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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의 힘

분류: 수다, 글쓴이: 랜돌프23, 23년 4월, 댓글2, 읽음: 95

학교폭력이라는 소재가 너무 힘들어서 안 보고 있다가 최근에 <더 글로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 드라마를 보고나서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거기에 나오는 대사 하나 하나가 제가 느낀 감정들을 정리해주었습니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그 드라마를 객관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그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볼 수 없는 제 입장에선,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지키려고 학교에서 발버둥쳤던 입장에서, 그 드라마는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구원이 되고 위로가 되더라고요.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호러 장르에서 종종 얻던 위로를, 이런 장르에서도 얻을 수 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나오죠.

증오는 그리움을 닮았다고.

그 문구를 보고 제가 가졌던 감정이 뭔지를 누군가가 구체적으로 짚어서 알려준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구체적으로 마주하고나니 되려 마음이 전보다 편해졌습니다. 잘 모르겠는 것, 즉 미지를 마주하고 끌어안고 있을 때, 그 모호한 상태를 지속할 때 가장 힘든 것 같습니다.

걔네들은 뭘 하고 지내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그 얼굴을 잊지 못 하고, 걔네들이 행한 것, 내뱉은 말들이 꿈에도 종종 나와 괴롭히는데, 걔네들은 제 이름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요. 여기서 쓰는 이름은 필명이라 이 글을 봐도 못 알아보겠지만, 기억은 못 하더라도 적어도 어디선가 자신의 학창시절을 즐거웠던 추억으로 떠들고 있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용서가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저는 아직 용서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드라마처럼 복수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증오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앞을 향해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다짐을 하게 만든 것에 그 드라마의 영향이 적지 않네요. 제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 좋은 친구들 덕분이기도 하고요.

 

걔네들도 어디선가에선 살아가고 있겠죠. 언젠가 누군가가 기억을 해내서, 자기 미래를 망칠까봐 두려워서든 정말 후회하고 반성해서든, 저에게 사과하러 온다면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네요.

 

작품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어떤 장르의 어떤 글을 쓰시든,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다음 편이 궁금해 더 살아갈 소박한 동기가 되고, 위로가 되고, 또 구원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장르문학엔 그런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네요. 제가 원하는 공부를 하며 여기서 글도 쓰고 작가님들, 독자님들과 소통하는 이런 일상을 그저 계속 지속해나가고 싶습니다. 저에겐 참 선물 같은 현재네요.

 

비슷한 아픔을 가진 분들이 계신다면, 부디 너무 아파하지 마시길. 제가 과거에 썼던 한 소설 마지막에도 나왔던 문구지만, 다시 적어봅니다. 그건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가 있다면,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진심어린 사과를 하기를 바랍니다. 학창시절 때,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 그만했어야 했고, 그게 피해자가 용서해주겠다며 수없이 쥐어준 기회이자 사과할 적기(適期)였습니다. 이젠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사과하길 바랍니다.

 

너무 무거운 글을 썼다면 죄송합니다.

랜돌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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