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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북클럽] 뱀파이어가 나오지 않는 뱀파이어 소설

분류: 책, 글쓴이: 랜돌프23, 6시간 전, 댓글1, 읽음: 26

이번에 학교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가 굉장히 흥미로운 호러 소설 하나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한 방울만 더 (Bara en droppe till)’로, 괄호 안에 적힌 언어가 뭔가 익숙한 듯 낯설다고 생각되실텐데, 이는 다름 아닌 스웨덴어입니다. 그리고 스웨덴은 명작 호러 로맨스(?) 소설 ‘렛미인’의 고향이죠. 평소에는 미국 소설이나 일본 소설을 주로 읽어왔었는데, 이번에는 갑자기 좀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어서 스웨덴 쪽으로 눈길을 돌려봤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걸 시도하면 꽝이 걸릴 때도 많지만 간혹 놀라운 만남을 겪을 수도 있는데, 이번엔 다행히도 후자에 속하는 경우였습니다.

이 소설은 요약하자면 ‘

뱀파이어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역설적으로 느껴질 법한 요약이지만, 이것 말고는 이 소설을 표현할 방법이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호불호가 꽤나 많이 갈릴 것 같은데, 직관적으로 뱀파이어가 뙇 나타나서 사람들을 차례차례 습격해 참극을 일으킨다는, 스티븐 킹의 ‘살렘스 롯’과 같은 스타일을 기대했다면, 이 소설은 다소 취향에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따로 노는 것 같은 두 이야기가 나중에 퍼즐조각처럼 딱 맞물려 돌아가면서, 모호했던 내용이 기괴한 실체로 수렴하는 쾌감 같은 걸 좋아하신다면, 그리고 직관적인 공포 보다는 무지에서 오는 안개 같이 불쾌하고 찝찝한 공포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도 분명 좋아하실 거라 생각됩니다.

이하, 아래의 내용은 본 소설의 핵심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소설을 읽으실 계획이 있다면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 두 시간대를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현재 시간대에서는, 스웨덴의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술집에 모여서 두려움에 떠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이미 위에서 ‘뱀파이어’라는 말을 해버리긴 했지만, 이 소설은 초반에 그 두려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바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미 사건은 한참 진행이 된 듯, 마을 사람들은 서로만 아는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심합니다. 그리고 조금 뒤에 그것이 뱀파이어에 대한 공포라는 것이 보다 진전된 대화 속에서 무심하게  밝혀지죠.

이 소설의 템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방식입니다. 무지에서 오는 답답함과 불쾌함, 그리고 불안한 공포를 상당히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진상을 알려주는 방식 또한 요란하게 ‘짜잔, 이거였습니다’하고 강조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아무렇지 않게 툭 던져놓습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방금 내가 읽은 게 제대로 읽은 게 맞나?’하는 위화감과 기괴함을 종종 느낄 수 있습니다. 방금 위에서 설명한 내용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둥, 이 마을을 떠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둥, 독자 입장에서는 앞뒤 맥락 없이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대화를 쭉 나누다가, 아무런 예고도 언질도 없이 (말하자면 깜빡이도 안 켜고) 청년 마티아스가 ‘뱀파이어를 유인해보는 건 어떨까요?’라는 표현을 ‘차라도 한 잔 마실까요?’처럼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지는 걸로 진상을 보여줍니다. 마을사람들이 놀라거나 그러는 장면도 없습니다. 이미 뱀파이어라는 걸 알고 지금까지의 모든 대화를 나눠왔던 것이라는 듯,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한편, 과거 시간대에서는, 이와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해당 시점으로부터 3년 전, 귀가 도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이는 바람에,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뇌의 기능이 거의 소실되어서 휠체어에 앉아 모든 행동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가 된 아내를 데리고, 시골 마을로 이사 온 남편의 시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즉, 현재 시간대는 3인칭 서술, 과거 시간대는 1인칭 서술입니다. 아내가 다시 회복되어 예전처럼 자신을 알아보고 말도 하고 걸어다닐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은 의학적으로 전혀 없는 상태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아내의 수발을 들며 곁에서 돌보겠다는 결심을 한 남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방금 나왔던 ‘뱀파이어의 공포에 떨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는 색깔이 많이 달라서, 처음 읽을 땐 그 분위기 전환이 꽤나 당황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소설은 전에도 많았고 (특히 댄 브라운과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이런 식의 전개를 즐겨 사용했죠) 저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형식이었기에, 곧 저는 소설을 읽어내려가면서, 이 두 이야기가 어떻게 맞물리게 될지 추측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제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하 스포일러>

 

솔직히 말해서, 읽다보면 마냥 오락성으로 ‘으아아 무섭다’라는 감정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건드리는 부분이 꽤 많아서 마음이 좀 불편해지는 소설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스티븐 킹의 ‘캐리’나 영화 ‘브링 허 백’ 쪽에 속해 있는 느낌?

 

스웨덴이 선사하는 낯설고 기이한 호러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소설 ‘한 방울만 더’ 추천합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 ‘미드 소마’도 스웨덴이 배경이었는데, 스웨덴이 호러 장르의 잠재성을 굉장히 크게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랜돌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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