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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북클럽] 정신나갈것같은이야기 후기

분류: 책, 글쓴이: 이비스, 11시간 전, 댓글10, 읽음: 41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이었습니다.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선 헌 책방 한 구석에는 백발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졸고 계셨죠. 

오래된 책에 소복히 앉아있던 먼지도, 아스팔트 바닥을 세차게 때리던 빗소리도 그 분을 깨울 수 없었어요.

입구에서 비가 그치기만 기다리긴 어색했기에 책방 안으로 들어갔죠.

색이 바래서 비슷해 보이는 오래된 책이 늘어져 있는 책장을 훑었어요.

거기서 그 책을 발견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검은색 표지에 빨간색 글자로 포인트를 준 단순한 표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 정신 나갈 것 같은 이야기 (편집부 엮음)

 

어릴 적 보던 시시한 공포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실제로 책을 열어서 몇 이야기를 읽어보니 제 예상이 맞았어요.

아주 오래 전 국민학교에서 한번쯤을 들어봤을 귀신 이야기가 그 시절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활자체와 함께 적혀져 있었죠.

어떤 이야기는 무섭다기 보다는 옛 추억을 떠올리는 느낌이었어요.

어릴 적 언니와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 자기 괴담이 가장 무섭다며 나누던 대화가 생각나는 그런 이야기들이었거든요.

하지만 추억을 곱씹는 느낌은 책 중간 정도에서 싹 사라져버렸어요.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나오는 귀신에게 쫓기며, 양손으로 머리를 싸잡고 외치는 장면에서 말이예요.

 

“정신나갈것같애.”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그 한마디에 가슴 속 어딘가가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어요. 

그 이상하고 불쾌한 느낌은 페이지를 넘기며 계속 되었어요.

주인공은 그 말만 반복했거든요.

 

“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

 

한페이지가 그 말로 가득찬 것을 보았을 땐, 제본이나 출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다음 페이지도, 그 다음 페이지도, 그 다음 페이지도… 수 페이지 내내 빽빽하게 적혀져 있는 그 말을 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어요.

 

정신이 나갈 것 같다는 것 말이에요.

주인공은 초자연적인 것을 보고 연약했던 정신이 어디론가 가출해버릴 것 같았던 거에요.

그래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신이 보고 있는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역으로 자신에게 끊임없이 되뇌였죠 – 내가 지금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태라는 인지시켜서 정신이 나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요.

 

끊임없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그 독백을 보며 불쾌하고 단조롭고 이상한 옛 기억이 머리를 채우는 것 같았어요.

이불 속에서 같이 괴담을 나누머 히히덕대던 언니도 그랬었던 것이 생각났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었었죠.

그리고 자신에게 말했어요 – 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

 

왜 그걸 이제야 눈치챈 걸까요? 

저도 마찬가지였다는 걸요. 

끝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밀려들어오는 일들. 

언제 숨을 쉴까 싶은 철야의 연속. 

먼 곳으로의 출장. 

이어지는 보고와 회의.

맞는 숫자들, 틀린 숫자들.

이해관계자, 손익분기점, 출력본, 데드라인, 업데이트.

 

그 끝에서 저도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어요. 

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에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에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에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애정신나갈것같에정신나갈것같애

제가 뭐라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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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고 계시던 할아버지도 커다란 양손에 고개를 파묻고서 흔들고 있었어요. 

비를 피하려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걷던 샐러리맨도 고개를 흔들고 있었어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택시기사 아저씨도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있었어요.

 

저는 책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어요.

빨리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야 할 것 같았지만 페이지가 끝나지 않았어요.

같은 활자만이 끝나지 않는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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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저도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나봐요.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요.

 

사실 책을 끝까지 읽진 못했어요.

할아버지가 책을 빼앗아 책장 높은 곳에다 올려 놓으셨거든요.

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할아버지가 다시 코를 골며 주무시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요.

비가 그쳐서 책방을 나왔고, 다음에 또 들렀지만 그 책을 찾을 수는 없었어요.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부분만 후기를 남깁니다.

간만에 언니한테 연락을 해봐야겠어요.

정신차리고 잘 살고 있는지.

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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