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란 무엇인가
용복 님이 자유게시판에 ‘SF란 도대체 뭘까요…?’라는 게시글을 올리셨었는데,
그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몇 자 적고 싶어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뭔가 댓글로 쓰기엔 너무 내용이 길어질 것 같아 따로 게시글을 올리게 된 점 미리 양해 구합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SF 전문가가 아닌, 그저 SF를 좋아하는 일개 팬으로서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적고자 합니다. 제 글이 정답이지 않을 것이며, 다른 분들의 다른 의견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저도 장우 님과 마찬가지로 SF란 대체 무엇인가 라는 고민을 많이 해봤었고, 사실 현재 진행형이기도 합니다. (아마 여기 계신 장르를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이 다 그러시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ㅎㅎ) 특히 저는 SF와 판타지를 무슨 기준으로 가를 수 있는가 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이게 언뜻 분명히 달라보이면서도 자세히 파고들면 ‘얘가 SF인가? 이 정도면 판타지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가?’, 혹은 반대로 ‘이게 판타지? 이 정도 설계와 논리성이라면 이것도 SF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만한 스토리나 설정이 나오기도 하니, 곰곰이 생각할 수록 혼란스럽더라고요.
이젠 너무 유명해져서 진부하다고까지 느껴질 만한 말이지만, 아서 C. 클라크가 ‘충분히 발달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저는 ‘과학’과 ‘마법’의 차이에 대해 고찰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굉장히 1차원적이긴 하지만 가장 직관적으로, ‘과학’을 다루면 SF, ‘마법’을 다루면 판타지라고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물론 이 두 장르가 이런 단순한 기준으로 나뉘지 않는 복잡한 하위 구조가 있다는 건 잘 알지만, 문제에 쉽게 접근하기 위해 단순한 모델부터 세워보기로 했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양자 조립 자판기’라는 게 있다고 해봅시다. 그 안에는 표준모형에 나열되어 있는 기본 입자들이 쿼크 별로, 렙톤 별로, 게이지 보존 별로 잔뜩 들어있어서, 어떤 것이든 배출구를 통해 나올 만한 사이즈에 해당하는 것을 주문하면 그 입자들을 조립해서 뚝딱 내놓습니다.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은 제쳐두고, 일단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물질은 기본적으로 쿼크와 전자로만 이루어져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사이즈 제약만 제외하면, 실로 이 자판기는 만물을 내놓는 자판기인 겁니다.
그리고 마법사들의 ‘마법 지팡이’를 가져와봅시다. 주문을 외우면 얘도 원하는 것을 뚝딱 만들어 냅니다. 물론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고, 그 정도의 마법 실력이 숙달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원한다고 드래곤을 불러낼 수 있는 게 아니죠. 지팡이가 사용자의 주문에 충분히 응답할 수 있도록, 지팡이와의 유대감을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문을 외는 자가 실로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정신적 숙련도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나는 이걸 원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이 구체적으로 뭘 원하는지 잘 모르거든요. 잘못하면 모순된 특성을 가진 게 나올 수도 있고, 중요한 부분이 빠진 채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걸 전부 제외하고 정확하고 정교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려낼 수 있는 정신, 그게 필요합니다. 아무튼 이 마법 지팡이도 숙달만 되면 뭐든지 원하는 걸 내놓을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 뭐가 SF 설정이고 뭐가 판타지 설정으로 보이시나요?
둘 다 ‘원하는 건 뭐든 내놓는다’라는,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성질을 가지고 있긴 한데, 얼핏 들어서는 ‘양자 조립 자판기’가 SF이고, ‘마법 지팡이’가 판타지인 것 같지 않나요?
그럼 대체 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길래 그렇게 느껴지는 걸까요?
‘양자 조립 자판기’는 현재까지 잘 정립된 이론에 근거해 과학적으로 타당하고, ‘마법 지팡이’는 이런 저런 내적 정합성을 가진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과학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으니까, 라고 대답할 수 있으려나요…?
사실 제가 일부러 넣어둔 요소이긴 합니다만, 양자조립자판기엔 과학적 오류가 있습니다. 사실 쿼크는 따로 떼낼 수 없습니다. 쿼크는 항상 붙어다니거든요. 그리고 게이지 보존들을 따로 떼내어서 쌓아둔다? 흐음… 제가 입자물리 전공은 아니라서 맞다 틀리다 확언하기 힘들지만 조금 미심쩍습니다. 즉, 양자조립자판기는 현재까지 정립된 이론에 근거했을 때 틀린 부분과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얘가 SF 설정일까요?
‘SF는 맞죠. 고증이 틀리거나 애매한 것일 뿐.’
이것도 맞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세세한 설정이 틀렸다고 갑자기 SF가 판타지로 분류되는 것도 좀 웃기고요. 그럼 ‘현재까지 정립된 이론’에 얼만큼 맞아야 과학적으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90%? 70%?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어떤 수치적인 기준선이 있을까요? 아무튼 제가 위에서 말한 기준은 이렇게 보면 애매합니다. 입자들을 어떻게 잡아서 어떻게 조립하는지도 사실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된다고 제시할 뿐이죠. 뭔가 구체적이어 보이지만, 자세히 파헤쳐 보면 양자 조립 자판기는 과학적 용어 몇 개를 끌어다 만든 얼렁뚱땅 발명품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SF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죠. 만약에, 만약에 타당성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면, 그냥 판타지 설정 하나 가져다 두고, 과학적 용어 몇 개 붙이는 걸로 갑자기 SF가 된다고 할 수 있는 걸까요? 마법 지팡이에 ‘양자역학적 확률 증폭기’라는 숨겨진 설정을 넣어두면, 이제 이건 SF가 될까요? 반대로, ‘양자 조립 자판기’의 원리를 아예 모르고, 그냥 원하는 걸 입력하니 그게 나오더라 하는 ‘마법 자판기’가 된다면? 이제 이건 장르가 판타지가 될까요?
‘당연하죠. 실제로 존재하는 걸 따지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에서 그런 원리가 성립하는 세상이냐 아니냐로 SF와 판타지가 갈리는 거라고 보면 되잖아요.’
맞습니다. 이를 이용해서 처음엔 마법 판타지인 척 했다가 ‘양자역학적 확률 증폭기’라는 설정을 넣어서 SF로 장르를 틀어버리는 재미있는 시도도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건,
과연 어떤 게 충분히 과학스러운 원리이고, 어떤 게 충분히 마법스러운 원리인가?
입니다. 왜냐면 제가 처음에 마법 지팡이를 소개할 때, 제약조건과 사용법을 설명하면서 지팡이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원리를 함께 곁들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양자 조립 자판기보다도 더 긴 설명을요. 어쩌면 말이죠, 이런 원리는 그 마법 세계에서는 물리학 같은 자연의 이치이자 세상의 원리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왜 이런 마법 지팡이의 설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땐 SF처럼 안 느껴지고, ‘양자역학적 확률 증폭기’라는 게 들어가는 순간 SF처럼 느껴질까요?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다가, 아래와 같은 추론을 해봤습니다.
SF 속 과학은 입력과 출력 사이에 현대 과학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며,
판타지 속 마법은 입력과 출력 사이에 연쇄적 인과관계가 부재하고 그 세계관에서만 허락된 임의로 설정된 대응관계만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양자 조립 자판기에서 원하는 물건이 나오는 것에선, ‘내가 원하는 걸 주문한다’라는 입력과 ‘원하는 것이 나온다’라는 출력 사이에, (고증이 틀리기는 했지만) 표준모형과 양자역학이라는 현대 과학이론에 기반한 설명이 성립하는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마법 지팡이는 이런 저런 설정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주문을 외며 마법 지팡이를 휘두른다는 입력과, 원하는 물건이 나온다는 출력 사이에는, 현대 과학에 입각한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기 보다는, 마치 약속처럼 정해진 대응관계만이 존재한다고 여겨집니다. 만약에 마법 지팡이의 입력과 출력 사이에 그런 과학적 인과관계가 끼어드는 순간, 이제 그건 장르가 판타지가 아니라 SF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봤을 때, 저는 아서 C. 클라크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이라는 것은, 입력과 출력 사이의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너무나 복잡하고 깊어서 사용자가 이해할 수 없거나, 입력과 출력 사이의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상상도 못 했던 방향으로 연결되어 입력과 출력 사이의 연관점이 파악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며, 이는 입력과 출력이 임의의 대응관계로 묶여 있는 마법과 다를 바 없이 인지된다.’
양자 조립 자판기에서 그 과정이 우리가 아는 과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마법 자판기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즉, 작품 설정 내에서 마법과 과학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작품 내에서 묘사되는 현상의 입력과 출력 사이에, 현대 과학에 기반한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지느냐, 아니면 임의의 대응관계만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느냐 에 따라 달라지는 인상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이러한 생각엔 몇 가지 한계가 있습니다.
1. 처음에 내놓은 전제, 즉 SF는 과학을 다루고 판타지는 마법을 다룬다는 단순한 모델이 가지는 폭넓은 응용의 한계. SF는 반드시 현대과학이라는 레퍼런스에 종속되고, 판타지는 마법이라는 소재에 종속되어야 하는 걸까요? 제 모델은 두 장르를 너무 협의(狹義)로 파악한 걸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선 다른 분들의 반박과 더 많은 (제 모델에서 벗어나는) 작품들의 제시를 통한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 실제 장르의 엄밀한 구분이라기보단, 어떤 걸 ‘SF스럽다’, ‘판타지스럽다’라고 느끼는지, 그 주관적 인상에만 치중하였다는 점.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하고, 그게 사회적 약속의 기반이 되긴 합니다만, 명확한 구분을 위해선 보다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번의 단점을 다소 보완하여 제 구분을 보다 일반화하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SF 속 과학은 입력과 출력 사이에 (우리 현실세계에서든 이야기 속 가공의 세계에서든) 관측과 실험을 통해 설명될 수 있는 (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연쇄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며,
판타지 속 마법은 입력과 출력 사이에 관측 가능한 중간 인과관계 없이 세계의 원리로서 (독자 입장에서 약속으로 설정된) 대응관계만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고찰과 의견이므로, 동의하지 않으시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 댓글로 토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제 모델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SF와 판타지가 각각 무엇이고, 그 둘의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라도 된다면 신나고 기쁠 것 같습니다 ㅎㅎ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