연결이 마구잡이로 늘어나는 중입니다. 덕분에 정말 정신없이 쓰고 있지만, 무수히 많은 선택지 중 필요한 것만 취사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참 감사한 일입니다.


나가는 글

누군가는 이러한 저의 과정을 두고 “그게 바로 인물이 살아있는 것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살아있다기보다 “잘 알지 못했다가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는 과정”으로 인식됩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저의 지론이 창작 감각에도 투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작품이 꼭 살아있어야만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미스터리 장르는 살아있기보다 언어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맞춰진 퍼즐에 가까워야 하니까요. 살아있지 않더라도 본인의 문학관을 충실히 추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p.s.

본 글의 인용되는 미궁 사변은 제10회 작가 프로젝트에 당선된 작품인 ‘제2차 시린골 미궁 구출 작전’의 후속작입니다. 본의 아니게 전작을 유료로 팔아먹는 상술을 부리고 있으나(…)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애당초 본작은 시린골을 몰라도 독해에 지장이 없게끔 쓰고 있습니다. 물론 알면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고요)

시간이 되신다면 저의 즉흥적인 연재를 구경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물론 지금은 벌써 500매를 넘게 연재한 만큼 연재 초기 때처럼 제로베이스에서 탐색하진 않지만요.(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는 뜻입니다)

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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