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로 이런 여운이 가능하다고?
안녕하세요, 조나단이라고 합니다.
편집부 추천 셀렉션으로 <곶자왈에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저도 운 좋게 단편 하나를 실었고, 보내주신 책을 읽었는데… 이거 감상평을 써야겠다,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고. (지금 다른 작업 중인데) 며칠 동안 자꾸 머릿속에 맴돌아서, 어떻게든 정리해 털어야 작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해서 단편집에 참가한 1인이라 멋쩍고 쪽팔리지만. 제 건 빼고, 독자로서 오래간만에 각잡고 리뷰를 써볼까 합니다. 각.잡.고.
나는 스릴러로 글쓰기를 시작했고 한동안 그걸로 먹고 살았지만. 소설을 쓰면서는 스릴러 장르를 ‘거의’ 쓰지 않았다. 매번 반복되는 패턴이 싫었고, 인물들에 감정이입하는 것도 힘들어서였다. 또 죽이는 이야기보다 살리는 이야기를 쓰고 싶기도 했고.
해서 자연스레 그쪽 소설도 멀리하게 됐는데, 간만에 읽어서일까? 이 단편집은 느낌이 다르다.
1.
첫 느낌. 일단 실린 단편들의 밀도가 고르다. 앤솔로지는 작품마다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경험으로도 읽은 작품간 차이가 들쭉날쭉했기에 이것도 그럴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 단편집은, 그동안 내가 읽은 (많지는 않지만) 추리/스릴러 단편집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급호감.
또 일본 탐정/추리 향, 영미 스릴러 향이 느껴지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동안 작가들 지형이 변한 걸까? 어느 정도 자기 색깔을 갖춘 작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은 것 같다. 해서 작품마다 개성이 느껴지고. 지향점이 명확하고. 무엇보다 스릴러로서, 자신들만의 ‘긴장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결과물이 나온 배경은 뭘까?
2.
먼저 브릿G라는 공간을 들 수 있겠다. 어느새 ‘단편소설의 보고’가 된 이곳에서, 어떤 작가들은 구애받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는 듯하다. 이 단편집은 그런 작가들을 찾아내어 맺은 중간 열매들이다. 다른 셀렉션들처럼.
또 이 단편집은 이런저런 카테고리로 작품을 ‘모집해서 묶어’ 출간한 기획물이 아니다. <편집부 추천 셀렉션>이라는 타이틀답게 편집부가 오랜 시간을 두고 알음알음, 브릿G에서 작가를 기다리고 작품을 찾아낸 단편집이다. 그 사정을 아는 나는 편집자 분들의 노고가 느껴지고. 그래서 더 감사하다.
(잠시 샛길로 빠지면. 나는 꽤 오랫동안 대기한 참가자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3년째 되는 날 기어이 따졌다. “책은 대체 언제 나오는 겁니까!“ 편집자가 타이르듯 말하더라. ”응, 아니야. 보채는 거 아니야… 기다려~ 아직 두 편 더 찾아야 해.”)
그 뒤로도 2년을 더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걸 보면… 결과물의 공은 편집부에게 돌려야 할 것 같다.
3.
돌아와서. 이 단편집은 ‘크라임 앤솔로지’라는 부제에 걸맞는다. 이 책에는 크고 작은 범죄들이 있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반전과 정서로 풀어낸다. 평균 이상의 밀도로.
또 작품들은 자극적 소재나 설정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더 사소한 ‘사건’들을 가져온다. 자신들이 취한 소재를 직시하고. 스릴러 틀 안에서 심리적 긴장들을 쌓아간다.
이제껏, 이 정도 서스펜스를 구사하며 이런 다양한 정서를 주는 스릴러 단편집은 못 본 것 같다. “스릴러로 이런 여운도 가능하구나.” 하는 작품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 스릴러의 어떤 새로운 시도? 지향? 같은 걸 발견한 것 같아 반갑다. 누군가 이 작품들을 규정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해주면 좋겠지만. 우리나라에 그럴 추리/스릴러 평론가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계시다면 자기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4.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재미있게 읽은 독자로서, 각 작품의 ‘개인적인’ 감상을 적어보면.
<16개월 동안> 이나경
건달 누아르. 건달 화자가 풀어놓는 16개월 동안의 범죄와 살인사건 이야기. 화자는 다소 무덤덤하니(이건 작가님 의도임이 분명해) 그 과정을 고백하는데.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사건들의 진폭과 텐션이 상당히 크다. 작가가 독자를 화자에게 감정이입시키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 영상화되면 좋겠다. 이야기가 확장하면 좋겠지만 단편영화로도 괜찮겠다. 그러면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 진폭과 사건의 텐션이 극대화될 것 같다. 다만, 1인칭 소설만이 줄수 있는 심리적 반전을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하느냐가 관건이겠다.
<독> 현이랑
Poison 아닌 항아리. 할아버지 장례를 마친 자식들과 손자들. 소란스러운 대가족 앞에 독에 든 시체가 나타난다. 이 작품은 마치 임권택 감독의 <축제> 같은 가족 소동극을 보는 것 같다.
그 소동극을 지켜보다 보면 화자를 두고 일어난, 오래 전 가족의 비밀과 마주하게 된다. 그 비밀은 예전 한국 사회에서 일었났을 법한(실제로는 종종 일어났던) 비극이고. 그래서 더 싸한 여운을 남긴다.
<사라진 것> 박한선 땀샘
한국형 ‘코지 미스터리’가 가능하다면, 이런 작품이어야 하지 않을까? 가벼움은 빼고 사소한 사건으로 이 정도 긴장을 주는 코지 미스터리. 차분한 문장으로 독자가 어린 소녀를 따라가게 한다. 아빠의 택배 일을 돕던 소녀는 ‘순수한 호의로’ 어떤 할머니를 도와주게 되는데… 마지막에 밝혀지는 반전의 심리적 충격이 상당하다.
그 충격은 ‘고된 일상의 한 단면’이라 현실적이고. 소녀가 느끼는 ‘어떤 감정’이기에 울림이 있다… 마지막에 소녀는 알게 됐을 거다. 어른들의 세계가 자신의 호의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진실을. 그 여운이 마음에 든다.
<파티에서 주는 박하차는 위험하다> 김태민
전통 탐정물의 현대화. 또는 변주. 서두가 길지만 ‘단서 배치’부터 ‘트릭 풀기’까지 정통 추리물 공식대로, 유려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거기에 개성 있는 콤비(홈즈와 왓슨), 그들이 보여주는 캐미와 적절한 유머, 한국 사회의 현재를 배경으로 한 사건의 진행은 ‘아, 이런 식으로 클리셰를 깰 수도 있구나.’ 하게 만든다.
그 전형성을 얼마나 극복했는지는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그것을 시도하는 작가님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우리 모두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잖아요?)
<치마> 한소은 피스오브마인드
이 작가님은 ’서스펜스‘를 제대로 배운 것 같다. 아파트 입구에 걸린 치마 하나를 두고 심리적 긴장을 쌓아가는 솜씨가 대단하다. 그러면서 ‘현실을 살아야 하는’ 화자의 이기적(?) 욕망을 드러내고, 주변 인물들의 속물적 본성을 까발린다. 그걸 또 심리적 반전으로 마무리한다. 그 반전이 주는 여운도 멋지다.
<나에게 있는 것 너에게 없는 것> 한소은
제주도 스릴러. 앞 작품 첫말을 확인한다(배운 양반인 게 분명해!). 가볍게 툭툭 치고 가는 묘사와 대사 속에 태연히 단서들을 깔아놓고. ‘예측하는 독자’를 이리저리 유인하는 데 능수능란하다.
매력적인 배경에 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매력적인 스릴러. ‘자유롭고 강인한 여성’을 구축했기에 마지막 ‘녹슨 칼’의 항변이 당위를 갖는다. 음, 아무래도 이 작가를 구독해야겠어. 했다.
<뻐꾸기 살인사건> 유아인 유우주
정통 탐정 추리물. 근데 늬앙스가 조금 이상하다. 아니, 많이. (추리물 전통대로) 고립된 외딴 별장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시작하는데. 인물들이 모두 ‘발 연기자’들이다. 그들이 ‘아주 진지하게’ 추리극 역할들을 하려고 든다.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발연기에 피식거리다, 끝내 깔깔거리게 만든다.
공식을 꿰뚫고 있는 작가의 영리한 시도라고 할까? 발연기가 귀여운 인물들이, 탐정물 규칙과 관습에 따라 어처구니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 그것이 작품의 정체성이다. 단편집의 발란스를 맞춰주는 엔딩작이기도 하고.
<곶자왈에서> 조나단
또 다른 제주도 스릴러.
덧. (낯뜨거움에) 쓸까말까 고민하다… 작가님들도 보시게 멘션을 걸었어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요.
“모두 고생 하셨고. 멋진 단편집에 함께 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작가님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자부심을 ’동력삼아‘ 계속 좋은 작품 써 주세요! 저는 좋은 독자가 될게요. :)”
이상입니다.
쓰고 보니 브릿G 게시판에만 어울리는 감상글이 되어버렸네요. 뭐, 브릿지안 분들 읽으시라고 쓴 것이니… 스릴러 좋아하시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분명 재미있으실 거예요. 또 이쪽 장르를 쓰시는 분들께서도 레퍼런스가 될 듯합니다. 모두 즐감하셨으면.
편집자님들. 작가님들. 그리고 읽어주실 독자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좋은하루 되시기를.