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쓰는 노하우 보따리 풀어보기(스압)
전에 장편 연재와 관련된 조언을 구하는 글을 보고 제가 가진 노하우들을 적어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쓰게 됐습니다.
크게 전제, 태도, 기획, 연재 파트로 나눠서 작성해보겠습니다.
전제
전제 파트는 쓰기(여기선 실제 작문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전에 갖춰두면 좋은 것들입니다.
1. 완성의 감각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성이란 건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써내고 업로드를 마친 것을 말합니다. 즉, ‘끝을 봤다’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야기의 끝을 봤다는 건 곧 이야기의 처음, 중간 역시 봤다는 뜻이 되겠죠. 그것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역시 끝을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장편을 완성하기 위해선 장편을 완성한 감각이 있어야 하는 모순을 발생시킵니다. 마치 경력 있는 신입을 뽑는 것 같달까요. 하지만 다행히도 완성의 감각에는 분량의 제한이 없습니다.
즉, 단편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완성’하는 감각을 갖추면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단편과 장편 사이엔 창작 역량의 요구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단편만 창작한다고 장편을 잘 쓸 수 있느냐는 당연히 별개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완성해본 적 없는 사람’과 ‘짧더라도 이야기를 완성해본 적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기획하고 실제 집필에 들어갈 때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리란 건 누구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감각이 한 번인 사람과 여럿인 사람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저마다의 집필 방식이 다를 테고, 집필의 감각 역시 천차만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선 직접 써봐야 압니다. 결국 글은 누가 대신 써주는 게 아니니까요.
무엇보다 완성의 감각은 ‘중단’을 방지하고 막는 데 효과적입니다. ‘어떻게 끝을 낼지 아는 것’은 장편 집필이라는 막막함 앞에서 상당히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줍니다.
집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지치고 피로한 상황’에서 끝이 보이지 않거나, 끝을 맺을 줄 모르면 그대로 집필 의지가 꺾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완성의 감각을 통해서 본인이 기획의 어디까지 썼고,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면, 그렇게 ‘끝’을 볼 수 있다면 집필 의지만큼은 보존할 수 있습니다.
장편 연재는 정신력, 체력, 시간, 그리고 역량 싸움입니다. 완성의 감각은 그 모든 영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괜히 웹소설 생태계에서 독자들이 ‘완결 이력이 있는 작가’를 선호하는 게 아닙니다. 완성해본 놈이 완성할 줄 안다는 것이죠. 이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선 단계별로 완성의 감각을 쌓는 걸 추천합니다.
2. 완성의 감각만큼이나 중요한 건 ‘시간’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장편은 연재(업로드)의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집필’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투자돼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라고 다 같은 시간은 아니죠. 여기서 말하는 시간은 ‘집필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집필 기간, 집필 빈도, 집필 시간이라는 세 가지 시간’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시간은 풀어서 설명하면, ‘완결하는 데 걸린 시간'(집필 기간), ‘집필 시간 사이의 간격'(집필 빈도)과 ‘단일 집필 시간 자체'(집필 시간)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본인이 일주일에 한 번, 1시간만 써도 이야기의 흐름과 기세를 유지할 수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1시간만 확보해도 장편을 쓸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변수가 많으니 한두 시간 정돈 여유 시간으로 더 확보해놔도 되겠죠.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1시간 정도로는 집필의 감각을 유지할 수 없다면 더 짧은 간격(높은 빈도)과 더 긴 몰입(장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시간이 썩어 넘친다면 이러한 조정이 어렵지 않겠지만, 시간적 여유가 그리 확보되는 환경이 아니라면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해지겠죠.
물론 이런 감각을 유지할 방법이 꼭 시간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기획서를 만들어두고, 설정집을 짜두고 그걸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재독하는 식으로 감각 자체는 어느 정도 살려둘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다시 말해 두 간격을 여유롭게 확보할 수 있다는 뜻이고요.
그리고 이러한 ‘시간 확보’와 ‘간격 조정’은 전적으로 축적된 집필 경험에 기반합니다. 단편 창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다 써내는 경험만 있는 게 아니라면, 어찌됐건 시간을 쪼개고, 할애해서 창작하게 돼 있으니까요.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집필 기간은 결코 짧게 잡을 수 없단 것입니다. 집필 빈도와 집필 시간을 잘 확보해놔도, 집필 도중 현생에 큰 변화가 생겨 집필 빈도와 시간에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면 큰 낭패가 따로 없습니다. 심각한 경우 아예 시간 확보를 하지 못해 집필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고요.
따라서 집필 기간 역시 충분히 고려해야 합니다. 본인이 가진 집필 빈도와 집필 시간으로 확보되는 일주일 당 집필 분량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총 분량을 예상해서 걸리는 시간을 대략적으로 뽑아낼 수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예상되는 장편에서의 예상 총 분량은 희망 완결 분량에 가까운 것이라 그렇게 엄밀하게 산출할 필요는 없습니다. 완성의 감각이 정교해질수록 예상 수치 역시 정교해지겠지만, 본인이 장편을 처음 집필하는 거라면 10만자, 20만자 단위로 끊어서 계산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일주일에 5천자를 써낸다면 10만자를 쓰기까지는 20주, 5달이 걸립니다. 5달 동안 꾸준히 시간을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써내야 하는 만큼 적어도 반년치 스케줄과 변수를 고려해서 어떻게 시간을 확보할지 가늠해봐야 합니다.
이러한 작업이 어째서 기획에 있지 않고 전제에 있느냐면…… 앞서 말했듯 단편/중편 창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으니까요.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초고를 탈고할 때까지 끝장을 보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겁니다. 저 역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은 여러 시간에 걸쳐서 완성합니다.
그렇기에 집필에 필요한 세 간격의 시간을 잘 가늠하고 확보할수록, 장편을 쓸 역량이 확보된다고 봐도 되겠죠. 특히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잘 안다면 더더욱 좋습니다. 1번과 2번은 멀리 떨어진 역량이 아니에요.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2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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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의 감각을 갖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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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기간, 집필 빈도, 집필 시간을 잘 따져서 미리 확보해놔라
태도
태도 파트는 쓰는 동안(쓰기 전에도) 갖추고 있으면 좋은 마음가짐을 다룹니다.
1. 장편은 전제 파트에서도 다뤘듯 집필 기간부터 ‘n개월’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갑니다. 이름난 작가들이 장편 한 권 쓰는 데 몇 년 걸렸다는 말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고요. 웹소설급 집필 속도로도 10만 자 경장편을 쓰려면 20일(3주)이 걸립니다. 이는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에만 쓸 때 딱 한 달이 걸리는 기간입니다.
오래 쓴다는 건 변화를 암시합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쓸 순 없습니다. 프로를 제외한 아마추어에게 있어 장편은 특히 고독과도 싸워야 하는 만큼, 장편을 쓰면서 마주할 시련은 대부분 내부에서 발생합니다.
열정이 식고, 무반응에 괴로워하고, 확신이 흔들리고, 기획을 의심하고…… 이런 문제들은 장편연재가 흥하더라도 똑같이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왜냐면 본질적으로 외적 요인 때문에 비롯된 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문제에 가까우니까요.
장편을 마라톤에 비유하는 말을 굉장히 많이 들으셨을 줄로 압니다. 저는 그보다 더 훌륭한 비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라도 아신다면 얘기해주세요.
마라톤에서 중요한 건 일정하게 달리는 겁니다. 외부 요인와 별개로 자기만의 페이스를 유지하고, 체력이 충분한 사람이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장편 집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태도는 ‘일정함’입니다. 영감에 의존하는 집필 방식으로는 장편 집필을 ‘시작’할 순 있어도 ‘완성’하긴 힘듭니다. 집필 기간 전체에 걸쳐 영감이 끊임없이 샘솟는다면 모를까, 절대다수는 영감 없이 집필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습니다.
따라서 장편을 쓸 때만큼은 영감에 의존하기보다 ‘완성의 감각’에 의존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계산되고 파악되고 훈련된 감각으로 꾸준히 써낸다면 완성은 그리 먼 얘기가 아닙니다.
일정하고 꾸준하지 않으면 결국 그만큼 집필 기간에 변수가 많아지게 되고, 이는 심리적으로 완성에 대한 자신과 확신을 흔드는 요인이 됩니다. 일정함이야말로 시간이 주는 최대의 시련을 안정적으로 이겨낼 최고의 태도입니다.
2. 물론 일정하기만 해선 마모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기계적으로 글을 쓰게 되면 일정 기간은 유지할 수 있지만, 결국 거기에 새로운 동력이 들어가지 않는 한 기계는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필요한 건 분명한 목적의식입니다.
즉, 본인이 쓰고자 하는 장편이 추구하는 목적을 재고하고 고취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건 굉장히 내밀하고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이때 목적의식은 동기와는 조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은 자주 동일시 되고, 실제로 목적의식이 있기에 장편을 기획하고 구성하면 목적의식=동기가 되므로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발적인 동기만으로도 장편을 기획하고 시작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장편을 기획하고 쓰고자 하는 것이 즉흥적인 감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서인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면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동기는 휘발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것이 기록되고 보존될 지라도,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동일한 감흥을 유지한다는 것은 지나친 기대입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이불킥이라는 단어와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힘들었을 겁니다.
따라서 의식적이고 분명하며 확고한 목적의식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 목적의식은 굳이 남들에게 제창될 필요도 없고, 이런 것이 있다고 광고하거나 암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목적의식의 문제는 아주 내밀하고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을 설득할 충분한 목적의식이라면, 그건 어떤 형태나 문장으로든 성립됩니다.
즉, ‘쓰고 싶어서 쓴다’처럼 즉흥적으로 보이는 목적의식일지라도 그것이 내적으로 충분한 맥락과 근거를 갖춘다면 괜찮습니다. 훗날 시간에 의한 변화(슬럼프, 동기 소실, 열정 저하 등)가 당신을 시험할 때, 이러한 목적의식이 당신을 다시 설득할 수 있다면 충분히 목적의식으로 기능하는 것입니다.
목적의식의 방향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굳이 외부로 향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 질문을 던지거나, 삶의 방식을 논하거나, 세계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부에서 단단하게 성립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본인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을 구현하는 첫 시도라든지, 정말로 쓰고 싶은 작품을 더 잘 써내기 위한 연습 단계라든지, 본인의 삶을 가감없이 담아내는 것이라든지… 이런 건 외부 반응이 어떻든 목적의식을 재고하는 것만으로도 창작 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내적 요인입니다.
2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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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함을 유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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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목적의식을 갖춰라
기획
기획 파트는 집필에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소들을 다룹니다.
1. 어떤 이야기인지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는 목적의식과 구분돼야 합니다. 이야기는 목적의식을 이룰 수단으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목적의식을 이룰 수단으로서 이야기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마라톤 비유에서 이어나가자면, 코스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출발점(아무것도 쓰지 않은 지금 현 상태)과 종점(목적의식)이 있다고 해서 열심히 달리면 종점에 닿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출발점에서 종점에 닿기 위한 코스(이야기)가 준비돼야 합니다.
아주 쉽게 이해하면, “한 줄 요약”이 되는 이야기가 좋습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러한 요약은 주인공의 가장 거대한 목표로 요약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적왕이 되고 싶다거나, 호카게가 되고 싶다거나, 더 강한 사람과 맞붙고 싶다거나, 혹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고 싶다거나, 세계를 구한다거나 기타 등등……
꼭 한 줄일 필요는 없지만, 그 요약은 반드시 출발점과 종점을 꿰뚫고 있는 핵심이어야만 합니다. 왜냐면 그래야만 이야기의 정체성과 방향성이라고 부를 만하니까요. 이야기로서 확고한 자아가 잡히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는 스스로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쳐내야 하는지 스스로 알지 못해 이것저것 섞여 잡탕이 되기 쉽습니다.
이를 응용하면 전체 이야기 단위에서 대단원 단위로, 대단원 단위에서 에피소드 단위로, 에피소드 단위에서 장면 단위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즉, 각 장면들의 정체성의 합이 에피소드의 정체성이고, 에피소드들의 정체성의 합이 대단원의 정체성이며, 대단원들의 정체성의 합이 곧 이야기의 정체성인 겁니다.
어디까지 응용하고 적용할지는 본인의 세부적인 집필 방식에 맞춰서 적용하면 됩니다. 장편 집필에선 즉흥적인 영감보단 일정함이 더 고평가 되는 요소는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본인의 집필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완성하기 위한 조건’을 스스로 깨닫고 이해하여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 자기 언어로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시간의 시험을 받을 때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즉,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모를 때,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모를 때, 당신이 과거에 규정한 정체성이 당신에게 다시 일러줄 것입니다.
2. 기획의 언어와 집필의 언어 사이의 괴리를 잘 포착하셔야 합니다. 기획할 땐 ‘A와 B가 싸운다’라고 한 줄로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 집필에선 이 한 문장이 한 회차 단위의 분량을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기획의 언어는 너무나도 손쉽게 집필의 언어가 요구하는 디테일(세부사항)을 생략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시 말해 기획하는 일(코스를 짜는 일)과 집필하는 일(코스를 달리는 일) 사이에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흔히 장편 집필 중에 발생하는 충돌 중 하나가 ‘집필 도중 기획이 틀어지는 일’입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획을 망각하거나 상회하는 즉흥적 영감이 기획을 이겼을 때, 또 하나는 기획에 없는 세부사항을 추가하는 과정에서 그 세부사항들의 의도치 않은 시너지로 인해 기획을 달성하기 어려워질 때입니다.
전자든 후자든, 기획의 불완전성을 담보하는 상황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즉, 기획을 100% 완벽하게 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짤 수도 없고요. ‘유연하면서도 탄탄한 기획’을 만들기 위해선 기획할 때 쓰는 언어가 실제 집필할 때 쓰는 언어와 얼마나 차이를 빚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차이를 기계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뭉뚱그리지 않고 전부 기술하기’가 있으나, 이는 바꿔말해서 기획단계에서부터 준 집필 수준으로 쓴다는 것이니 시간도, 체력도, 열정도, 의지도, 모두 소모가 막대합니다. 따라서 좀 더 현명하게 기획하려면, 쓰는 본인이 ‘이렇게 대충 잡아두면 실제로는 어느 정도로 쓰겠구나’라는 견적이 나와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역시 꾸준히 강조되는 ‘완성의 감각’과 연결돼 있습니다. 그리고 기획 언어의 괴리를 포착하는 작업 역시 꼭 장편 작업으로만 알아낼 수 있는 게 아니고요.
3. ‘어디까지 기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단편 기획보다 장편 기획이 좀 더 많은 영역에서의 고민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영역의 고민을 낳는지는 쉽게 파악할 수 없고, 쉽게 자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정녕 ‘쓰기 전까진 모른다’라는 것일까요? 다행히도 그렇진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지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이야기의 정체성으로 요약한 것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다만 이러한 근거를 통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기획해야 하는가’란 질문에 답을 내릴 땐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큰 요약엔 큰 필요’가 따라온다는 점입니다. 즉, 요약한 이야기의 단위가 클수록, 거기에서 추정할 수 있는 필요 기획은 매우 추상적이고 거시적인 게 됩니다.
바꿔말하면 어떤 세부사항이 요구될지 추측하고 싶다면, 그만큼 작은 단위의 이야기를 생각해놔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본인이 가진 배경지식이 풍부하다면 구체적인 세부사항을 일일이 계산하고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로 하는 세부사항을 이미 갖추고 있다면 기획할 때부터 기획 언어에 반영이 돼 있을 테니까요.(이를 위해 다시 전제 파트로 되돌아가 ‘배경지식을 많이 쌓아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기획은 기획일 뿐이라는 겁니다. 앞서 말했듯, 100% 완벽한 기획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적정한 선’에서 기획이 제 모습을 갖췄다면, 실제로 쓰면서 조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와 ‘어디까지 기획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내적으로 구체화가 된 시점이 바로 기획에서 집필로 전환되는 시점이겠고, 그때까지 기획하는 것이겠죠.
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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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정체성을 확고히 갖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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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과 집필 사이의 간극을 파악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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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근거해서 기획하되, 결국 기획은 중간 단계임을 명심하라
집필
집필 파트까지 왔으면 더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진 않습니다.
1. 태도에서 다뤘던 일정함을 실제 집필에서 다루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야기 단위로 끊어서 집필하는 것이고, 하나는 분량을 끊어서 집필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습니다.
먼저 이야기 단위로 끊어서 집필하는 것입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몰입감과 집필 감각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방식은 일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 이야기 단위로 끊어서 씁니다. 이렇게 쓰면 쓰려는 내용이 애매하게 끊기거나 다음 집필로 넘어갈 일이 없습니다.
이야기 단위로 쓰기 때문에 분량에 맞춰 쓰는 것보다 착실하게 진행된다는 감각 아래에 쓸 수 있으며, 이는 곧 집필 동력을 꾸준히 공급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퇴고할 때 역시 집필 단위가 곧 이야기 단위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발생하면 그 부분을 찾고 퇴고하기 용이합니다.
단점은 이야기 단위를 끊는 센스와 노하우가 집필 감각의 전부를 좌우한다는 점입니다. 즉, 미숙하거나 실수가 일어나면 상당히 꼬이게 될 수 있습니다. ‘최소 집필 단위(한 번 집필할 때 쓰는 분량)=최소 이야기 단위’에 가깝기 때문에, 최소 집필 시간이 확보되지 않아 절대적인 최소 집필 분량 부족하다면 결국 분량 단위로 끊어 쓰는 것과 별 차이가 없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 단위로 쓰기 때문에 다음에 써야 할 이야기 단위가 준비돼 있지 않으면 그대로 멈춰버린다는 것 역시 리스크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는 기획 단계에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집필 단계에서 발생할 다양한 변수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분량을 끊어서 집필하는 방식은 상당히 널리 알려졌고, 보편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웹 플랫폼들이 분량을 기준으로 최소 단위를 설정하는 것 역시, 불분명하고 불규칙적인 이야기 단위보다는 명확한 기준을 정할 수 있는 분량 단위가 더 확실하고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이 방식의 최대 장점은 일정함을 유지하는 데에 최고라는 점입니다. 어떻게든 분량만 채워놓으면 되기에, 정해진 날에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분량을 쓰는 것은 글쓰기를 습관화하기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따라서 글쓰기가 습관이 안 된 분들에게는 이야기 단위로 끊어서 쓰는 것보단 분량 단위로 끊어서 쓰는 것이 훨씬 적합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든 분량만 채우면 된다’는 조건은 분량 내 전개의 유연함을 강조합니다. 전개를 빼고 싶을 땐 주어진 분량 안에 전개로 꽉 채울 수 있고, 전개가 막히거나 고민해야 한다면 남은 분량은 적절한 장면으로 채워 다음 집필까지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획의 불완전성을 고려할 때 작가 입장에서 실용적인 장점입니다.
단점은 집필 동력이 유지되기 힘들 수 있습니다. 분량 단위로 끊기 때문에 쓸 내용이 없어도 더 채워야 하거나, 더 써야 하는데 끊어야만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또한 일정함을 고려하면 무리해서 추가 회차를 더 써내는 것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특히 기세를 중요시하고 영감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할수록 이런 분량 단위의 집필은 집필 동력이 빠르게 소진돼 슬럼프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런 경향이 없다고 해도 집필 동력의 소진은 이야기 단위보다 빠르고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분량 단위는 전개를 충분히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착실하게 진행된다’는 감각이 이야기 단위보다 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전개의 유연함은 역으로 전개의 미진함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또한 분량 단위로 끊기 때문에 전개가 여러 회차에 걸쳐있고, 이는 곧 퇴고할 때 수정 영역이 넓어짐을 의미합니다. 훨씬 많은 분량을 돌아보고 점검하고 퇴고하는 건 곧 추가적인 체력/정신력 소모로 이어집니다. 물론 퇴고는 집필 당시엔 너무 먼 이야기이기도 하니 당장에 신경 쓸 단점은 아니기도 합니다.(일단 완성을 해야 퇴고할 때 단점을 체험할 테니까요)
어느 쪽을 택할지는 본인의 스타일을 따라가면 됩니다. 이야기 단위로 끊어 써도 최소 이야기 단위가 플랫폼이 허용하는 최소 분량을 넘는다면 이야기 단위로도 실시간 연재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혹은 이야기 단위로 집필하고 업로드는 분량 단위로 끊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연재-업로드가 항상 똑같이 묶여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2. 집필 과정에는 반드시 기획과 부딪히게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기획 파트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기획의 불완전성과 집필 과정에 추가된 세부사항 때문에 사소하더라도 기획과 충돌하는 일은 반드시 발생합니다.(발생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기획이라고 말할 게 없는 수준이거나, 미리 짜놓는 탑다운 기획이 아니라 실연재 바텀업 기획인 경우입니다.)
장편 연재에 익숙하신 분들은 저마다의 해법을 가지고 있겠지만, 제 경우 두 가지 해결 방법을 제안합니다. 각각은 기획과 집필의 충돌이 어느 지점에서 발생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저 사소한 기획과의 충돌입니다. 사소함의 기준은 장편 집필의 목적의식과 장편 이야기의 전체적인 정체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의 충돌을 말합니다. 즉, 이 기획을 수정하고 고친다고 해서 전체 기획에 금이 가지 않는 모든 경우입니다. 이 경우, 저는 집필을 우선시하라고 합니다.
이는 집필의 세부사항이 만들어낸 시너지를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발생한 시너지를 억지로 죽이고 불완전한 기획에 맞추게 되면, 작품은 크게 삐걱일 수 있습니다. 그건 작가만 내밀하게 간직하는 게 아니라 독자 역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중대한 기획과의 충돌이 있습니다. 즉, 여기서 집필을 우선시하면 작품의 정체성이 어그러지거나 이야기가 변질될 위험이 있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저는 기획을 좀 더 우선시할 것을 권합니다.
이는 기획의 역할 중 하나인 나침반과 방향성(코스)을 스스로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미아가 된 채 다시 올바르게(합당하게) 종점까지의 새로운 코스를 짤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습니다. 타고난 센스는 물론이거니와, 완성의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져 있지 않는 한, 기존의 기획을 부정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획을 유지하기 위해 기획을 어그러뜨릴 내용을 수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경우에 따라 이전 회차까지 건드려야 할 수 있겠지만, 기회비용의 문제로 환원하면 감내할 수 있을 겁니다. 기존 회차를 수정하고 갈아엎는 걸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기획 없이 새롭게 써야 할 앞으로의 분량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 안정적이고 지속적이며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는 방식인지는…… 각자의 가늠과 잣대가 결정할 따름입니다.
이러한 충돌들을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집필하면서 끊임없이 기획과 대조하며 점검하는 것입니다. 즉, 충돌하기 전에 미리 조율해두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율은 집필 내용에 대한 높은 이해와 충분한 의도가 반영됐을 때, 그리고 기획 언어와 집필 언어 사이의 간극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때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작업은 결국 매 집필 때마다 추가적인 체력/정신력 소모를 의미합니다. 적절한 수준에서 점검 빈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고, 아직 본인이 그러기엔 집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면 굳이 시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3. ‘집필을 중단’하는 일은 최대한, 되도록 없는 편이 좋습니다. 매우 당연한 이야기기도 하고, 전제 파트에서도 다뤘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집필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휴식을 취하는 건 지속적인 창작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집필 감각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집필이 중단되는 일은 일어나선 안 됩니다.
설령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필을 중단해야 한다면, 언제라도 집필 감각을 찾을 수 있게끔 기획을 갖춰놓는 것이 좋습니다. 중단 기간이 길수록 더 근본적인 부분까지 상기하고 그 감각을 자기 것으로 다시 삼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집필하게 된다면, 집필 감각을 되찾을 때까지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공을 들여 재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전 수준까지 회복해야 함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예전처럼 집팔 동력을 갖추는 게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집필 감각을 재활할 수 있을 때 이전보다 더 열심히 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집필 감각을 유지할 소소한 방법들을 강구하는 것 역시 좋습니다. 짧은 문장들을 꾸며보거나, 한순간의 장면들을 묘사해보거나, 독서하거나, 다양한 콘텐츠를 감상하는 등, 집필을 중단하게 됐다면 최소한 관련된 활동을 통해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3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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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단위로 끊어서 쓰거나, 분량 단위로 끊어서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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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기획을 어긋내면 집필을 우선시하고, 큰 기획을 어긋내면 기획을 우선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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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치 못하게 집필을 중단하게 되면 감각이라도 유지해라
사실 장편 쓰는 노하우를 전부 다루는 건 너무 힘듭니다. 인물, 사건, 배경에 맞춰서 노하우를 다뤄도 이만한 분량이 더 나올 수도 있고요. 다만 너무 세세하고 개인적인 팁들은 배제했습니다. 노하우 내내 강조했듯, 저마다의 완성의 감각은 다르고, 집필 감각과 방식 역시 천차만별이니까요.
어설프게 남의 세밀한 노하우를 따라갈 바에, 큰 방향성에서 자기만의 구체적인 노하우를 찾아가는 방식이 옳다 여겼습니다.
결국 위의 길고 긴 노하우를 정리하면 완성부터 많이 해라! 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하우를 지배하는 건 ‘완성의 감각’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글을 많이 안 써본 사람이 장편 쓰는 걸 좋게 보진 않습니다. 좌절하기 쉽고, 무기력해지기 쉽거든요. 그보단 사소하고 분량이 적더라도 ‘완성’할 수 있는 짧은 글부터 쓰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디 창작이란 게 그렇게 계획적이고 철저하게 되던가요? 각자의 믿음과 낭만과 꿈과 열정과 영감과 흥미를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장편 연재는 길고 혹독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인 만큼, 섣불리 좌절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도 이거 쓰는 동안 몇 번은 마음이 꺾일 뻔했는데, 어떻게든 완성하게 됐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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