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밑줄

분류: 수다, 글쓴이: 조딘, 7시간 전, 댓글2, 읽음: 49

아주 어릴 때, 여덟살 쯤 됐을까
앞집 사는 여자애랑 싸운 적이 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걔가 저보고 어린 왕자를 읽었냐고 묻길래
자기 별로 돌아가는 부분이 슬펐다고 하니까
글쎄, 그런 건 없다고, 어린 왕자는 그냥 죽었다고
아니야, 어린 왕자는 죽은 게 아니야, 자기 별로 돌아간 거야
그래서 우린 싸웠죠, 너는 읽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도 읽고, 나도 읽고
다만 우리는 같은 이야기의 다른 면을 보았던 거겠죠
누구는 모자를, 누구는 코끼리를 보듯이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은 프로크루스테스인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기 침대에 맞춰서 모든 이야기를 자르고 늘리고 하는 거죠
나에게 있어서는 결코 편집될 수 없는 부분이
당신의 침대에는 맞지 않아 잘려나가고
당신에겐 불필요한 부분이
나의 침대 위에선 지나치게 과장되는 거예요
우리의 책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문장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문장에 밑줄을 그어왔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집니다
또한 그만큼 쓸쓸해지기도 하지요

 

‘밖에 비가 옵니까?’
계단 저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
머리가 하얗게 벗겨진 노신사가 제 쪽으로 손짓을 합니다
아니요, 비는 이미 한참 전에 그쳤습니다
펼쳐진 우산을 그제서야 겸연쩍게 접으며 저도 외쳐 말합니다
대답이 들리지 않는지 몇 번을 되묻고는
고맙다며 굳이 눈을 맞추고 허허 웃는 노인
저 역시 따라 웃고는
돌아서 걸으며 자기 자신에게 들리라고
조용히 ‘현재’라고 말합니다

 

 

 

끝없이 내리는 비가 종이컵 밖으로 흘러넘치듯
끝없이 흐르는 언어들은 우주 너머로 흘러가고
슬픔의 심연 위로 춤추는 기쁨의 파도는
나의 열린 마음 안으로 흘러 들어와
날 사로잡고 어루만지는데..

선지자여, 깨달음을 주소서
그 무엇도 저의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수백만의 눈동자처럼 내 앞에서 춤을 추는 빛의 파편들은
우주 저 너머에서 자꾸만 나를 오라 부르고
생각은 쉴 새 없는 바람처럼 편지함 속을 맴돌다
눈 먼 채로 우주 저 너머를 향해 갈 길을 재촉하는데

선지자여, 깨달음을 주소서
그 무엇으로도 저의 세상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나의 열린 시야로 울려퍼지는 지구의 그림자와 웃음 소리는
나를 자극하며 어디론가 나를 이끌고
수백만의 태양처럼 내 주위를 비추는 무한한 불멸의 사랑이
우주를 가로질러 나를 부르네

선지자여, 깨달음을 주소서…

 

우주를 가로질러 / 피오나 애플 (비틀즈 커버)

조딘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